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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하나님 만난건 내인생의 행운” (취영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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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만난건 내인생의 행운” 

◇필자 약력 △1965년 전북 순창 출생 △우석대 경영학과 졸업 △경희대대학원 호텔관광학 석사 및 박사과정 중 △한국관광학회 관광기업경영대상 수상 △취영루 대표이사 △수원중앙침례교회 집사

사람들은 나를 젊은 나이에 성공한 기업인이라고 한다. 아마 올해 마흔한 살인 내가 매출목표 500억원에 종업원 450여명,전국에 36개 직영 음식점 및 만두매장을 갖고 있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1998년 내가 취영루를 인수한 첫해 매출이 4억7000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7년간 엄청난 성장을 이룬 셈이다.

그러나 가끔 나는 ‘바로 내일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두어가신다면’ 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아직 젊고,건강하고,사업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지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내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소흘히 하거나 믿음이 나태해지는 일이 없도록 늘 기도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해 얻는 그 모든 영광과 보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보다 결코 중하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늘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 중의 하나가 ‘좋은 만남을 주소서’라고 생각한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고 그 만남에 따라 인생이 바뀌고 신앙이 달라지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조건이 참으로 많다.

고추장으로 유명한 전북 순창이 고향인 나는 2002년 돌아가신 부친(박태봉)이 큰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특별하지도,모나지도 않은 평범한 어린 시절을 지냈지만 우리집은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내가 중학교 3학년초 예수님을 알게 된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내 삶에 심겨진 최초의 신앙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반 담임 선생님은 최근희란 분으로 영어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는 예수 믿는 분 중에서 이만큼 멋있는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최선생님은 우리와 첫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반 급훈은 ‘예수를 믿자’이다. 그러니 나와 지내는 1년 동안 모두 예수를 믿어라.”

우리는 참으로 황당했다. 급훈은 보통 ‘근면 성실 노력’으로 알고 있는 우리였지만 선생님의 결정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때부터 수업 시간이나 종례 때 5분 정도 성경 내용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만들어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우리는 선생님의 성경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5분 드라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교장선생님이나 재단측에 안 들어갈리 없었다. 당시 최선생님에게는 ‘급훈을 바꾸고 성경이야기를 중단하라’는 엄청난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그러나 선생님은 사표를 써놓고 다니며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런 담대함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때 선생님에게 들은 ‘복 받고 잘사는 300% 성공비결’이 내 마음밭에 뿌리를 내렸다. 그 해답은 ‘인생에 복 받고 성공하려면 예수를 잘 믿고 부모님을 공경하며 맡은 책임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로 요약된다. 생각해보면 이 말을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지금 내가 복을 받고 300% 이상 성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학기말에 내게 안이숙 여사가 쓴 ‘죽으면 죽으리라’란 간증집을 한 권 선물하셨다. 최선생님으로 인해 내가 바로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됐다. 최선생님은 훗날 신학공부를 하시고 목회자가 되셨다고 한다. 꼭 다시 한번 뵙고 싶다.


2) 대학 마칠쯤 사업꿈안고 무작정 상경 

내가 중학생이던 당시 최고 인기 직업은 은행원이었다. 냉·난방이 잘된 곳에서 잘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고 많은 봉급을 받는 직업으로 알려져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 진학보다 상고에 들어가 바로 은행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돈을 벌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은사 한 분이 “인생을 너무 짧게 보지 말고 대학에 진학해 진로를 정해도 늦지 않다”고 하셨다. 이 은사님도 내게 인생을 좀더 진지하게 알게 해준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전주 우석대 생물학과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나는 지방대를 나와 제대로 취직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열등감을 갖고 학업을 포기한 채 훌쩍 군에 입대해 버렸다. 그런데 군복무를 하는 동안 세상을 보는 눈이 점차 달라졌다. 인생은 환경보다 내가 개척해야 하는 부분이 더 많고 노력하는 만큼 얻어진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제대하면서 다시 대학을 다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군대에서 대졸과 대재,고졸로 줄을 세웠는데 뒤쪽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제대 후 곧바로 수능준비를 하려니 앞이 캄캄했다. 이때 아버님이 내게 ‘휴학증명서’를 내미셨다. 혹시 몰라 군대에 가버린 아들 대신 등록금을 낸 뒤 휴학신청을 해놓으신 것이다. 정말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경영학과로 전과를 신청한 뒤 나는 진로를 사업가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모든 부분의 현장,특히 밑바닥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4년간 여름·겨울방학 2개월씩 총 8번이 있다. 이 기간에 내가 해볼 수 있는 모든 육체노동을 해보자. 여기서 현장 사람들의 애환과 진정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 아이디어를 찾자.”

