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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경희대 한의대 교수, 김연수 장로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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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 김연수장로 약력 :  △경희대 한의과대,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경산대 졸업(한의학 박사) △국민훈장 목련장,국민훈장 동백장 △서울시 의원,예장 통합 평북노회 장로회 회장 역임 △현재 김한의원 원장,관악중앙교회 원로장로,경희대 한의과대 외래교수

1) 어린시절 성경대신 한학공부…복음에 무지

‘신림동 슈바이처’. 나의 별명 중 하나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다보니 본의 아니게 ‘도시 빈민촌의 아버지’(허준)라는 애칭과 함께 이렇게 불리고 있다. 복음의 밀알이 나의 인생밭에 떨어져 적어도 30배 이상의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함을 깨닫게 된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한의사이다. 그런데 나의 삶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어 감사할 뿐이다. 장로로서 한 교회를 올곧게 지키고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며 자식들이 의사의 길을 계승해 저마다 섬김의 종이 되고자 하는 것도 흐뭇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국민일보의 ‘역경의 열매’에 내 신앙이야기를 연재하자는 말을 듣고 여러 차례 사양했다. 간증이란 많은 기독인을 격려하고 힘이 되는 청량제이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낸 러브 레터를 공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간증의 역효과가 우려되기도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개인의 의를 앞세울 수도 있어 고사했다.

그러나 내 이야기가 초신자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털어놓고자 했다. 하나님보다 1㎜라도 앞서지 않겠다는 믿음으로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어느 때는 내용이 다소 투박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복음을 들어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내 고향은 경북 안동. 대쪽 같은 유교정신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당시 그곳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어떤 형태로든 복음을 들을 수 있지만 그때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무지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약종상이셨던 아버지는 내게 성경이 아닌 한학을 가르쳐주셨다.

지금도 모태신앙 크리스천들을 보면 매우 부럽다. 내 자식들이라도 모태신앙인으로 키워낸 게 그나마 다행이다. 모태신앙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전도와 선교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부부가 신앙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양성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우선시하는 자녀들을 키워내면 갈수록 혼탁해지는 이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재물을 남겨주는 것보다 100배 이상 낫다.

내 아버지는 자식 중 하나라도 가업을 잇기를 원하셨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자녀들에게 관련 지식을 심어주려고 하셨다. 형들은 그런 아버지를 멀리 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 그런 아버지가 싫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하면 용돈이라도 생길 수 있었다. 능동적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 때 아버지가 들려준 말씀이 뒷날 한의사가 되는 데 큰 힘이 됐으니 인간의 앞날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삶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6·25 학군단 끌려갔다가 구사일생 

“연수야,네가 형제 중 머리가 좋은 편이니 한의학을 공부하면 좋겠다. 그러나 강요는 하지 않으마.”

아버지는 가업을 물려받기를 내심 바랐으면서도 강요는 하지 않으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한의학을 고리타분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한문을 많이 알아야 한다면서 소학과 명심보감 등을 가르쳐주셨다.

“한문을 많이 알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내게 다른 것은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매일 한문을 일정 분량 읽고 쓰지 않으면 등교를 불허하셨다.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셨는지 아직까지 소학 서문을 외울 정도다. 훗날 한의학을 정식으로 공부할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 좀더 한문을 깊이 배웠더라면 한의학 공부가 더 잘됐을 텐데’라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한약상이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때문에 가사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17세에 강제로 군에 끌려 갔다. 인민군이 대구까지 내려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학군단이 조직됐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겨우 1주일 동안 기초교육을 받은 뒤 나는 대구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부대와 함께 이동을 하고 있었다. 8월 하순쯤 저녁이었다. 이동 중 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용변을 보러 가도 되나요?”

“빨리 갔다와.”

벼가 무성한 논둑에서 용변을 보고 있는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우레와 같은 폭발음이 이어졌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주변이 난장판이 돼 있었다. 전우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거머리 수십 마리가 내 몸에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뒤 나는 고향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저 왔어요.”

“연수야,어쩐 일이니?”

어머니는 사지로 떠나보낸 자식이 갑자기 돌아오자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해드렸다.

전쟁중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가족의 앞날이 캄캄했다. 나는 폐결핵까지 앓았다. 더 이상 공부할 수 있는 길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여기서 농사 짓는 것보다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좋겠어요.”

