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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통 요구하며 소통을 막아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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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요구하며 소통을 막아버리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했을 법한 이 ‘평범한’ 질문은, 멈출 줄 모르는 촛불시위 현장에서 자연스럽지만 절실하게 떠올랐다.

대통령과 소통하고 싶다는 이유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 그들 옆에서 ‘이제 그만하자’고 외치는 사람들…. 사실 이들은 누구보다 대화하고 싶어서, 소통하고 싶어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정작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누구와도 대화하려 하지 않고 있다. 도로 소통까지도 막아버렸다. 이들은 그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자신들의 의견을 각자 소리높여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촛불이 계속 타오르면서, 타오르는 촛불의 갯수만큼이나 저마다 그럴듯한 ‘촛불끄기’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은 사그라들 생각이 없는 듯 하다. 한쪽에서는 법질서 붕괴를 막자며 또다른 ‘촛불’을 들고, 다른 쪽에서는 ‘파업’이나 ‘정권퇴진’으로 분위기를 몰아가 있다. 다들 수천년 전 카이사르의 말처럼 “자기가 보고싶어 하는 현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시청 앞에서 ‘천막교회’를 지은 사람도 생겨났고, 촛불집회 중단을 외치는 지도자는 목회자다. 뿐만 아니라 촛불집회의 원인이 된 ‘광우병 사태’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기독교인들이 관련돼 있다. 기독교인들 역시 뚜렷하게 두 부류로 나눠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를 가리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고 했다. 예수는 촛불집회에 나온 모 교회 성도처럼 ‘화평’을 외치면서 상대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고난의 길을 눈앞에 두고서도 말고의 귀를 벤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섣부른 행동’과 ‘칼’을 경계하셨다. 그렇게 그는 진정한 화평의 방법을 몸소 보이셨고, 결국 승리하셨다.

비록 소설이지만,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의 레이몬드 시(市)는 그 질문 하나로 성시화(聖市化) 됐다. 거룩한 희생으로 막힌 담을 허물어버린 예수의 정신을 실천할 ‘작은 예수’를 서울 한복판에서는 만날 수 없을까.

이대웅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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