집에서 부족하지 않은 생활비가 왔지만 방학 때마다 내가 일한 곳은 참으로 다양했다. 떡볶이 공장,옷걸이 만드는 공장,볼링공 닦는 일,노가다 건축일,중국집 배달원,가스통 배달원,손전등 만드는 직공 등 총 8가지 일을 차례로 경험했다. 그런데 이 일들이 지금 하는 사업들에 엄청난 도움이 됐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떡공장에서는 밀가루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 만두공장 운영에 도움이 되었고 중국집 배달원 경험은 취영루 경영의 테두리가 되었다. 하부 조직의 생리를 알고 오너로서 어떤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대신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은 나를 위해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나는 늘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번 돈으로 친구 학비를 보태거나 조카 피아노를 사주는 데 썼다. 그래야 내가 이렇게 일하는 것이 돈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체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졸업식을 앞둔 1990년 12월17일. 나는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업가로서 꿈을 펼치기 위해 일단 서울로 향한 것이다. 먼저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기도 성남의 손전등 만드는 정일전자공업사에 인사차 들렀다. 손전등업계 2,3위권의 자그마한 중소기업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한다는 사실을 안 사장님이 대기업 봉급을 줄테니 함께 일하자고 덥석 손목을 잡았다. 아르바이트 때 열심히 일한 것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았다.

“그래 여기서 2년만 더 일하고 내 사업을 하자. 경영실무도 필요할 것이다.”

나는 ‘2년만’이란 조건을 걸고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다.


3) 최고 사업가 목표 성실 근무 ‘초고속 승진’ 

직원수가 30여명에 불과한 중소기업인 첫 직장에서 나는 모든 면에 최선을 다했다. 2시간쯤 일찍 출근해 회사 마당부터 쓸기 시작해 회사 일을 이리저리 찾아 내 일처럼 해 나갔다. 밤 늦게까지 일하다 공장에서 박스를 깔고 자는 일도 다반사였다. 금세 사장님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자재 총무 생산 등 모든 부문에 내가 관여해 주도적으로 일을 하게 됐다. 당연히 직원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나이도 어린 놈이 아부하는 수준이 대단하구먼. 그래 얼마나 가나 보자.”

나는 아부와 성실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직장인으로 만족하고 있지만 나는 사업을 크게 하겠다는 비전 아래 일을 배우는 것이니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내가 더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사장님이 “그래 잘했어” “나는 자네를 믿네”라고 해주는 격려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지금 직원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높이는 데 가장 신경을 쓰고 있다.

1년 만에 모든 일을 배운 나는 조립직원을 두지 않고 외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아이디어를 내 인건비를 30% 이상 줄일 수 있었다. 기분이 좋은 사장님이 소형차를 한 대 뽑아 선물해줄 정도였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2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다 보니 나를 비난하고 조소하던 직원들은 그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나 역시 놀러다니고 데이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신나고 편리한 것보다 내가 세운 고지에 빨리 올라가야 한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이 무렵 나는 사귀는 여자가 있었다. 전주에서 대학을 다닐 때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약국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함께 일하고 있던 김현주란 아가씨를 소개 받은 것이다. 그런데 김현주씨 아버님이 목사님이셨다. 전주 시은교회를 담임하고 계셨는데 전주에 내려가면 당연히 그곳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의 영향으로 교회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졌지만 내가 갖고 있는 야망은 신앙에 열심을 내도록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4년간 연애했지만 실제로 만난 날은 보름이나 될까 싶다. 전주와 서울로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내가 일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내가 공무원시험을 보러 서울에 왔는데 내가 시험치는 장소에만 데려다 주고 회사로 돌아가자 너무 섭섭했다고 한다. 멀리서 온 자기를 위해 하루쯤 휴가를 낼 만도 한데 그냥 돌아가 결혼을 결정하는 데 갈등을 느꼈다고 했다.

