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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예비해두신 ‘드라마 같은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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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김미애 변호사 (△1969년 경북 포항 구룡포 출생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 합격 △2003년 동아대 법대 졸업
                                △현 동아대 법률상담센터 상담위원,동아대 법대 강사,김미애 변호사사무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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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비해두신 ‘드라마 같은 내 인생’ 

“현재의 모습이 초라해도 내 안에 확실한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룰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면 지금의 모습이 영원한 것이 아니란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나 역시 가난했지만 내 안에 꿈이 있었기 때문에 불우했던 환경을 헤쳐나올 수 있었단다. 우리 하나님께 기도 드리자.”

2년전 부산구치소에서 그 아이를 처음 접견하고 기도할 때 뜨거운 눈물이 양볼에 흘러내렸다. 사실 그 아이가 좀 모자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별 소득도 없던 일에 칼로 무고한 시민을 해치는 짓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치소에서 아이를 접견하고 깜짝 놀랐다. 너무나 멀쩡했고 생각보다 바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온 그 아아는 중 3때부터 절도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자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됐다. 대화를 하면서 아이의 성장배경을 알게 됐다. 5세 때 아버지가 재혼한 후 새엄마와 살면서 말할 수 없이 심한 학대를 받았다. 컴컴한 다락방에 갇혀 매질을 당했던 이야기를 할 때 아이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만일 주변에 진심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 아이가 지금 내 앞에 이런 모습으로 서 있었을까?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이 아이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졌고 최선을 다해 아이를 도왔다. 결국 2심에서 4년을 선고 받아 현재 복역중이지만 꿈을 갖고 살고 있다. 얼마 전에 아이의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책을 한 권 사들고 찾아 갔다. 이제 20세가 된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변호사님,고교 졸업 검정고시를 준비를 하고 있어요. 저도 꼭 변호사님처럼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기도해주세요.”

“주님,아이의 앞날을 축복하소서. 그리고 이 아이가 절대 꿈을 잃지 말고 삶을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 앞으로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가정환경 때문에 좌절하고 꿈과 소망이 없이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만나면 내 마음과 생각의 박동은 빨라진다. 꿈과 소망이 없는,방황의 어둠이 깊은 줄 알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부산 거제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사이버 청소년상담센터’를 개설했다. 나처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들을 보살피겠다는 처음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난 고시합격보다,변호사 자격증보다 더 값진 ‘위로 자격증’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자격증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있지만 제대로 역할을 못해 범죄의 세계에 빠진 아이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주고 싶다. 매일 사이버 상담을 통해 청소년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방직공장에 다니며 야간여상을 졸업하고 쇼핑센터 점원으로,초밥집 사장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했던 내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생 역전’ ‘드라마 같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인생이었음을 확신한다.

사실 처음에는 내 지난 이야기를 하는 게 몹시 망설여졌다. 그러나 불안한 자신의 미래 때문에 어정쩡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불우한 환경 때문에 꿈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연재하기로 했다.


2. 海女 어머니에 청천벽력의 암 선고 

‘어머니’. 해녀였던 ‘어머니’는 ‘하나님’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불러본 이름이다. 어머니를 기억하면 두 가지 모습이 오버랩된다. 시퍼런 바닷속에 뛰어들어 전복 해삼 멍게 등을 잡아서 5남매를 키워오신 어머니. 그리고 창백한 모습으로 방안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유년의 기억속에 맴돈다. 어머니는 내게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분이었다.

나는 경북 포항시 구룡포라는 작은 어촌에서 가난한 집안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유년의 기억속에 엄마가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온하고 행복했다. 고향 구룡포의 바다는 어머니의 품처럼 평화로운 곳이다. 갓난아이인 나를 바위 위에 뉘여 놓고 물질을 하시던 어머니의 체취가 풍겨나는 바다를 보면 지금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곳에서 여느 시골아이처럼 자연과 더불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어촌의 특성상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고 우리집은 부처님과 용왕님께 제사를 드리는 보통의 어촌 가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항상 불교도임을 표방했고 교회 다니는 아이들을 도맡아서 핍박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바른생활 책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실린 예수님 그림에 낙서하고 ‘예수님’과 ‘사랑’이란 단어를 ‘부처님’과 ‘자비’로 바꾸는 극성도 부렸다. 이런 내가 180도 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된 일은 초등학교 5학년 봄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내 유년시절 기억엔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철이 든 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아버지는 선박사업이 부도가 나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잠적해버리셨다. 그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서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론가 가셨다.

“집 잘 보고 있거라. 다시 오마.”

1주일이나 지난 후 아버지는 혼자서 돌아오셔서 어머니의 옷가지들을 챙겨서 다시 병원으로 가셨다. 오빠랑 잘 지내란 말씀만 남기고 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직감적으로 엄마에게 큰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 이제 어쩌나? 엄마가 무슨 큰 병에 걸리셨나보다. 내가 할 일이 뭘까?’

