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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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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니…
   
김만식 형제(남, 27세, 예수성결교회, 중국 길림성)


아무것도 모르고 한 서원기도

  나는 중국 길림성의 조선족 부모에게서 태어난 교포이다.
  하루는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동네 친구들이나 만나려고 밖으로 나갔는데 모두 교회에 가고 나와 놀아 줄 친구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얘기나 하자고 친구를 잡았다. 그런데 친구는 교회에 가는 길이라면서 오히려 같이 가자고 나를 잡아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교회나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 집사님 가정에서 삼일예배라는 것을 드리는데,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항상 같은 음에 같은 박자로 찬송을 불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이 이상하지 않으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중국 학교에서는 무신론을 교육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는 모두 사이비라고 가르쳤다. 그러한 교육 배경이 나의 사상을 지배하고 고정관념을 만들어 버렸다. 이런 나에게 친구가 교회를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다. 비록 친구이지만 그도 교회를 다닌다니 이상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너나 가라’고 하였지만 곧 친구의 손에 이끌리어 따라가게 되었다. 친구는 나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그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기도를 하면 이루어 주시고, 큰 복을 받는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고 물었다. 친구는 “네 친아버지께 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며 네 마음의 소원을 말하고, 끝에는 꼭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해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는데 그곳에 놀랍게도 우리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어머니한테 교회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리둥절하였지만 곧 생각을 수습하고 지난날을 뒤돌아보았다. 어머니께서는 모두가 잠든 밤에 누가 깨기라도 할까봐 이불을 뒤집어쓰시고 혼잣말처럼 하시던 것은 기도구나 하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었다.
  통성기도 시간에 ‘다들 기도하느라 아무도 듣지 못 할 테니 나도 해보자’는 생각에 친구가 가르쳐 준 대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 몸이 여기저기 아파요. 안 아프게 치료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한국에 들어가서 주일날 꼭 쉬는 회사로 가게 해 주시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것이 나의 첫 번째 기도였다. 나중에서야 이것이 서원기도임을 알았다.


응답된 기도

  나의 첫 기도가 이뤄질 것이라는 큰 믿음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셔서 몸의 병도 치유되었고 교회에 나간 지 3개월 만인 1996년 11월 19일에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1994년도였는데 부산 오징어잡이 배를 탔다가 7개월 만에 병에 걸려서 돈도 못 벌고 중국으로 돌아가 휴양을 해야만 했다. 두 번째 나올 때는 처음보다 400만 원 가량을 더 썼기 때문에 절대로 병이 나면 안되었다. 다행히 친구들이 한국에서 교회를 나가면 친부모 형제처럼 잘 돌봐 준다고 해서 나는 그 말이 큰 힘이 되었고 마음이 든든했다.

  이렇게 한국에 나와 취직된 곳이 경상남도 의령군의 가구공장이었는데 들어가고 보니 사장님이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주일날은 사장님이 절대로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후에 다른 직장으로 옮겼을 때는 주일날 쉬지 않는 것을 알고 5일 만에 그만둔 적도 있었다. 사람에게 한 약속도 중요한데 하물며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니 환경이 따르지 않더라도, 아니 지구가 두쪽이 난다 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베풀어 준 한국교회

  한국 교회의 성도님들은 중국에서 듣던 대로 친형제처럼 잘 대해 주었다. 특히 칠곡교회 담임 목사님은 친아버지가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쏟아 부어주셨다. 어떤 날은 너무 힘들어 교회에 들르지 않으려고 했다가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걱정하실까봐, 또한 나에게 쏟으시는 사랑을 생각해서 찾아 뵌 적도 있었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만 목사님은 나에게 “너 아무래도 사명자인 것 같다. 학비 걱정이나 다른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신학을 해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신학보다는 그동안 기도하는 가운데 꿈을 주셨던 일, 즉 중국 국적을 가졌으니 장차 돈을 벌어 사업가 자격으로 북한을 왔다갔다하며 그곳 고아들을 돌보고 선교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목사님께서 권유하시고 시간도 있었으므로 기도하면서 순종하려고 맘을 굳혔다. 그런데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신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 때도 아니려니와 분명히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가장 마음이 아픈 일은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돌아 가셨을 때에 찾아뵙지 못한 일이다. 당시 내 여권을 맡아 가지고 계시던 사장님이 여권을 어디다 두었는지 찾아도 없다며 여권을 돌려주시지 않으셔서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상심되어 할 말을 잃었다. 천하의 외톨이가 된 심정이었다. 교회가 생각 나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는데 목사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통곡이 터져 나왔다.
  살아 계실 때에도 효도 한번 못 했는데 돌아가셨는데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워 가슴만 치며 통곡하다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를 시작했다. 나의 슬픈 처지를 원망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가지고 나온, 어머니가 보시던 성경을 가슴에 안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 천국 가셨죠?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3일째 되는 날은 ‘내가 비정상이네? 정말 미쳤나? 그렇지 않고서야 슬프지도 않고 감사만 하는가? 내가 정말 불효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그치고 5일 휴가 중 2일을 앞당겨 출근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하니 어머니가 살아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마치 나의 아픔을 씻어 주시는 것 같았다. 변함없이 감사가 넘치고 고아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타올랐다.

내 마음의 소원

  지난해 2000년에도 어머니 기일에 이곳 강남금식기도원에 와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식된 도리를 못한 나를 학대하고 조롱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만식아! 너를 조롱하지 마라. 학대하지도 마라. 내가 네 대신 효도했고 더 좋은 천국으로 네 어머니를 인도했다. 네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은 그 마음으로 이제 나에게 효도해라!” 하나님의 그 음성을 듣고 내 속에 쌓였던 외로움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못한 괴로움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하나님께 평생 동안을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며 살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다. 기도 제목도 평생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100명이나 되는 일가친척 전도,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는 것이다. 북한에 사업가로 들어가 일반회사를 설립하고 그것을 모태로 북한의 굶주리고 헐벗은 고아들을 위해 헌신할 선교사업도 계획하고 기도 중에 있다.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장차 유학까지 보낼 야무진 계획으로 부풀어있다. 이것은 물론 물질의 축복을 받은 후의 일이지만 곧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내 삶의 우여곡절과 그때마다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얘기하자면 너무나 많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다 표현하지 못함이 아쉽다. 북한의 선교 사업이 실현되고 나면 그때 다시 생생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간증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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