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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날씨와의 싸움에서 ‘주관자 주님’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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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역경의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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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성명 : 반기성 (1954년 충북 청주 출생) △공군 대령 △공군 중앙기상부장 역임 △대전 대흥침례교회 협동목사, 한국기상학회 이사, 한국엘니뇨대책반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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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기상 상황이 어떨 것 같은가? 상황이 나쁘면 헬리콥터 대신 육로를 이용해야 하지 않겠어?”

“오후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2000년 7월6일 공군 정보작전참모부장이 다음달 오전 임무를 앞두고 이동 방법을 점검하고 있었다. 임무가 있으면 전날 오후에 이동 수단을 결정한다.

중앙기상부장에 보임된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침 일찍 이동할 때 기상 정보를 지원하는 문제였다. 안개 때문이다. 헬리콥터의 항로와 목적지,주둔지의 정확한 상황을 예보해야 한다. 특히 헬리콥터는 낮은 고도를 이용하기 때문에 안개나 층운과 같은 저고도 구름에 취약하다. 그만큼 안개 예보가 중요하다. 그러나 아침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는 안개를 맞춰내는 일은 쉽지 않다.

당시 예보자들은 대부분 7월7일 아침에 안개가 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영 확신이 서질 않았다. 기상예보 실무에서 8년이나 뗘나 있다가 중앙기상부장에 보임된지 한달밖에 되지 않아 서툴렀다.

기상도를 보면 서쪽 해상으로부터 이동성 고기압이 서서히 이동해 오고 있었다. 대기 중의 습도도 높고 서해 상공 군데군데 해무(海霧)가 끼어 있었다. 이런 경우 상식적으로 다음달 안개가 많이 끼게 된다. 확률적으로도 80∼90% 기상이 나쁠 가능성이 높은 기압 형태였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동해상에 있는 저기압으로 인해 강릉을 포함한 북쪽 지역으로 약하게 동풍 기류가 들어오고 있었다. 동풍이 강화된다면 안개가 끼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부장님,부장님도 안개가 낀다고 보시죠? 어떻게 발표할까요?”

부하들은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한 기상예보를 위한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때였다. 마음속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부하들은 제가 예보를 내는 것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틀리면 부하들이 저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이 일로 부하들이 예수님을 알게 하소서.”

얼마나 흘렀을까. 눈앞에 있던 하얀 안개 같은 것이 싹 걷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안개가 끼지 않는다는 확신을 강하게 주셨다.

“작전부서에 내일 아침 임무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지원하도록!”

다음날 아침 5시 출근해 기상을 확인했다. 군산공항과 서쪽 지역은 시정이 1.6㎞로 기상이 매우 나빴다. 고도가 304m밖에 되지 않은 낮은 구름도 있었다. 서해상에 있던 해무가 밀려드는 것으로 판단됐다. 또 항로상에 있는 오산비행장의 시정이 떨어지면서 낮은 구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공군본부 지역도 안개가 끼기 시작하면서 시계가 4㎞로 내려갔고 하늘의 반이 낮은 구름으로 덮여갔다.

이런 기상이라면 헬리콥터 이동은 불가능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어제 안된다고 했으면 될 걸,머리를 두드리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1분이라도 빨리 다시 판단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주님.” 부르긴 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 확신을 주셨다.

옥상에 올라가 안개를 관측해보니 조금씩 흩어지는 듯 했다. 지휘통제실에 아침 임무가 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놀랍게도 끼기 시작하던 안개가 오전 5시45분부터 갑자기 걷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들어오던 낮은 구름도 금방 사라지면서 6시30분이 되자 쾌청한 하늘이 나타났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놀랍게도 공군본부 지역과 서울을 잇는 항로에만 구름대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날씨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자연 현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2.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따라 절 다녀 

기상학은 첨단 과학 중 하나다. 어느 나라나 기상 분야에 그 나라 최고 성능의 컴퓨터가 있다. 물리와 수학 등 복잡한 방정식을 이용하기 때문에 슈퍼 컴퓨터가 없다면 분석은 물론 예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최고 인재들이 최고 컴퓨터로 분석해도 정확한 예보를 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기상학과가 언제 여행 가는지 알아봐.”

“선배,우리 과도 그날 여행가게요?”