집 앞마당에다 상을 편 뒤 그 위에 물 한 그릇을 떠놓고는 내가 아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 그때까지 단지 엄마가 절에 다니신다는 이유로 핍박하던 예수님,엄마가 믿던 부처님,용왕님,산신령님 등 내가 아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당에 무릎 꿇고 앉아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우리 엄마 큰 병 아니도록 해주시고 빨리 나아서 집에 돌아오게 해주세요.”

이런 나의 기도와는 상관 없이 엄마는 약 3개월 후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자궁암 말기였다. 병원에서는 길어야 3개월쯤 살 수 있다고 했다. 병이 깊어 수술도 하지 못하고 방사선 치료만 받다가 돌아오신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다.

“미애야,나 교회에 한번 가보고 싶다.”

1980년 6월18일 수요일. 엄마와 처음 교회에 나간 날로 기억한다. 이때부터 오로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구역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다녔으며 인근 7∼8개 되는 교회의 부흥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어려서 엄마를 업지 못해 손수레에 태우고 교회에 갔다. 하혈이 심해 걷지도,앉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예배당 난로 옆 마룻바닥에 누워서 예배를 드렸고 초등학교 5학년 어린 소녀였던 나는 그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기도했다.


3.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유산은 신앙 

어머니는 계속되는 하혈로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한밤중에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리면 혼자 일어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의 육체적 아픔이 사라지길 바라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반복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성경을 큰 소리로 읽으면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편안히 주무시곤 했다. 주님의 위로의 손길이 임했다고 믿는다. 어머니의 병원비로 집안 형편은 점점 기울어졌다. 참고서나 준비물을 살 돈도 없었다. 친구들이 볼까봐 망설였지만 집에서 키운 대파를 읍내시장에 내다팔아 학용품을 사서 쓰기도 했다.

이때부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초교 5학년의 난 김치 담그기,빨래하기,청소하기,장작패기,이불홑청 풀먹이고 바느질하기 등의 집안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을 당한 상처가 있어 누군가에 기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거절 당했던 상처가 나의 무기가 됐다. 어떤 일에도 좌절하지 않고 홀로 일어설 자신감을 갖게 해준 것이다.

그 시절,마음속에는 하나의 그림이 있었다. 먼 훗날 내가 훌륭한 모습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누눈가가 나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고 “당신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상을 하며 역경을 이겨냈다.

1983년 10월15일.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선생님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며 빨리 집에 가보라고 하셨다. 마음속으로 ‘절대로 우리 엄마는 죽지 않아. 하나님,제발 우리 엄마를 데려가지 마세요’라고 울부짖으며 집으로 뛰어갔다. 동네 골목어귀에 들어서자 목탁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동네 어른들이 어머니의 장례를 불교식으로 준비하고 계셨다. 순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잊은 채 소리쳤다.

“여러분,우리 엄마가 생전에 돌아가시면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러달라고 했어요. 제발 부탁이니 어머니의 장례를 교회식으로 치르게 해주세요.”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장례를 꼭 교회식으로 치르고 싶었기에 한 말이었다. 다행히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바로 와주셔서 장례예배를 드려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마냥 슬퍼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따라 죽겠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생각과는 달리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또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밉고 실망스러워 울고 또 울었다.

봄 햇살을 맞으며 함께 나물을 캐러 다니셨던 어머니,해녀용 고무장화를 신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전복과 해삼을 따던 어머니,그리고 기운없이 누워계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가 아직 곁에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돌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후 4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셨고,그 신앙을 내게 유산으로 남겨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헤어진 후 어둠에 갇힌 생활들이 시작됐다. 빚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다. 아버지는 물론 언니와 오빠들조차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버려 혼자 시골집을 지켰다. 담장도 없는 집에서 혼자서 잘 때마다 괴한이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다가 잠이 들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적막한 마을 한가운데 꼬마 혼자서 울고 있었다. 너무 불쌍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로 어린 나의 모습이었다.


4. 여고 포기… 초밥집 ‘또순이’ 로 변신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방황할 때 누군가 “넌 할 수 있어. 꿈을 가져!”라고 말해주었더라면 많이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전율을 느끼지는 모르겠다. 그들에게 조금만 방황하고 빨리 제 자리로 돌아가서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꼭 살맛 나는 세상을 맛보았으면 한다. 왜냐 하면 세상은 정말 살맛 나니까 말이다.