양가에 서로 소개하는 분위기가 되자 모두 결혼을 반대했다. 우리집은 목사 딸이어서 안된다고 했고 그쪽은 예수도 잘 안믿는 사람에게 딸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장인에게 처음 인사를 드리는 날,아내가 “아빠,저는 이 사람을 믿어요”라고 하는 말에 주눅이 들어있던 나의 어깨가 쫙 펴졌다.

“그래,나를 믿어주는 이 여자를 위해 내가 평생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리라. 절대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부부간에 지치고 힘들 때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려해 주는 말이야말로 어떤 보약보다 힘이 난다. 전도서 9장 9절에 보면 우리 삶이 헛되지만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우리 일평생 수고해서 얻게 되는 분복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가정은 행복의 원천일진대 가정에 성공해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가 교회결혼식에 참석해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는 에베소서 5장 말씀과 같이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하고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 싶다.


4) 갑자기 찾아온 중소기업 사장 기회 

아내는 1992년 여경시험에 합격해 경찰공무원이 되었고 93년 나와 결혼했다. 아내와의 결혼은 곧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 역시 장인이 목사님인데 사위가 교회에 안나갈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인은 내게 매주일 신앙을 알게 해주는 엽서를 한장씩을 보내 주셨다. 이 엽서를 매주 읽으며 나는 조금씩 신앙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95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사장이 어음보증을 섰다가 부도가 나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이 된 것이다. 사장은 내게 이렇게 제의했다.

“나는 이제 두 손 들었네. 자네가 이 회사를 맡아 운영해 보게나.”

내가 소망했던 사업 기회가 주어졌지만 환경은 너무 좋지 않았다. 인수자금도 부족했고 채권단을 무마시킬 자신도 없었다. 사업을 하기엔 나이도 너무 어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젊어서나 해보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앞으로 창창한데,만약 쓰러질 경우 또 일어서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의 배려와 부모님의 도움으로 자금을 마련했고 채권단도 나를 믿겠다며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대학졸업 5년만에 내가 중소기업 사장이 된 것이다.

나는 사장이 된 후 아내와 함께 기도하면서 사업에 관련된 성경말씀 두 구절을 찾아 늘 기억하기로 했다. 그것은 잠언 16장 3절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와 시편 37편 3편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였다.

회사 이름을 세광산업으로 바꿔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손전등(랜턴)과 건전지를 OM방식으로 납품하는 회사였다. 그런데 내가 직원으로 있을 때와 오너가 되었을 때의 상황은 너무 달랐다. 모든 책임이 내게 돌아오니 결정을 내리기가 겁났다.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그동안 계속 해왔던 일이기에 더 열심히 뛰었다. 그러자 회사는 안정을 찾고 매년 20% 이상 성장하면서 부채도 갚을 수 있었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할 무렵 또 다른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IMF라고 하는 놈이었다. 그 냉랭한 한파는 우리 회사를 비켜가지 않았다. 더구나 모두들 IMF를 핑계로 결재를 해주지 않았다. 믿고 빌려주었던 돈들도 아예 갚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현금 이외에는 물건을 주지 않았고 그러자 매출이 30% 수준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생산직원을 50% 정도 감원해야 했다. 그런데 이 IMF 하에 직원들이 다른 곳에 취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갈등하다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회사가 이런 상황입니다. 50% 감원하거나 A,B조로 근무해야 그나마 회사가 존재합니다.여러분이 결정해 주십시오.”

A,B조로 출근하기로 했어도 회사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툴툴 털고 다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틀린 것이 없었다. 고난은 주님을 뜨겁게 만나는 통로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 환경적으로 벅차하던 어느날,하나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믿음을 성장시키는 귀한 분을 보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거만했던 아집이 세파에 조금 누그러져 있을 때였기에 신앙이 불붙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우리 공장 옆 지하실에 세들어 있는 신성조 전도사란 분이 놀러왔다. 그분은 성경을 수십독했고 여러가지 은사를 받은 분이란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박 사장님. 제가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 500만원이 없어서 사장시켜야 되는 것이 안타깝네요. 엄청나게 팔릴 것 같은데요.”