“아니,다른 날 가게.”

기상 예보자들에게는 웃지 못할 일이 많다. 바로 기상대원들 야유회나 체육대회 날이면 어김 없이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쁘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된 일이다. 기상학과가 야유회를 가는 날이면 반드시 비가 왔다. 그 때문에 다른 과에서 기상학과 야유회 날에는 자기들 행사를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도 기상대에서 주요 행사나 계획을 잡으면 대체로 날씨가 나빠진다. 최근 몇년 동안 한국기상학회 학술강연회만 열리면 뇌우가 치거나 큰 비가 내려 기상 관계자들을 민망하게 하곤 했다.

미국 기상잡지인 웨더와이즈(Weatherwise)에도 이와 관련한 칼럼이 실린 적이 있다. 가뭄이 계속될 때 사람들은 기상 예보자에게 언제 비가 오며,어떻게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지 묻는다고 한다. 기상 예보자가 비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미국 전역 기상 예보관들의 총회를 가뭄 든 지역에서 열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유타주에서 열렸던 미국기상예보관 총회 때 거대한 폭풍우가 이 지역을 강타,산 정상에서의 모임과 별 관측,관광 등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총회가 끝나는 날에야 하늘이 맑아졌다고 한다. 더구나 기상 예보관들이 탄 항공기가 워싱턴으로 가던 중 푹풍우를 만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결국 피츠버그로 항로를 바꿨다고 한다.

“아빠가 하는 얘기는 한 가지만 빼고 다 믿을 수 있어요.”

“그게 뭔데?”

“날씨 예보요. 어쩌면 이사하는 날마다 비가 와요.”

날씨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유독 이사하는 날 날씨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결혼하고 22번 이사했는데 좋은 날이라고 잡은 날 하필이면 꼭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굉장히 추웠다. 그 때문에 결혼하면서 장만한 가구들은 눈 비에 맞아 다 부서지고 책장 하나만 남아 있다. 예전에는 포장이사도 없어 가족이 짐을 싸고 푸는 일을 다 했기 때문에 나쁜 날씨는 이사를 더 힘들게 했다. 가족들이 내 날씨예보를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이지만 태풍의 진로를 정확하게 알아맞히고 강우량을 예측해 재산과 인명 피해를 줄여왔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머피의 법칙’이라고 말하지만 날씨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를 깨닫는다.

요즘에는 모든 일과를 하나님과 함께 하고 기상 예보를 담당할 때도 반드시 기도했지만 내가 하나님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충북 음성에 조상 대대로 뿌리 내리고 살아온 봉건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3대 독자여서 1년에 제사만 10번 이상 지냈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지만 예전에는 제삿날이나 명절에만 고기를 먹을 수 있어 은근히 제사를 기다리며 지냈다. 덕분에 제사는 내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어머니 손잡고 절에 따라 가기도 하고 독경하는 소리를 들으며 교회보다 절을 가깝게 여기면서 자라왔다.


3.  알게 모르게 내게 다가오신 하나님 

“아버지,저 청주에서 학교 다니고 싶습니다. 작은 누나도 청주에 있고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좀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퇴직 후 사과 과수원을 하셨다.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7남매를 모두 유학시켰다. 나는 청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에는 주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독서왕 표창을 받을 정도였다. 홍콩영화와 서부영화도 좋아했다. 학교에 가지 않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누나에게 잡혀 혼난 것을 빼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학창시절이었다.

기독교는 어린 시절부터 접했다. 초등학교 때 집 뒤편에 제법 큰 교회가 있었다. 성탄절이면 교회에서 연필과 공책,사탕 등을 나눠줬다. 교회에 매주 나갔던 것은 아니지만 그 귀한 연필과 공책을 한아름 받아들고 ‘세상에 이렇게 마음 좋은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여느 아이들처럼 성탄절에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으려고 양말을 걸어두고 자다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큰 실망을 한 적도 있다.

고등학교 때 바보처럼 늘 웃고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 친구는 항상 웃었다. 처음엔 그 친구를 우습게 생각했는데 지켜보니 심성이 여간 착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친한 친구가 됐다. 그 친구는 내게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했다.