휴전 후 계속 공부할 길을 찾아야 했다. 서울에 계신 삼촌에게 가면 어렵지만 주경야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 동북고 야간부에 진학해서 어렵게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참아내기 쉽지 않았다. 그란 와중에 생전 처음으로 신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촌형이 내게 교회에 출석할 것을 권했다. 당시 사촌형 김인수(훗날 예장통합 경남 진주노회장 역임)는 안동 풍천의 구담교회 영수(현재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단다.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모든 고통을 십자가를 통해 해결해주셨기 때문이야. 연수야,교회에 나가야 한다.”

사촌형은 나와 내 사촌 김호수(현재 경주 석장교회 목사),동창 김기연(마산 문창교회 목사)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정말 그런 분이 아직도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나마 예수 그리스도가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3) 사법시험 낙방하고서야 나의길 발견 

나의 학창시절은 수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재개하는 인고의 세월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루는 자살하기 위해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 한강변에 나갔다가 잠이 들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피혁공장을 운영하는 삼촌 댁에 몸을 의탁한 나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동북고에서 공부했다. 전차요금 1원50전이 없어서 남대문에서 장충동까지 걸어다녀야 했다. 그런데 삼촌에게도 어려움이 닥쳐왔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 이상 삼촌댁에서 기거하는 것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삼촌댁을 나와 나는 친구집을 전전하면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중 청량리 앞 논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천막교회에서 발걸음이 멈추게 됐다. 당시 천막교회는 최훈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동도교회였다. 마침 부흥회가 열리고 있어 나는 집회에 참석해 큰 은혜를 받았다. 영수였던 사촌형이 고향에 내려왔을 때마다 나에게 교회에 갈 것을 권유했던 것이 생각났다.

‘예수님을 믿을거야. 나처럼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야. 열심히 그를 믿겠어.’ 과거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손해를 볼 어떤 것도 없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연수야,앞으로 너는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고난을 참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 예수님만 바라보게.” 최훈 목사님은 늘 나에게 이같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현재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그때 최 목사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동도교회에서 기거하다시피 했다. 무료로 잠을 자는 것이 미안해 남모르게 교회안을 청소하곤 했다. “김군,네가 청소해 놓았구나.” 최 목사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곤 하셨다.

갖은 고생 끝에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명대학 법과대에 진학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은 명문대에 진학하면 한시름을 놓게 되지만 당시 나의 형편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조차 막막했었다.

약자 편에서 서서 살겠다는 신념으로 법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야간에는 마포 직업훈련학교(중학교 과정)에서 4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최선을 다해 살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었다. 그런데 사법시험을 보면 떨어지곤 했다.

‘어떤 길일까. 그 누구보다 나는 성공해야 되는데. 하나님,정말 이 길이 아닌가요.’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나는 취직이냐 계속 공부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해야 했다. 그 때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른 곳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됐다. 의술을 통해 사회봉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됐다. 경희대학교 한의과대 학사편입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결국 돌고 돌아 한의학을 공부하게 됐지만 실패했던 모든 과정이 나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음을 고백하고 싶다.

나는 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빠른 시간내에 찾아서 될 수 있으면 지름길을 가기를 권장하고 싶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예비하고 있으니까. 결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분은 바로 당신의 문밖에서 당신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4) “돈 못벌면 어때”달동네에 병원열어 

한의대에 편입했지만 경제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교 시절부터 신문배달,가게 점원 등 안해 본 일이 없었던 터라 당시에는 모든 고통을 감내해낼 수 있는 내공이 쌓여 있었다. 나는 고달픈 생활로 마음이 곤고해질 때면 6·25 전쟁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던 일과 동도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남보다 더 노력하면 안될 일이 없어.’ 이런 생각을 하면 새로운 힘이 솟구치곤 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제게 꿈과 믿음을 주시옵소서.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 한의사가 되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한의대 동기생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공부를 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하시는 수도공사 일을 도왔다. 그분도 피란민 출신으로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나를 친아들처럼 보살펴주셨다.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다.

졸업을 앞두고 개원할 장소를 물색했다.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림4거리(현재 신림전철역 부근)에 이르렀다.

버스 종점이었다. 기사가 모든 승객에게 내리라고 했다. 나는 무작정 내려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산재해 있는 달동네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곳에 정착하면 좋겠군.’