명문 여고에 다니고 싶어서 포항여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남의 집에 가서 차비를 빌리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차비를 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스로 2시간 걸리는 길을 걸어 갈 수도 없었다. 유일하게 주일에 교회에 가면 류광하 목사님께서 아무 말 없이 나를 화단에 앉히시고 머리에 손을 얹으셔 기도해주신 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주셨다. 그 돈으로 1주일을 버텼다.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도시락을 싸갈 수도 없어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공부는 하고 싶었지만 참고서가 없어 숙제를 할 수 없어 매사에 주눅이 들어 살았다. 그해 5월이었다. 학급아이들이 내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얼마의 돈을 모아 내게 주었고 그 소식은 교장 선생님에게 알려졌다.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우리반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평소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관심이었는데…. 혼자 있는 내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던 아이들이 불우 이웃을 돕기를 한다는 명목으로 돈을 모아 줄 때 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은 그들이 정말 나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학교에 다니는 것을 포기하고 산업체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을 따라 도망 치듯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친구들을 따라 태광산업 방직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고 쉬는 시간에 학교를 다녔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차츰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다. 열일곱살 때 내 방황이 시작되었다. 세상에 대한 반항,나를 버려둔 가족들에 대해 원망하며 그때부터 신앙에서 멀어졌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요셉을 좋아하는데 요셉은 열일곱살 때 형들로부터 배신을 당했으나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기에 나이 서른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산 것이 내 인생에 가장 큰 후회로 남는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 유흥에 빠져 오직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쇼핑센터에서 일하며 3년 동안 이를 악물고 1000만원을 모았다. 그 돈을 밑천 삼아 부산에 15평짜리 초밥집을 냈다. 시장도 직접 보고 초밥도 만들어 파는 1인3역을 했다. 1주일만에 체중이 5㎏이나 빠질 정도로 몸을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사람들은 나이 어린 아가씨가 기특하다며 많이 찾아주었고 단골손님도 제법 생겼다. 당시 한달에 300만원을 벌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

그때 가게 바로 앞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의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자주 오셔서 교회에 놀러오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건성으로 “예”라고 대답했지만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감을 막을 수 없었다. 또 ‘어릴 때 꿈은 이게 아닌데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각과 ‘생활은 힘들어도 엄마랑 같이 교회 다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는데’라는 생각을 했다.


5. ‘방황’ 9년만에 다시 주님 품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에는 공허감만 가득했다. 엄마가 투병하시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지만 내 삶에 햇빛이 비치던 날들이었다.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하나님께선 꿈과 환상으로 돌아오라는 신호를 계속 내게 보내셨다. 부산 부전시장에서 장을 본 후 가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하도로 내려가는데 지하도벽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듯 느꼈다.

“아,이러다가 죽으면 나는 어쩌지. 빨리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데….”

그 순간에도 나를 애타게 부르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며칠 후 다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시커멓고 힘이 무척 센 물체가 내 목을 졸랐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9년 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내 입에서 “이 더러운 귀신아,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 물체는 입에서 시커먼 피를 토하면서 뒤로 자빠졌다. 그 순간 나는 두 손을 치켜들고 “ 주님,이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소리쳤다. 눈을 떠보니 주일 오전 10시쯤이었다.

무작정 누군가에게 들은 대로 수영로교회로 차를 몰고 갔다. 1994년 11월3일 주일은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주님의 극진한 사랑으로 내가 다시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된 날로 또 다른 나의 생일이다.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니 뭍으로 나온 물고기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1995년 1월1일 신년기도회 때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지금껏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 이제 앞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고 싶습니다. 지금 하는 가게를 빨리 정리하게 해주시고 새로운 일을 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가진 것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

모든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고 싶은데 가게 때문에 저녁에 시간을 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거의 매일 밤 가게 문을 닫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다가 다시 가게로 돌아가서 기도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당시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시킨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란 욥기 23장 8∼10절 말씀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해 5월,가게를 정리하고 약속대로 325만원을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렸다. 이후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평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기도했다. 배움에 대한 한이 남아 있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내가 잘할 수 있는 일,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제발 제 길을 보여주세요.”

선교사를 할 것인가,법관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법대를 선택했다. 그동안 장사를 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힘없은 이들의 지팡이가 되고 싶었다. 결정한 후에는 뒤도 안 돌아봤다. 그해는 수능 준비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듬해인 96년 3월부터 수능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 공부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일독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어린 시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면서도 한동안 방황했던 것은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시학원 등록을 한달 연기하고 성경일독을 먼저 했다. 그리고 4월부터 10년 넘게 손을 놓았던 책을 다시 쥐었다.


6. 보란듯이 법대 합격… 사법시험 공부 

“스물일곱이라는 적잖은 나이에 수능시험이라니,그것도 법대라고?”