대학에 진학할 무렵 아폴로호의 달 착륙으로 전 세계가 우주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연세대 천문기상학과에 진학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대학 입학식을 하던 강단 전면에 이 성경 말씀이 붙어 있었다. 간간이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저 열심히 노력해 많은 진리를 알면 남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은 알게 모르게 내 주변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교회에 대한 좋은 인상과 기독교 대학교 진학은 하나님께서 나를 눈여겨 보셨다는 증거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천문 전공의 그 교수 너무 깐깐한 것 아냐? 웬 학점을 이리도 짜게 주냐.”

“그러게,아무래도 나랑 안맞는 것 같아. 기상학을 전공해야 할까봐.”

“아쉽지 않겠어? 천문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잖아.”

2학년 때 전공 기초과목을 배운 후 3학년 때 천문학이나 기상학 중 하나를 전공으로 선택해야 했다. 그런데 천문 전공의 한 교수가 내게 너무 까다로웠다. 점수도 좋게 주지 않았고 성격도 잘 맞지 않는 듯했다. 결국 나는 기상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운명의 순간이었다.

당시 10여명의 학생이 기상학을 전공하고 함께 졸업했다. 숫자가 적다보니 모두 절친했다. 졸업 무렵 우리는 중요한 약속을 했다.

기상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나갈 수 있는 분야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가급적 중복되지 않게 진로를 정하기로 했다. 같은 직장에서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상청으로,학계로,환경 분야로,기업으로,군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군을 택했다. 아버지의 경찰 제복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4. 결혼선물로 받은 성경,남에게 줘 

공군 장교로 임관 후 나는 기상 예보 장교와 통보 장교 등 군 기상 분야의 주요 보직들을 두루 거쳤다. 과외 일에도 열심이었다. 운동이란 운동은 다 했고 바둑이나 당구는 물론 포커와 화투 등 노름까지 잡기란 잡기도 모두 섭렵했다. 테니스 대회의 1등상은 거의 내 차지였다. 술도 즐겼다.

공군교육사령부에서 기상 교관으로 근무할 때였다. 앞 사무실에서 영어 교관으로 일하던 동기생 피영민 중위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미남이었다. 성격 좋지,술 좋아하지,운동 잘하지,일 잘하지 정말 못하는게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은근히 부러웠던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가 어느날 변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고 ‘예수쟁이’가 돼버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그의 사무실에서는 찬송가와 설교 방송이 흘러나왔다.

‘술과 담배,노름을 끊고 무슨 재미로 살아.’

“기성아,너도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

피영민 중위는 끈질기게 나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다.

“난 천국 안 갈테니까 상관 마!”

피 중위의 강권 때문에 나는 결국 교회에 나갔다. 1980년 대전 대흥침례교회 부흥회 때였다. 사람들로 가득차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내 또래의 젊은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무언가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돌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눈물을 흘릴까 의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고향 옆집에 살았던 2세 아래의 여성과 결혼했다. 묘한 인연이란 게 우리 부부를 두고 하는 얘기인지 모른다. 마침 부대에 같은 고향인 사병이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 사병은 휴가를 받아 집에 갈 때면 꼭 나와 동행하기를 권했다. 그 사병의 집에서 여러 번 식사도 했다. 그 사병이 자기 누나를 소개시켜 줬다. 자연스레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고 소개 받은 사병의 누나보다 여자로 보이지도 않던 옆집 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자,결혼 선물. 잘살아야 해. 예수님도 꼭 믿고.”

피 중위는 결혼선물이라며 내게 성경책을 줬다. 꽤 좋은 성경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받은 성경책이 부담스러웠다. 교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 성경책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줬다.

몇십년이 흐른 2003년 어느 예비역 상사가 나를 찾아왔다. 결혼할 당시 같이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알고봤더니 피 중위에게 받은 성경을 이 예비역 상사에게 준 것이었다. 그 상사는 전역해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내가 준 그 성경책을 읽으며 믿음을 키웠다고 했다. 현재 부산에서 사업을 하며 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고 있다.

