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간증 내 어머니의 간증

첨부 1


제 목  내 어머니의 간증

- 신영희권사 -

< 이글은 1987 년 손자인 이성계 목사의 제의로 구술을 받아 딸인 신영희 권사가 정리한 것입니다. 글 중의 1인칭은 고 전학례 권사이신 제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


오 ! 예수 당신은 바로 나의 생명이옵니다.

나는 1910년 3 월 20 일 경북 안동군 일직면 국곡동에서 한 부농의 3 남 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아버님은 3 살 되던해에 돌아가셨기에 기억이 없으며,어머님은 내가 53 세 되던해인 1962 년 84 세로 하늘나라로 가셨으므로 50 년 간을 수절하시며 사신 깨끗한 어른이셨다.

내가 태어난 국곡동은 이름 그대로 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노란 국화가 그렇게도 많이 피던,신자가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세인들이 말하는 축복받은 아름다운 골짝 마을이었다.

이 곳에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예배당이 내가 태어나기전부터 조그맣게 세워져 있었는데,이로인해 국곡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신앙생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9 살 되던해에 외조부님으로 부터 한글을 성경책으로 배웠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성경책이 곧 국어 교과서였던 것이다.

물레를 잦고있는 내 옆에서 외조부님은 길다란 막대기로 성경책의 글자를 한자한자 짚으며 가르쳐주셨고,우리 가족들에게 "너희들 예수 믿어야지 안 믿으면 큰일난다" 라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맨처음 내 또래들과 교회에 들어가려고 했을때 파란눈과 노랑머리를 한 사람들이 어떻게나 무섭든지 모두들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한 열명 정도가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꼬집고 밀치고 야단들을 하다가 들어가기도 했다.

16 살 되던해에 선교사로 부터 학습문답을 받았는데 나는 한번 떨어지고 두번째에 합격해서 세례를 받았지만 나의 외숙모는 여섯번 떨어지고 일곱번째에 합격을 해서 세례를 받았다.

그 당시 두번만에 합격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서 문답에 합격하고 나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 사람도있었다.그 때 선교사들로 부터 "예수 사랑하심은 ....." 을 미국말로 배우면서 세상에 참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희한한 말도 다 한다면서 또래들과 킥킥거리며 마구 웃어대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중 17 세 되던 해에 7 살 위인 경북 의성 출신인 신윤경 안수집사와 시고모된 분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그분의 직업은 건축업이었다.그러므로 일본,만주 등의 외지로 주로 나가 계셨기에 아이들은 거의 나혼자 기르게 되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8 남매 중 어린 한명과 4 명의 장성한 자녀를 나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보낸 일이다.3 년이란 짧은 기간에 3 남매가 홀연히 가버리고 6 . 25 의 국난은 내 연배의 모든이들에게 크나큰 아픔의 기억이 되겠지만,나에게는 큰 아들을 잃고야 마는 슬픈 상처를 남긴 사건이 되기도 했다.

또 3 년 전(1984년)에 보낸 맏딸 신성희 집사는 지금도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아프고 참기 힘든 슬픔 속으로 몰아 넣는다.일찍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힘들고 어렵게 살면서도 나와 제 동생들을 끔찍히도 사랑하며 위했고,힘없고 늙은 나를 이곳 저곳 데리고 다니기도 했으며,옛날 일 마저도 함께 이야기하며 웃고 울던 원만한 성격의 딸이자 친구였는데 .....

그러나 이제 그도 다른 자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 가 있을 터이니 곧 다시 만나게 될 소망에 오늘도 살아간다.

이렇게 자녀들이 하나하나 갈때마다 이상하게도 내겐 천국에 들어가는 꿈이 확실하게 꾸여져 주님이 데려가심을 믿고 쓰리고 아프고 텅빈가슴을 달래고 있었는데 주위에선 "그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데 울지도 않네, 밥해 먹는 것 좀 봐","저렇게 예수를 잘 믿는집이 왜 아이들이 다 죽느냐 ?" 는 이웃들의 차가운시선과 비난은 자녀들의 죽음과 고통보다 더 나를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다니엘과 욥의 고난을 생각하며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조롱해도 하나님을 믿는 내 마음은 변함이없다.'며 더욱 더 믿음위에 강하게섰다.

그런데 3 자녀를 연이어 잃을 당시 나는 누그보다 전도에 힘을 쓰고 있었던 터라 내 처지가 이렇게 되고보니 도무지 전도가 되지 않아 그 와중에서도 이 일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게 또 왠일인가,주님은 나를 불쌍히 여겨 위로해 주실줄 알았는데 ,아니,시련은 이것으로 끝난줄 알았는데, 내 목엔 가슴까지 내려온 연주나력이라는 커다란 결핵성 혹이 생겨 보는 이마다 "저이는 이제 도랑건너 가다가 죽을거야" 라며 나를 힐난했다.