개업자금도 부족했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철거민 판자촌이 즐비했던 신림동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신림동 일대는 1967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개발 정책에 따른 한강변 개발 사업으로 용산과 이촌동 일대 철거민들이 대거 몰려 있었다. 약 5000가구가 A·B·C 지구로 나뉘어 산 중턱에 주거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날품팔이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신림동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만 오면 모든 길이 흙탕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박하고 진실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은 몸이 아파도 병원을 가지 못하고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병원 환자 중 치료비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은 50%에도 못 미쳤다. 나는 외상장부를 만들지 않았다. 아예 돈을 많이 벌 것을 포기했다.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수입이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살기로 했다.

나는 등록할 교회를 물색했다. 멀지 않은 곳,달동네 정상에 개척한지 1년도 못 되는 조그마한 교회가 서 있었다. 연로하신 목사님과 30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비록 가난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환경은 비록 열악하였지만 어려운 이웃이 항상 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료 진료 봉사를 시작했다. 이를 통해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훗날 국내 최초로 관악구에 한방 무료 진료실을 개설하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준비되고 있었다.

5) 깡패의 아들 기적적 치료뒤 손님 붐벼 

개업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주변에 한의사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처음엔 10∼20명 정도가 찾았느나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호박 감자 쌀 등을 진료비 대신 주고 치료를 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벽 2시쯤 되었는데 ‘쨍그렁’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깨진 창문으로 웬 사람이 들어오면서 거칠게 말을 토해냈다.

“야,원장×× 나와.” 난 겁이 났다. 하지만 겉으로 나타낼 수 없었다. 난 하나님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 뒤 담대하게 대답했다.

“접니다.”

“돈 벌었으면 내놔!”

“이것 뿐입니다.”

“쪼다 같이 그렇게 공부해서 돈을 이 정도밖에 못 버냐? 쯧쯧….”

다음날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는 당시 신림동 깡패조직의 두목이었다. 며칠 후 그 사람이 다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돈 내놔. 바보 같은 놈.”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말을 내뱉었다. 이같이 두번씩이나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나는 한의원을 이전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장소를 물색한 끝에 용산 지역의 한 집을 구두로 가계약하고 곧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7월말쯤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는데 집의 초인종이 쉴새없이 울려댔다.

“누구십니까?”

“원장님,접니다.”

유리창 밖으로 바라보니 바로 그 깡패였다. ‘오늘 또 임자 만났구나. 떠나려고 했는데 잘됐다. 하나님,완전히 이곳을 떠나라는 사인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그때 그와의 지긋지긋한 만남에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평상시와는 사뭇 달랐다. 생후 4개월쯤 돼보이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원장님,제발 이 아이를 살려주시면 원장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그는 경기를 일으킨 아이를 안고 이곳저곳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밤 10시부터 병원을 전전했지만 못 고친다고 합니다. 원장님,제발 이 아이 좀 고쳐주세요.”

“하나님,지금까지 역경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셨듯이 또 한번 기적으로 이끌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드린 뒤 그 아이를 진찰하고 침 두 대를 놓자 경기가 멎었다. 아이가 정신을 차리자 그는 아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더니 천하의 깡패인 그도 새끼 사랑만큼은 대단했다.

다음날 아침 그 깡패 내외가 나를 찾아왔다. 한의원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무릎을 꿇고 대뜸 “형님,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명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야’가 변해 ‘원장님’으로,‘원장님’이 변해 ‘형님’으로 바뀐 것이다.

“특별한 거 없네. 자네 교회 나가게.”

그 주일에 그는 정말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리고 나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교회라는 갈 곳이 못되네요. 죄 지은 사람은 나인데 왜 그렇게 울고 짜고 그러는지 더 이상 나가지 않겠어요. 진짜 울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까?”

그는 얼마 후 깡패세계에서 손을 털고 경기도 성남에서 자리잡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아이를 키워 전도사로 만들었으며 자신은 현재 교회 권사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놀라울 뿐이다.

이 사건 뒤 한의원은 사람들로 더욱 붐비게 됐다.

6) 무료진료실 방송탄후 환자 장사진 

나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일을 좀더 하고 싶어졌다. “하나님,너무나 많은 사람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만약 하나님이 관악구한의사회 회장이 되게 해주신다면 무료 진료센터를 세우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머지않아 응답해주셨다.