5) 기도원 철야예배서 귀중한 은혜 체험 

나와 친한 사이도 아니지만 500만원이 없어 비전을 펼칠 수 없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즉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 전도사님,제가 500만원을 드릴 테니 그 꿈과 뜻을 한번 펼쳐보십시오.”

나도 어려운 상황에서 조건없이 돈을 내주자 신 전도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옥베드를 만들던 그분은 며칠 후 돈을 도로 가지고 왔다.

“기도 중에 이 돈을 받으면 안되고 돌려줘야 한다는 깨달음이 왔어요. 그러니 없었던 일로 합시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정하는 그분이 신기했다. 장인이 목사님이고 교회에 나가지만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내 말에 신 전도사는 성경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며 간절히 기도를 해주자 감동이 왔다. 그 무렵 사업이 바닥이어서 할 일이 별로 없던 나는 틈만 나면 신 전도사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뭐든지 시작하면 몰두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신 전도사와 청계산에 있는 한 기도원에도 따라갔다.

성도들이 박수를 치고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혹시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철야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던 새벽 2시쯤이었다. 온몸이 어떤 강한 힘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 같으면서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여러 가지 고민과 생각들이 마치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바로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은혜로구나!’

나는 이때부터 산기도를 포함해 모든 집회를 찾아다니며 영적 세계에 몰입해갔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몰아붙이듯 1년 이상 신앙훈련을 시키신 것 같다. 나와 늘 함께 한 신 전도사님은 물질세계를 초월한 분이었다. 내가 신학교 학비며 생활비를 드려도 돈이 생기면 빈민과 고아 등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 자신은 늘 빈털터리였다. 산기도를 갈 때마다 건빵을 한 봉지씩 들고 갔는데 나는 그것이 식사 대용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건빵을 매우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루는 그분이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은 더 큰 일을 할 분입니다. 제가 생각에는 교회도 큰 교회로 옮기고 지경을 넓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경기도 성남 분당신도시에 살고 있는 내게 김장환 목사님이 시무하는 수원중앙교회에 출석할 것을 권면했다. 그리고 훌쩍 사라지셨는데 신앙적으로 매우 의지했던 터라 나로서는 매우 섭섭하고 서운했다.

나는 김장환 목사님이 유명한지도,그 교회가 큰지도 전혀 몰랐다. 그런데 그 교회가 중앙초등학교란 사립학교를 잘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아이 교육에도 좋을 것 같아 아예 그쪽으로 이사해 수원중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에 등록도 하지 않고 새벽기도회는 집 근처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던 1999년 강원도 고성에 산불이 크게 났다. 교회에 갔더니 위문품을 모아 봉사활동을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만든 손전등 재고품과 옥베드 등을 실어 보냈다. 다녀온 분들에게 반응이 어땠느냐고 묻자 대답이 영 시큰둥했다. 그분들은 지금 당장 먹는 것이 급하다고 했다. 하기야 모든 것이 불에 다 타버리고 없는데 손전등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될까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 공장 옆에 있던 만두공장에 달려가 600만원어치를 구입,이재민들에게 실어 보냈다.

나와 만두의 인연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만두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기만 하다.


6) 부진한 사업 접고 ‘만두’로 업종 전환 

그 무렵 나는 업종 전환을 고려하고 기도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재민들로부터 우리 회사의 손전등이 외면당하고 만두가 환영을 받는 것을 보면서 새 사업은 먹을거리를 선택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러다보니 ‘만두’와 ‘김치’ 두 종목이 최종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런데 나는 김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으나 만두에 대해서는 꽤 지식이 있었다. 대학교 다닐 때 떡볶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만두피를 만드는 밀가루를 다뤄 보았다. 또 사업 초기에 직원들에게 식권을 나눠주면 대부분 근처 중국집으로 가곤 해 내가 아예 중국집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었다. 한때 중국집 수입이 공장보다 나을 때도 있어서 먹는 장사를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경영하던 중국집 주방장이 만두전문가였다. 그와 만난 것도 특이했다. 가게에 웬 사람이 찾아와 지금 30만원만 빌려주면 며칠 후에 와서 그만큼 일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속는 셈치고 돈을 내주었다. 그 사람은 보름 뒤에 다시 왔는데 특히 그의 만두맛이 아주 특급이어서 결국 주방장이 되었다.