3 년 동안 내 인생 최대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으니 어미인 내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온전할 수가 없었다.어떻게 온전할 수 가 있었겠는가.그 당시 내 병엔 약이 없었고 걸리기만 하면 죽음으로 가는 길밖엔 도리가 없었다.

그 무렵 맏딸로부터 대구의 어느 강변에서 놀라운 병고침의 집회가 열리고 있으니 빨리 와보라는 것이었다.나는 믿음 밖에는 내 병을 고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곧 집회에 참석해보니 정말 수 많은 병자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강사의 곁으로 간다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것 같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분이 내 목을 한번만 만져주어도 나을텐데 ....." 라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어떤 여자 노인이 입도 눈도 다 뒤틀린 모습으로 누워서 비비꼬꼬 있는 그 참혹한 모습은 순간 나를 잊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제 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저분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 드리고 있는데 내 몸에 짜릿한 전율이 느껴졌고 나는 아이들 때문에 바빠서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 왔는데 이게 왠일인가,내려다 보면 가슴까지 축 쳐져있던 혹은 온데 간데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그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할렐루야 ! "

이 때부터 나의 믿음은 체험적으로 너무도 견고해졌고 남은 평생을 주님의 일을 하는데 바치겠다는 각오를 몇번이고 하게 되었고 그 각오의 실행으로 그 당시에는 제일 하기 힘든 일이라 아무도 하지 않아서 교회로서는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새벽기도회 시간을 알리는 종치는 일을 1970 년 서울로 이사올 때까지 18 년간 계속했다.

출타를 했다가도 오로지 종치는 일 때문에 항상 당일로 돌아와야 했으며,눈이 오나 비바람이 치나 거의 빠지지 않았다.자명종 시계가 없었던 우리집에는 남편의 손목시계가 있었지만,그것도 외지로 가실 때에는 가지고 다니셨기 때문에 그럴때는 언제나 새벽별의 위치를 보고 일어나 그 맑은 새벽공기를 헤치고 찬송을 부르며 교회에 가면 어김없이 비슷한 시간이 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신 시리고 푸른 별을 바라보며 무한한 그리움으로 먼저 간 내 자녀들과 주님을 바라는 소망의 삶을 살게된 것이다.

또 어떤 흐린 날에는 별이 보이지 않아 교회에 가면 1 시나 2 시일 때도 있었지만 그럴땐 그을음으로 새까맣게 된 남포유리를 입김으로 호호 불며 남포유리의 그 좁은 속으로 손을 넣어 말끔히 닦은 뒤 불을 한등 한등 켜 놓은후 땡 땡 땡 새벽종 소리로 잠든 성도들을 깨우곤 했다.

찬바람이 불면 아무리 두거운 장갑을 껴도 내 손은 항상 갈라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나는 즐겨 이 일을 했다

이런 저런 환경적인 여건은 철저하게도 나를 외롭고 숱한 그리움의 나날들로 이어지게 해서 기도와 전도,심방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어 버렸고,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의 궤도에 오르게 하심으로 밝은 생활을 하게 하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자녀들과 남편을 주님께 먼저 보냈으나 견딜 수 있엇던 것은 고집스러우리 만치 강한 내 인내와 어렸을 적부터의 믿음의 유산과 체험적인 신앙의 힘이 나를 침묵의 봉사자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 이제 황혼에 옛날 고향 교회에서와 같은 열과 성으로 육체적인 봉사는 못하나 내게 다져진 신앙의 힘을 밑거름으로 남서울교회와 목사님,그리고 성도들을 사랑하며 기도로 충성하리라 다짐해 본다.

부족함은 많았지만 그래도 내 전생을 나의 생명 예수 오로지 그 분의 과녁에 맞추며 떳떳하게 살아온 삶이라 자부하며 오늘도 이찬송을 불러본다.'나의 생명되신 주 주님앞에 나아갑니다' <424>

~ ~ ~ 마 라 나 타 ~ ~ ~

내 어머니 전학례 권사님은 1997 년 9 월 15 일 추석 이틀 전에 88 세의
나그네 인생길을 마감 하시고 초고속 승강기(제 표현입니다)를 타고 5 분 만에 소망하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 어머니의 신앙의 유산을 물여받은 저희 3 남매는 또한 어머니가 계신 천국을 소망하며 잘 달려가고 있답니다 ~

~ 주님 ~ 사 랑 해 요 ~ 이말 뿐이예요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