“만장일치로 김연수씨를 우리의 회장으로 모십시다.”

“여러분의 뜻을 받들어 최선을 다해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힘쓰겠습니다. 또 공약사항들을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1977년 관악구한의사회 회장으로 선출된 나는 한방무료진료실 설치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주위에서는 무료진료실 운영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밀어붙였다. 이미 10년 가까이 무료진료를 해오면서 나는 더 많은 영세민들이 의료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구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동료들과 관악구청장을 찾아갔다. “진료시설을 제공해주기를 바랍니다. 협조해주시면 한방 무료 진료실을 만들겠습니다.”

당시 많은 주민이 의료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제의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구청장이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마침내 1976년 국내 최초로 한방 무료 진료실을 개설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문은 열었지만 환자들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3개월 동안 개점휴업 상태였다. 이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당시 사회에 팽배했던 의사와 약품에 대한 불신 풍조가 한몫했다.

그러나 나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직원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언젠가는 구민들이 무료 진료실의 순수한 의도를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예비역 장성 출신인 한 환자가 한방 무료 진료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좌골신경통으로 여러 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침으로 나을 수 있겠는가?”

“어디 한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 다음날 그 노인이 또 찾아왔다.

“예전보다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아무튼 또 맞아보세.”

3일째 되던 날 그 노인의 얼굴에 희색이 돌기 시작했다.

“의사 양반,이제 씻은 듯이 나은 것 같으네.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는가?”

“글쎄,도움이 필요하긴 합니다. 이곳 진료소가 홍보가 안돼서….”

그 노인은 곧바로 KBS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서 이원홍 사장을 찾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이 사장의 형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구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KBS에서 나온대요. 빨리 오세요.”

관악구 무료진료실 소식은 KBS와 대한뉴스 1220호를 통해 널리 소개됐다. 무료 진료실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장안의 화제가 됐다.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무료 한방진료실은 물론 개업한 한의원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7) 한의사계 첫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직접 찾아오지 못하는 돈 없는 환자,거동이 불편한 환자,응급환자 등을 위해 왕진가방을 들고 찾아나섰다. 한의학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믿었기에 눈보라치는 겨울에도,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장마철에도 내 발걸음은 바빴다. 심지어 살림집이 붙어있는 한의원 벨이 새벽 2∼3시에도 울려대도 피곤한 줄 몰랐다. 이따금 진료비를 한푼도 내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었지만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진료비를 요구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무려 한방진료실은 1981년 관악구가 동작구와 분리되고 내가 한의사회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없어졌다. 그러나 내 한의원에서 무료 진료를 이어갔다. 의료보험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면서 무료 진료는 의미가 많이 희석됐다. 그러나 지금도 이따금 아들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의료 봉사 사역에 나서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왔다가 건강을 회복하고 더불어 정신까지 밝아져 삶의 의욕을 되찾고 돌아갈 때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재확인하곤 했다. 나는 언제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생선 한 마리의 진리’라는 철학을 떠올린다. 즉 먹기 좋은 몸통은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머리와 꼬리 부분으로 만족하는 삶,그런 자세가 주께서 내게 몸소 보여주신 삶이며 내게 요구하시는 삶임을 깨닫는다.

사랑의 인술이 널리 알려져 1981년 4월 한의사계에서는 처음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무료 한방진료실 설치와 영세민 5만여명 무료 진료라는 명목으로 과분한 상을 받은 것이다. 이 상은 관악구한의사회 모든 회원이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받게 돼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하나님은 이후 내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서울관악구협의회장을 맡던 중 1986년 8월 국민 화합과 사회 안정 및 국력 신장 등에 앞장선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세상에서 영광을 가로챈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전세집에서 살던 나는 열심히 절약해 모은 돈으로 아름다운 집과 한의원을 세울 적당한 부지를 구입,나름대로 희망에 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부흥성회가 열렸다. 부흥회 내내 하나님께서 내 땅을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차례 귀를 막고 마음속에 울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부정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더욱 분명하게 들려왔다.