결국 나는 만두공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대뜸 내가 600만원어치 만두를 샀던 그 공장을 찾아가 “사장님,이 회사를 제게 파십시오”라고 말했다. 사장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박 사장,내가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잘 운영되고 있어요. 나는 이 회사를 팔 의사가 전혀 없어요.”

알고보니 사장님은 아직 집이 없었다. 나는 집 한 채를 사드리고 공장과 회사를 좋은 조건에 인수하겠다고 다시 제의해 결국 넘겨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무렵에서야 출석하는 수원중앙교회의 김장환 담임목사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만두공장을 새로 시작한다고 말씀 드렸다. 첫 만남에 목사님도 내게 잠언 16장 3절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는 말씀을 주셔서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내가 이 간증을 시작하면서 첫머리에 우리 크리스천은 좋은 만남을 가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썼다. 내가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을 통해 신앙의 씨앗을 받았다면 신경조 전도사님을 통해 믿음이 여물고 김장환 목사님의 지도를 통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거성식품이란 이름으로 만두를 만들어 팔면서 나는 유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우리 만두가 맛있는데도 불구하고 슈퍼마켓에서는 브랜드가 잘 알려진 유명회사의 제품이 훨씬 더 많이 팔렸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이른바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에 따라 판매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사실 내가 손전등 제조를 하면서 미국의 유명회사가 한국의 건전지 제조업체 브랜드를 수백억원을 주고 사버린 뒤 건전지 시장을 독점,가격을 올리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만두도 브랜드가 있어야 하겠구나. 그렇다면 가장 유명한 만두 브랜드는 어디인가?’

살펴보니 대기업에서도 만두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그 이름을 사겠다고 할 수는 없고 개인이 하는 만두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던 게 바로 ‘취영루’ 만두였다. 취영루는 1945년 화교인 성모씨가 서울시청 건너편에 있는 플라자 호텔 뒤에 문을 연 중국요리집이다. 이곳 물만두는 1시간 이상을 줄서야 먹을 수 있을 만큼 인기를 끌었던 역사를 갖고 있다.


7) ‘취영루’ 브랜드 믿음 갖고 고가에 인수 

취영루는 창업자의 아들인 S씨가 이어받아 논현동으로 장소를 이전,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아들은 미국 유학파였지만 물만두 만드는 비법을 전수 받아 이를 기업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경기도 파주시에 대규모 만두공장을 짓다가 외환위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는 호기롭게 S사장을 찾아가 상표(브랜드)를 팔 것을 요청했다. 우리 만두 이름으로는 업계에서 도저히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업을 쉽게 넘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던 나는 하나님께 좋은 방법을 찾아달라고 간절히 기도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취영루 사장이 다른 사업에까지 손을 댔다가 실패하고 내게 브랜드를 사가도록 요청한 것이다. 상표권 외에도 상호명까지 넘겨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만두 판매 뿐 아니라 중국음식점까지 운영할 수 있었다.

주위에서는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취영루의 이름이 유명하다 해도 그만한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브랜드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내가 산 액수보다 10배 이상 가치가 있다는 브랜드 평가회사의 평가도 크게 작용했다.

사실 나는 이미 외환위기의 긴 터널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사업공부를 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 신앙이 진일보된 것은 내게 엄청난 에너지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란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결과에 대해 승복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크리스천 사업가들만의 특권이다. 비신앙인들은 늘 조마조마하고 애를 태우지만 우리는 좋은 것을 주실 하나님임을 믿고 설사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낙담과 절망이 없다.