주위의 만류와 비아냥거림도 있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꿈을 품으면 그 꿈을 이루어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는 말씀과 시편 23편을 묵상하면서 수능을 준비했다. 그 결과 동아대 법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하나님! 제가 들어갈 때 입학금 내는 걸로 학비는 더 이상 내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 믿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평소 기도한 대로 학비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항상 ‘나는 하나님의 딸’이란 확신을 갖고 학교생활을 하자 신실하신 하나님은 학비 뿐 아니라 먹고 자는 것까지 학교에서 제공토록 해주셨다. 학교 고시반 입실시험에서 1등을 해 숙식비 면제와 보조금 혜택을 받았다.

또 수석을 해야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해 4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수업시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시간이었다. 너무 행복해서 혼자 웃고 다닌 적이 많았다. 햇빛이 내게만 비치는 것 같았고 하루하루가 감격의 나날이었다.

가장 먼저 도서관에 들어가서 제일 나중에 나오겠다고 다짐했다. 새벽 5시30분이면 학교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항상 성경책을 가지고 다녔고 어느 곳에서든 성경을 읽고 기도한 후 하루 12시간 넘게 책상에 앉아 있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불교 천주교 등 타 종교 친구들이 내게 상담을 하러 오면 나는 예수님을 전하고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기도하곤 했다. 그들은 자신도 나처럼 자기네 경전을 열심히 봐야겠다는 소리를 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1차 사법시험에 합격해 학교에서 매월 보조금 42만5000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선 어린 시절,학교에 갈 차비조차 없어 힘겨운 시간을 보낸 나에게 더 이상의 아픔을 주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내가 말씀으로 깨어나자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셨고 내가 주님이 주신 비전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위해 일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확신하게 됐다. 따라서 자신의 비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2차시험을 준비할 때는 서울 신림동의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그때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예전에 장사를 하며 몸을 혹사했기 때문이다. 허리를 굽히면 다시 펼 수 없을 정도로 뼈마디가 아팠다.

그러나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아프면 누워서 공부했고 그마저 힘들면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했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너무 힘들 때는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기도 했다. 그 당시 책상에 쓰여 있던 단어는 ‘엄마’ ‘내 고향’ ‘바다’ ‘조카들 이름’ 등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내 안에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학부 성적은 좋았지만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것도 큰 일이라고 위안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6개월 정도 교회에서 그룹서기를 맡아 매일 새벽 약 120명의 그룹 식구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했다. 또 고등2부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가 힘겨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큰 축복의 시간들이었다.

7. “내 꿈은 비행청소년 대안학교 설립” 



2002년 사법고시 2차시험을 앞두고 몹시 긴장됐다. 평소에 시험 감독관이 내 답안을 보고 있다고 느껴지면 그 순간부터 한 글자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험 당일 아침에 시편 23편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평안을 선물로 주셨다. 예수님의 품에 한 마리 양처럼 안겨 있는 나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르며 요동치던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시험장은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해놓은 듯했다. 원탁에 3명이 앉았는데 나는 가운데였다. 시험관이 내 답안지를 볼 수 없었다. 주님의 예비하심이었다. 편안하게 답을 써내려갔다. 점심시간에는 감사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 밖으로 나가 하늘을 향해 두손을 들고 찬양을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그들의 시선보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더 컸다. 그때 쏟아져내렸던 눈물과 한없던 평강을 잊지 못한다. 2차 사법고시 합격 후 가장 먼저 고향 교회를 찾았다. 도로가에 ‘장길교회 출신 김미애 사법시험 합격’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고 시골교회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주님 안에 계획된 꿈. 하나를 이루면 다음의 꿈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그분의 손길을 따르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다시 한번 고백하고 싶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2003년 2월21일. 서른다섯의 나이에 학사모를 썼다. 내 마음속에 늘 따스함으로 남아 있는 고향 교회 류광하 목사님과 사모님,고향 친구,가족,후배들이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아쉽게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무척 감사했다. 이제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이 우선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비행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언젠가 힘이 닿는다면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고 대안학교도 설립하고 싶다. 나처럼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을 돕고 싶어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청소년들을 돕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변호사사무실을 개소하면서 사이버 청소년상담센터를 함께 만들었다. 이를 통해 아이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귀기울이고 있다. 또 고교 시절 자신의 박봉을 털어 차비를 주시던 고향 교회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지난 1년 동안 이름을 밝히지 않고 몇몇 학생을 꾸준히 돕고 있다. 가끔씩 먼 발치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꿋꿋하게 견뎌내라. 지금이 끝이 아니란다. 네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있다면 넌 꼭 해낼 수 있어 ”라는 말을 되뇌며 돌아온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할 일이 너무 많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했을 때,수중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손을 뻗어준 유일한 친구였다. 내가 받은 신앙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그리고 모두 잘사는 미래를 꿈꾸며 기꺼이 내 자신이 그 시작인 행복의 꽃씨가 되고 싶다. 하나님이 주신 ‘위로의 자격증’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정리 = 이지현 기자 [email protected]
출처 :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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