고민하던 내게 아내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더 늦기 전에 바치라면서 빨리 결단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땅을 내놓기로 결심한 뒤에도 솔직히 잠깐 동안 아까운 마음이 밀려왔다. 당시 그 땅은 내 유일한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려를 믿음으로 떨쳐버리자 기쁨과 축복이 따라왔다. 하나님께 교회 부지를 바친 뒤 얼마 안돼 나에게 더 좋은 건물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셨다. 지금도 그 일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과 같은 내 재산을 통해 기뻐하셨고 내게 많은 축복을 주셨음을 고백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독신앙을 갖게 된 것이 첫번째 큰 축복이요,교회를 섬기도록 직분을 받은 것이 두번째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축복을 유통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즐겁다. 불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 것도 내게는 당연한 책무였다.

8) “시의원도 봉사… 하나님 믿고 출마” 

KBS의 한방 상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는 등 바쁜 생활 속에서도 복음 전파 사역에 앞장서려고 노력했다. 특히 극동방송 한의 상담 프로그램은 1980년부터 91년까지 10년 넘게 담당했는데 당시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중국 지린성에서도 상담 문의가 오곤 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시작된 해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의원에 당선시키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시의원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한의원을 비울 수 없었다. 무료 진료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시의원에 출마하고도 걱정이 많았다.

그러다가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 성전 건축 때 물질과 몸으로 헌신했을 때 하나님이 더 많은 복을 주셨던 생각이 났다. ‘선거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선거운동 자금을 모두 성전 건축헌금으로 바치자’라고 결심했다. 당시 교회는 재건축을 위해 작정헌금을 하던 때였기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렸다.

반면 선거운동에는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무료 진료를 받았던 분들과 교우들,그리고 잘 모르던 타교회 교인들까지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준 덕택에 시의원에 당선됐다.

시의원으로 일하는 동안 한강 다리를 점검해 11개 다리의 교각에 이상을 발견하고 시정 질의를 한 적이 있다. 이때가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3주일 전이었다. 난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때도 이와 같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한강 다리 11개 교각에 이상이 있다는 내 질의에 대해 서울시측이 신경을 썼더라면 성수대교 붕괴라는 처참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씁쓸하다.

시의원이 되자 매우 바빠졌다. 오전에는 한의원에서 진료하고 오후에는 시의회에 나갔다. 때로는 밤 12시까지 회의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교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재건축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선임장로이자 건축위원장으로 교회 설계부터 공사까지 신경써야 할 일이 매우 많았다. 하루를 잘개 쪼개써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지만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것에 대해 늘 감사했다.

6?25전쟁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한 내가 서울시의원이 되고 교회의 장로가 되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바쁜 생활이었지만 내게는 항상 기도해주는 아내 이명원 장로가 곁에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든든했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기도를 해준다는 것은 큰 행복이자 축복이다. 사랑과 격려로 힘이 되어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자녀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꼭 신실하고 믿음 있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너희 가정을 평탄하게 이끄신다. 너희 엄마가 언제나 나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야”라고 당부하곤 했다. 다행히 아이들 모두 좋은 배우자들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어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1995년 시의원을 한 차례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본업에 충실하기 위해서 출마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9) 두아들·사위도 ‘의료 일꾼’으로 봉사 

하나님은 우리 자녀 모두를 의료인의 길을 걷게 해주셨다.

장남 용준이는 처음에는 서울대 공과대학에 진학하려고 했다. 하루는 용준이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한의원을 찾아왔다.

“아버지,담임선생님이 서울대 공대에 진학이 가능하다고 입학지원서를 써주셨어요.”

나는 약 1시간동안 진료를 중단하고 아들을 설득했다.

“얘야,네가 서울대 공대 학생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너는 교회 장로의 아들로서 앞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의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으마.”

아버지가 내게 한의사의 길을 강요하지 않았듯이 아들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아버지,성적으로는 서울대 공대에 진학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겠습니다.” 용준이는 중앙대 의대를 거쳐 피부과 전문의로 의학박사가 됐다. 아들이 관악중앙교회 안수집사와 청년부 부장으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볼 때 감사하며 마음이 흐뭇하다.

막내아들 성준이는 김한의원 부원장으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아빠,난 이 다음에 한의사가 될거야.” 성준이는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한의원에 오기만 하면 이같이 말하곤 했다.

“한의사? 무엇하려고?”