사실 취영루를 인수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많은 인내와 기도,사랑을 필요로 했다. 나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도에 대한 결과를 너무 빨리 바라는 것을 많이 봐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는 다르다. 당장은 하나님이 야속한 것 같아도 인내하며 조용히 순종할 때 주님은 언제나 더 큰 것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대차대조표는 정확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취영루를 인수하면서 연구개발비를 대폭 늘리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철저한 위생관리와 함께 개선할 부분이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공격적인 경영을 했다. 아울러 사목을 두어 전 직원에게 수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예배시간에 나는 이렇게 간증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복입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을 왜 늦게 만났는지 후회가 됩니다.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면 여러분은 놀라운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취영루 인수 후 2000년 매출액은 22억원 정도였다. 1년 후에는 59억원을 기록했고 다음해는 180억원에 육박했다. 이것은 물만두만 판 것이 아니라 외식사업에까지 진출한 결과였다. 나는 우선 맥도널드나 TGI 등 외국 체인을 먼저 벤치마킹했고 프렌차이즈 대신 직영매장을 선호했는데 이것이 주효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단거리 경주가 아닌 장거리 경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라”는 디모데 전서 4장 15절 말씀을 새기며 하루 24시간을 48시간처럼 뛰었다.


8) 죽음의 그림자 같이 찾아온 급성패혈증 

2002년은 가장 바쁜 해였다. 만두공장 가동이 본격화되고 매출이 늘어나면서 기술력을 쌓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가수(加水)공법을 개발해 특허를 따낸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것은 만두피에 가능한 한 많은 물을 포함하게 하는 방법으로 물기가 많으면 조리해도 불지 않는 장점이 있어 취영루 브랜드를 차별화시킬 수 있었다.

백화점과 대형매장을 파고들어 만두를 팔았고 취영루 간판을 단 중국요리집을 2001∼2년에 모두 11개나 오픈했다. 음식점은 4등급으로 나누어 차별화시켰다. 그것은 지역에 따라 수요층이 다양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했다. 김장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인생의 많은 지침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새벽예배는 여전히 집 근처 수원새문안교회에서 드렸는데 담임목사님이 설교 중에 “대우가 세계경영이란 기치를 내걸고 사업을 하는 데 슬로건이 아주 잘못됐다. 세계경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기업이 하는 것이 아니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대우가 은행관리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모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새문안교회 목사님이 소형차를 몰고 들어오시는데 나는 고급 외제차를 타고 있었다.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에 바로 1t 포터로 바꾸었고 결국 목사님께 적당한 중형차를 선물해 드린 후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죽음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가 회생하는 사건을 겪었다. 건강을 자신하던 나는 하루에 서너 시간 잠자고 일에 파묻혀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집에 돌아오는데 으슬으슬 춥고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었다.

다음날 새벽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오전 5시에 간신히 일어났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려 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나는 직원들에 의해 아주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진료를 받았다.

온몸이 춥고 떨리는 증세였는데 만약 나를 진료했던 의사가 급성 패혈증을 진료해본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혈액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가운데 손을 써야 할 시간이 지나가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급히 중환자실로 나를 데려가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내가 살아날 확률은 높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패혈증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 줄 몰랐다. 의사는 하늘에 맡기지만 유언은 받아두라고 말해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무엇보다 그해 처음 뽑은 취영루 공채 1기생 18명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회사에 걸었는데 내가 죽으면 그들의 꿈이 어그러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살려주시면 주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이 기업도 주님의 것이고 저는 운영자일 뿐임을 늘 기억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드리는 기도만큼 절박할 수 있을까?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김장환 목사님도 나를 붙들고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해주셨다. 내게 다가왔던 죽음의 그림자는 많은 분의 강한 기도로 물러갔다. 놀랍게 증세가 호전된 나는 10일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나는 이때부터 삶에 대해 더 진지해졌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9) ‘쓰레기 만두 파동’에 억울하게 연루 

사업은 일취월장,거침없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주위의 기도와 관심 덕분이라 믿고 겸손하려고 노력했다. 선교에도 관심을 갖고 김장환 목사님이 사장으로 계신 극동방송 운영위원이 되어 전파선교에도 참여했다.

2003년 3월에는 경희대 대학원 호텔관광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한국표준협회 서비스 대상을 2002년과 2003년 잇달아 수상해 사업에 힘이 됐다.