오산비행장에 근무할 때는 같은 관사에 동기생 4명의 가족이 함께 지냈다. 이렇게 많은 동기와 근무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집만 빼고 나머지 동기생 가족은 모두 교회에 다녔다. 괜한 소외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동기들이 간혹 교회에 나가자고 할 때면 “너나 잘 믿어”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대위 때까지 나는 자신만만한 시절을 보냈다. 예쁜 아내와 잘 생긴 아들은 물론 운동도 잘했지,인간성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공군내 각종 교육이나 경연대회에서 1등을 휩쓸다시피하지 겁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하나님의 추파를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1987년 청수기상대장 시절 나는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5. 병환 차도없자 절박함에 교회 출석 

천식으로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청주기상대장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본부로 원대복귀했다. 몸이 자꾸 나빠지자 어머니는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 별별 약을 다 구해오셨다. 한 제에 몇 백만원짜리 보약도 먹어보고 뱀과 산삼은 물론 안 먹어본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약이 잘 듣지 않자 당시 충주시 불교신도회장이셨던 어머니는 절에서 특별 불공을 드리기 시작했다. 천도재도 올렸다. 엄청나게 비싼 값을 치른 부적은 내 베개와 책상,지갑과 차안에 항상 놓여 있었다. 그래도 별 효험이 없었다.

“회장님,아드님은 좀 차도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다니던 절의 주지는 내 병세를 어머니께 물었다.

“아뇨,차도가 없네요. 제 정성이 부족한가 봅니다.”

“아드님을 교회로 보내시면 어떨까요. 가끔 교회에 나가서 고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부부를 충주 어느 권사의 집으로 불렀다.

“얘야,오늘부터 너희 부부는 교회에 나가도 좋다. 교회에 나가서 병이 나으면 얼마나 좋겠니. 꼭 교회에 나가려무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권유였다. 그동안 수없이 전도를 받으면서 교회에 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마음 한편에 걸리는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괜히 교회에 나가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막상 교회에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무렵 군대 동기모임이 있었다. 예비역과 현역 동기들이 부인들과 함께 모였다.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한참 주거니받거니 흥이 올라갈 무렵 피영민 목사가 모임에 참석했다. 피 목사는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전 침례회신학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은 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방으로 들어오는 피 목사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약간 거무스름했던 것으로 기억되던 그의 얼굴이 환해 보였다. 술이 취했는 줄로 알았다.

“후래자 삼배해야지,피 목사.”

“나는 술을 안 마셔도 즐거워. 음료수나 한 잔 주게.”

술을 거절하는 피 목사의 모습이 너무 밝고 온유하고 평안해 보였다.

다음날 아내가 물었다.

“어제 피 목사님 들어올 때 얼굴이 너무 환하지 않았어요? 마치 서양화에 나오는 성인들 얼굴처럼.”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술이 취해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 목사의 얼굴이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 막내 여동생의 권유로 조그마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아내와 다른 것은 몰라도 십일조만은 꼭 하자고 약속했다.

본격적으로 교회 생활을 시작했다. 성경을 매일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려운 단어가 많아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당시 구역장이던 집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집사님은 척추디스크로 거의 움직이지 못하다가 출석교회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나았다고 했다. 건강이 나쁜 내게 한줄기 희망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건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절박한 생각이 들어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3년 성탄절 예배 후 나는 하나님께 담배를 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호흡기 질환인 천식에 좋지 않기 때문에 1년 동안 끊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 끊을 자신이 없었다. 골초였던 피 중위도 12년전 하나님께 기도한 후 담배를 끊었는데 내 기도도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이튿날부터 전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20년 동안 하루 한 갑 이상 피워대던 담배를 한순간에 끊은 것이었다. 게다가 밤을 새워 마셔야 직성이 풀리던 술까지 덤으로 끊어주셨다.


6. 교만이 부른 난치병…치유기도 매달려 

교회가 작다보니 1994년초 출석 4개월만에 집사 직분을 받았다. 찬양대에서 봉사하기도 하고 주일 낮예배에서 대표기도도 했다. 기독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다보니 성경 공부도 많이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급히 준비시키는 훈련과정이었던 것 같다. 작은 믿음으로 많은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교만해졌다. 그 무렵 피영민 목사를 만나게 됐고 대흥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기로 했다.

병을 낫기 위해 교회에 다녔건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천식은 매우 위험한 병이다. 1년에 2000명이 천식 발작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먹는 약은 너무 독해 속을 다 버린다. 의약분업이 되기 전에도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없을 정도로 부작용이 심한 약이다.