“돈 많이 벌어서 아빠처럼 배고픈 친구들,어려운 친구들 도와 줄거야.”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성준에게 선한 욕심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일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하지만 성준이는 한의대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범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봉천여자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힘든 교사생활을 하면서 우리 부부 모르게 수능시험과 학사편입시험을 준비해서 8년만에 한의대에 합격했다. 지금은 경희대 대학원 한의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교회에서는 학생회 교사와 학생회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하고 있다.

사위 손영익은 주님의교회 집사로 치과전문의이다. 내 동북고 은사의 아들이다. 장녀인 현희의 혼처를 위해 아내와 내가 열심히 기도하던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은사님이 오셔서 대뜸 말문을 열으셨다.

“우리 집에 예수에 미친 놈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교회를 못 가게 해도 말을 듣지 않아. 자네가 교회 장로이니 사위 삼겠나?”

믿지 않는 가정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기에 우리 부부는 기도응답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예인치과 원장,서울대 치대 외래교수로 일하고 있다. 특히 해외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있어서 치과의료선교회 총무로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몇 차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지역으로 의료 선교 사역을 떠난다.

내가 봉사자의 삶을 살게 된 데는 아내의 역할이 컸다. 평북노회 최초의 여성 장로인 아내는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결정적인 조언자가 돼주었다. 또 아이들에게 매일 성경을 읽게 하고 일정 시간 기도할 것 등을 가르쳤다. 여성의 기도는 모든 일에 밑거름이 된다. 현재 이 땅의 위기도 여성의 기도로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관악중앙교회 선교위원장 등으로 봉사해온 아내는 여전도회 전국연합회국제선교부장,서기 등을 거쳐 현재 부회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한다. 헤브론 땅을 바라보는 갈렙처럼 젊은이들보다 용감하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것이 기도 제목이다.

10) 여생도 낮은곳 비추는 등불 되리 

경산대 대학원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등록해 사회 각계 인사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만학의 기쁨을 마음껏 누린 시간이었다.

하나님은 내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매년 고등학생 1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는데 장학생들 가운데서 판사가 배출되는 등 열매가 적지 않았다. 요즘에는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말을 듣고 매우 안타깝다. 내가 공부할 때는 어렵더라도 노력하면 미래가 보였는데 지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니 큰 문제다. 기독인들부터 이웃이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와야 한다. ‘누군가 할 텐데’라고 미루지 말기 바란다. 물질은 끊임없이 유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슬픔은 나눌 때 반감되고 기쁨은 나눌 때 커진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경희대 한의과대학 총동창회 회장을 4년 동안 맡으면서 모교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어려웠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후진 양성을 위해 모교를 위해 무엇인가 공헌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모교에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다. 2003년 한방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한의과대학 발전기금과 장학금을 내놓았다. 그해 11월 경희대 조영식 이사장으로부터 ‘자랑스런 경희인’상을 받기도 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날을 회고해보면 고난과 역경의 시간은 그야말로 잠시였다. 하나님은 기도하며 소원했던 모든 것을 다 이뤄주셨다. 자식들도 우리 내외의 기도 속에서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잘 성장해주었다. 과거 가난과 절망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던 곳에서 외상장부 없는 한의원을 꾸려온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선생님,못 살던 시절 어쩔 수 없어 진료비를 내지 못했어요. 자꾸 마음에 걸려서 이제야 찾아왔어요.” 지금도 이따금 과거 진료비를 내지 않고 사라졌던 사람들이 치료비를 들고 찾아온다. 감사의 인사를 받을 때마다 의료인으로서 감격과 보람을 느낀다. 내게 이처럼 좋은 달란트(한의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지난해 12월로 장로 장립을 받은지 30년이 됐다. 70세 정년을 맞아 나는 관악중앙교회(이제학 목사)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지나온 세월은 어려움보다 보람이 훨씬 더 많은 나날이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질병까지 걸려 눈물 짓던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활짝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제 여생을 우리 부부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기도한다. 내 노년이 석양의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충성된 종아,나의 일에 최선을 다했으니 내 잔치에 참여하라”는 감격스러운 칭찬을 듣기 위해서라도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준행할 것이다. 내 개인사가 알려지기 원치 않았기 때문에 무척 망설였으나 이번 연재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격려와 도전이 되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이번 간증을 통해 인간 김연수를 보지 말기를 바란다. 오늘을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 드린다.

- 정리 : [국민일보] 함태경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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