나는 회사 사훈을 ‘건전한 도덕경영,함께 하는 경영,깨어있는 경영’이라고 정해 회사 곳곳에 내붙였다. 사실 이 말을 풀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정직하고 바른 회사,하나님이 주인이신 회사,하나님의 음성을 늘 깨어 듣는 회사’란 의미였다.

지난해에는 350억원의 매출목표를 세우고 전 직원이 한마음이 되어 만두 개발과 판매,외식 매장 확장 등에 계속 매진했다.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해였다. 이 가운데 지금 생각해도 악몽과 같은,이른바 ‘쓰레기 만두파동’을 우리 회사도 겪어야 했다.

6월6일은 현충일이어서 집에서 쉬는데 TV뉴스를 통해 만두소에 쓰레기 단무지가 사용되는 비위생적인 화면이 방영됐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다음날 직원예배를 드린 후 “어제 이런 방송이 나왔으니 우리 회사도 청결에 더 신경을 쓰자”고 말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3시,새파랗게 질린 직원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식약청이 발표한 불량 만두소를 사용한 만두 제조사 명단에 취영루도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후 회사 홈페이지에 항의의 글이 쇄도하고 있었다. 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곧장 식약청에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식약청 관계자는 경찰에서 넘겨받은 자료대로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어떻게 이렇게 중대한 발표를 하면서 해당 업체에 대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발표한단 말인가? 내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난 이유는 취영루 만두에는 문제가 된 단무지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만두소에는 무 자체가 들어가지 않았다.

경찰의 조사 자료를 보니 3년전에 우리 회사가 직원식당 배식용으로 단무지 1400㎏을 문제가 된 회사에서 매입한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만두 공장에서 단무지를 재료로 쓴다면 아무리 적게 써도 수만∼수십만t을 사용한다. ‘그런데 어떻게 3년전에 구입한 1400㎏의 자료를 근거로 발표를 한단 말인가’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경찰도 잘못을 인정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져 다시 담을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미 취영루가 명단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최악이었다. 항의 전화로 회사 업무가 완전히 마비됐다.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살려주세요. 지금 제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지혜를 주옵소서. 60년간 쌓아온 취영루의 명예와 존립이 달려 있습니다”

나는 곧장 김장환 목사님을 찾아갔다.


10) 진실 믿은 고객들 “힘내세요” 격려 

내가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인간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 출석교회 담임목사님을 찾아간 것은 기도도 받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김장환 목사님에게 상황을 말씀 드렸더니 “정말 불량 단무지를 안 썼느냐”고 물으셨다. 목사님까지도 다시 확인하실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싶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까지 맹세한다고 말씀드리자 “그러면 당장 크게 광고를 하고 결백을 위해 싸우라”고 격려하며 기도해주셨다.

회사로 돌아오니 상황은 더 심각해져 있었다. 모든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뉴스,신문 1면에 ‘쓰레기 만두소 파동’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먹는 것에 저런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나는 목사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다음날 아침 국내 유명 일간지 1면에 ‘취영루 만두에 불량 만두소를 사용했다면 회사문을 닫겠다’며 결백을 주장하는 5단 광고를 냈다. 아마 이 광고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안다.

그리고 관계기관에 합동조사반의 실사를 요청,밤샘조사를 하도록 했다. 결국 3일만에 우리 회사는 무혐의 판정을 받아냈다. 기도하면서 정신없이 뛴 결과였다.

무혐의 판정은 받았지만 이미 사람을 정신없이 때려서 아사 직전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한 것과 다름 없었다. 전국 500여 거래처에서 모두 반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40대나 되는 회사 전화는 화가 난 시민들의 항의로 불이 났다. 우리 회사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2000여건 이상의 항의성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다른 만두 회사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른 회사들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고 홈페이지도 일시 폐쇄했다고 한다. 나는 직원들을 모았다.

“여러분,우리는 결백하고 당당하지만 언론의 발표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회사를 나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입장만 생각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우리가 힘이 들어도 고객들의 항의를 다 받아주고 또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애사심을 갖고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합시다.”

나는 이때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해 회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한 것에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직원들이 무서운 응집력을 발휘해줬다. 모두 밤 12시까지 근무하며 고객들의 항의 전화를 받아 겸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또 네티즌들이 회사 홈페이지에 올린 항의글에 일일이 답장을 해주었다.