낫지 않다보니 약 투약량은 점점 늘어갔다. 그 부작용으로 신장 기능이 약해지고 위에 염증이 생겼다. 간 기능도 약화됐다. 관절염도 발생했다. 신체 모든 부분이 다 망가져 갔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두고 초계 비행하는 전투기를 지원하면서 1∼2시간도 채 자지 못하면서 일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건강만 믿고 피로한 상태에서 술로 위안을 삼았고 스트레스로 하루 한갑반 이상 담배를 피운 것도 병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조금만 조심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병이었는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산소호흡기를 달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지경에 처했다. 밤에는 호흡을 할 수 없어 누워 있을 수조차 없었다. 천식이 발작하면 아예 호흡이 멎는다. 숨이 끊어진 채로 119 긴급구조대 응급차에 실려 수차례나 병원에 실려 갔다.

“너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발작 중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담당 의사는 아내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사실 나도 생명을 포기한 상태였다. 일하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야 순직으로 처리되고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3∼5)

어느 날 수요예배 때였다. 대흥침례교회 안종만 목사의 설교가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이 말씀이었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이 지긋지긋한 병을 고쳐주실 거야.’

갑자기 소망이 생겼다.

1995년 고난주간에 구역 식구들이 아내의 건강을 위해 기도모임을 갖고 있었다. 아내는 자신의 상태보다 내 병을 얘기했고 구역 식구들은 우리 부부의 치우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교회를 섬기던 한 권사님도 모임에 참석해 함께 기도했다. 3일 동안 금식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자고 했다.

부활절 전날 마지막 기도회를 가졌다. 함께 기도한 후 다른 교회를 섬기던 권사님이 내 몸을 잡고 마치는 기도를 했다.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문이 다 닫혀 있었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이었다. 옷자락도 팔랑거렸다. ‘예수님이 내 몸을 만져주시는구나.’ 병이 떠나간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도회가 끝난 뒤 나는 모든 약을 버렸다. 6시간마다 한 주먹씩 먹던 독한 약들을 다 버린 것이다. 산소호흡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아무런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몇년만에 누워서 편하게 잠을 잤다.


7.  불혹 넘어 신학공부… 형제들이 학비지원 

여호와 라파를 체험한 후 하나님은 내게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다. 마흔세 살. 공부하기에 벅찬 나이였고 목회자의 길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달 내내 계속 같은 마음을 주셨다. 결국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도 모집하는 곳이 있다면 지원하겠습니다.”

아마,한 군데도 없을 거야. 신학대학원 후기 모집기간이 끝났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잘 알려진 신학대학원에 문의했다. 예상대로 모두 마감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전화한 곳이 침례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런데 아직 기한이 남았다는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약속대로 목회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아내는 내 뜻에 반대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기도해봅시다. 어떤 응답을 주시는지.”

아내에게 제안했다.

“만약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더 이상 얘기하지 않기로 해요. 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신학 공부를 허락하신다면 대학원 과정 전체 학비도 함께 책임져주셔야 해요. 우리 형편에 대학원 학비를 댈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죠?”

아내는 경제적 사정과 다른 이유를 댔지만 사모의 짐을 질 수 없다는 눈치였다. 함께 기도하기로 한 날 밤 둘째누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결혼 후 15년 동안 한번도 전화 연락을 하지 않던 사이였다.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했어. 별일 없지?”

나는 누나에게 신학공부를 하겠다는 결심과 경제 사정에 대해 얘기했다.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누나는 선뜻 학비를 대주겠다고 말했다. 의외였다. 다음날 누나는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등록금 전액을 보내왔다. 아내도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1995년 2학기에 등록했다. 하나님은 모두 9학기의 신학대학원 야간과정 전체 학비를 마련해주셨다. 그것도 책을 사볼 수 있도록 여유 있게 주셨다.

공부하는 기간은 힘들었다. 새벽기도에 갔다가 오전 6시에 출근해 성경말씀 묵상과 필사를 하고 8시부터 부대 일을 했다. 밤에는 주 4일 대학원에 나가 공부했다. 교수들은 개인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게다가 학생 대부분이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었다. 휴강도 없는데다가 웬 숙제가 그리 많은지…. 학교에 가지 않는 수요일에는 무의탁 노인시설인 ‘성애원’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구역 성경교사를 맡아 성경을 공부했고 토요일에는 지체장애인이나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러 다녔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린 후 대전 시내의 각 병원으로 전도하러 나갔다.

그러나 목회자의 길을 허락하시진 않았다. 대신 기상예보에 쓰셨다.

“하나님,전역하겠다고 동료와 부하들에게 말했는데 어떡합니까? 그러나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기상 전문가로 인정 받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소서.”

2000년 5월29일 나는 공군 중앙기상부장에 보임됐다. 전례가 없던 보직 이동이었다. 대령으로 승진도 했다. 사관학교 출신도 아닌 몇 안되는 대령 중 한명이었다.

“기상부장,한 가지 부탁이 있네. 아니 명령일세. 자네가 기상부장으로 있는 동안 기상으로 인해 1명의 사망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다 책임져야 하네. 호우나 폭설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예보를 잘해야 하네.”

기상예보로 모든 천재지변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이한호 당시 공군본부 참모차장의 생각은 맞았다. 하지만 집중호우나 폭설을 하루 전,아니 1시간 전에라도 예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8. 기도 도움받아 태풍진로 정확예보 

“무슨 예보를 이렇게 내셨습니까? 일본이나 미국의 박사학위자들이 다 엉터리란 얘기입니까? 올해 올라왔던 태풍을 보십시오. 일본과 미국측에서 예보한 진로가 다 맞았잖아요. 도대체 부장님은 무슨 근거로 동쪽으로 이동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보가 틀리면 부장님이 모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지실 겁니까? 우리 기상전대의 위상에 나는 흠집은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2000년 9월11일 새벽이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예보실에 나와 기상상황을 점검했다. 강수 자료를 보니 태평양에서 북상하는 태풍 사오마이의 전단부에 만들어진 강한 비구름이 일본에 집중호우를 뿌리고 있었다. 곳에 따라 600㎜ 이상의 비가 내렸다. 문제는 이 구름이 우리나라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하게 기상상황을 보고했다. 당시 정보작전참모부장은 태풍의 진로에 대해 궁금해 했다. 집중호우가 시작되고 곧바로 태풍이 북상하면 항공기를 대피시킬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집중호우와 태풍은 항공기,특히 대형 기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격납고가 없기 때문이다. 집중호우와 태풍이 예상될 경우 대형 기종은 태풍 진로 밖으로 대피시켜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 육군과 해군도 마찬가지다. 악천후가 예상되는 지역의 시설 보호를 위해 미리 배수로를 확보하고 절개지를 덮어주는 등의 예방활동을 한다. 그만큼 악천후 때의 기상예보는 중요하다.

다음날 최종 결정을 해서 보고하겠다는 얘기를 했지만 난감했다. 대부분의 태풍이 북위 27도까지 북상한 후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진로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예보실로 돌아와 태풍을 분석했다. 중심기압이 925h㎩(헥토파스칼)의 강력한 태풍이었다. 일본과 미국,대만의 진로 예측을 살펴봤다. 한국과 중국의 중간 지점에서 서해상으로 북상해 랴오둥반도로 올라가는 것으로 예보하고 있었다. 대충 이 정도로 보고하면 문제될 것은 없었다. 관행대로 서해상으로 진행하는 예보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나님,왠지 불안합니다. 일본 미국 대만 중국까지 같은 진로로 예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태풍의 진로를 볼 수 있는 눈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갑자기 눈앞에 태풍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세계 유수의 기상관측기관들과 달리 동쪽으로 움직였다. 12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다시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태풍이 동쪽으로 움직인다는 강한 확신을 주셨다.

예보실에 나가 기상도를 다시 검토했다. 20여년 동안 태풍에 대한 사례들을 분석한 감각이 살아 꿈틀거렸다. 계절적으로 서해상으로 북상하는 태풍의 경우 세력이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바람의 영향도 약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동쪽으로 움직일 경우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전날 자료를 뒤집고 태풍이 동쪽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보고했다. 추석에 가족과 함께 지내던 조종사와 항법사,정비사들이 비상소집됐다.

공군의 모든 예보는 기상대대나 기상대에서 자율적으로 생산,지원한다. 그러나 태풍의 경우 중앙기상부에 예보 전권이 있다. 13일부터 예하 기상부대에서 난리가 났다. 자신들의 예상과는 물론 다른 나라와도 전혀 다른 예보 때문이었다.

그런데 14일 자정 무렵 북서진하던 태풍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몇 시간 동안 그 자리를 빙빙 돌았다. 북쪽의 차가운 공기와 대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15일 저녁 텔레비전 뉴스의 기상예보도 나와 반대되는 태풍 예상 진로를 내놓았다. 4일 동안 동료와 부하들의 송곳같은 질책에도 꿋꿋했는데 힘이 빠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무도 정확하게 가르쳐주신 일이었기 때문에 곧 자신감을 회복했다. 16일 새벽 6시,태풍 사오마이는 내 예보대로 정확히 사천공항 동쪽으로 상륙했다. 비의 양과 바람의 속도까지 정확하게 맞았다. 하나님께서 태풍의 진로를 가르쳐주시고 이동시키셨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9. 주께서 이룬 정확한 예보 “할렐루야” 



“하나님,모든 사람이 제 기상예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름과 겨울이면 다가오는 태풍과 집중호우,혹한의 예보를 제대로 해 단 한 명의 장병도 죽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큰 복을 주셨다. 내 기도를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다 이뤄주셨다. 물론 사사로운 욕심이 섞인 기도나 필요없는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았다. 매주 봉사하러 가는 성애원에 세탁기가 필요할 때면 세탁기를,돈이 필요할 때면 돈을 주셨다.

1999년 어느 날이었다. 성애원에서 세탁기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 노인들의 빨래가 워낙 많은 데다가 쉽게 마르지 않아 건조기능이 있는 드럼 세탁기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백화점에 문의했다. 드럼 세탁기는 외제가 많은데 200만원이나 한다는 답변이었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서울 기상청에 출장을 가게 됐다. 우연히 대방동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생각이 나 비는 시간에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세탁기에 대해 물었다.

“무역회사를 하니까 드럼 세탁기를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겠구나?”

“우리 집에 안 쓰는 게 있는데 그걸 가져가면 어때? 미국에 있을 때 사용하던 건데 전기료도 만만치 않고 해서 안 쓰고 있어.”

하나님은 긍휼함을 갖고 드리는 기도에 즉각 응답하셨다.

가장 감사한 일은 2000년 군 기상예보 최고 책임자인 중앙기상부장으로 보임돼 2년8개월 동안 한 명의 장병도 죽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이다. 수많은 집중호우와 태풍 가운데서도 여느 예보관들과 다른 예보를 내도록 이끄셔서 피해를 줄이도록 늘 준비시키셨다.

1996∼2002년 7년 동안 집중호우와 태풍으로 희생된 인명 피해는 총 960명이다. 이중 군 희생자는 80명이다. 일반인의 경우 매년 평균 137명이 자연재난으로 희생됐다. 그러나 군인은 2000년 이후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2002년 9월 태풍 루사는 군에도 엄청난 피해를 줬다. 시가지와 농경지가 물에 잠겼고 많은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산악지역의 많은 육군·공군부대에서는 산사태 희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여름철 군인의 희생은 주로 호우 속에서 물꼬를 내려다 산사태를 만나는 경우,또는 훈련 중 강변에서 야영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이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당시 참모차장은 육군과 해군에 적극적으로 경보를 내리도록 권유했다. 그러면서 공군중앙기상부에서 하루 전에 국방부와 합동참모부,육·해군상황실,각군사령부 등에 특보 상황을 직보하도록 지시했다.

야외훈련 중인 장병들이 복귀하면 산사태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예보가 잘못돼 훈련에 조금 차질이 생기더라도 장병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더욱 감사한 일은 기상학회에서 매년 기상분야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주는 묵산학술상 올해 수상자로 결정된 점이다. 기상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수천 명에 달하고 박사도 수백명인데 현역 군인이 이같은 상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또 올해말에는 공군 기상전대장에 임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며 영광을 받으신다. 내게도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새로운 일이 있다는 생각에 더욱 겸손하게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다. 놀라우신 예수님을 찬양한다. 할렐루야!


정리=전재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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