그래도 하루 2억원어치의 만두가 반품됐다. 나중에는 이것을 폐기처분하는 비용만 수억원이 들어야 했다. 이 여파는 무려 3개월간 이어졌는데 이때 입은 손실이 거의 100억여원이나 되었다.

그나마 우리가 힘을 얻고 끝까지 지탱했던 것은 진실을 알게 된 또 다른 고객들의 응원이었다.

“취영루는 믿었는데 역시 무혐의 판정을 받았군요. 힘을 내세요” 어떤 분은 시루떡을 보내주기도 했고 어떤 분은 수박을 보내며 ‘취영루 파이팅!’을 외쳐주셨다.

만두 파동의 여파로 수많은 만두회사가 도산하고 시민들이 아예 만두를 먹지 않자 언론들도 보도 방향을 바꾸었다. 그것은 시민을 분노케 했던 동영상이 문을 닫고 2개월 동안 방치됐던 생산라인을 찍었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 회사는 만두소 파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회사로 언론에 부각돼 곳곳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11) “위기를 기회로”… 수렁에서 건져주신 주님 

우리 회사는 3개월 동안 공장 가동이 중단됐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로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정작 성경 시편 말씀이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 40:2)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만두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자 동정론이 일면서 경찰의 성급한 조사 공개와 지나친 언론보도에 대한 문제점도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각 언론사에서 우리 회사에 관심을 갖고 기사를 썼다. 처음에는 무혐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을 시작해 어려움을 전 직원이 단합해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고 있다는 미담기사로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회사도 많이 알려지고 이미지도 ‘깨끗하고 양심적인 회사’로 반전되고 있었다. 김장환 목사님이 조언해주신 결백을 위해 싸운 결과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처한 결과에 대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요즘 ‘긍정의 힘’이란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 나 역시 내가 당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에 대해 발상의 전환을 갖게 된 것이다.

‘취영루는 이번에 100여억원(3개월간 손해액)의 광고비를 들여 회사를 홍보했다고 치자. 각 신문 1면,각 방송 톱뉴스에 우리 같은 작은 회사가 언제 한번 보도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모든 것을 홍보비로 환산하면 아마 그 정도 액수가 될 것이다. 이제 많이 홍보했으니 많이 버는 일만 남았다.”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 역시 주님이 주신 은혜라고 생각한다. 당시 회사가 매우 어려웠지만 자신의 일처럼 헌신해준 직원들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단 1명도 감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직원들이 모두 스스로 세일즈맨이 되어 전국을 누비며 제품을 홍보하도록 했다. 또 주부들을 중심으로 공장 방문단을 모집,위생적인 만두의 전 제조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해가며 회사는 서서히 기운을 차려 가고 있었다. 매주 예배시간에 직원들의 기도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더 커진 것도 매우 기쁜 일이었다.

“하나님,위기를 기회로 삼게 하여 주옵소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환란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 당신의 기업이 되게 하옵소서.”

나는 이 사건을 통해 국내 시장만 바라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2004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현지법인을 설립,해외 수출길을 열었다. 그러면서 체인점을 늘리고 매장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그 결과 매장이 100여개가 늘었고 연말 매출 목표액 300억여원을 훌쩍 뛰어넘어 400억여원의 매출신장을 기록했다.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나님,감사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하옵소서. 이 기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하게 하시고 주님이 이 회사에 주시는 사명을 밝히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과한 우리 회사에 보너스를 주셨다. 지난 5월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8군 만두납품에 우리 회사가 도전장을 냈는데 이를 통과한 것이다.

미 국방부 관계자가 직접 우리 회사에 나와 제조과정을 자세히 점검했고 미국 FDA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위생상태를 요구했다. 그 결과 모든 테스트에 통과해 우리 회사는 미8군에 납품하는 한국 최초의 만두 생산업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취영루의 전 제품이 미군 공식 납품업체인 LOF사를 통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12) 말씀따라 용기 얻으면 사업도 ‘쑥쑥’ 

회사가 정상적인 궤도에 올라서면서 내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은 기업은 소비자를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경영이 회사 중심이 아니라 소비자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확고하게 배울 수 있었다.

고난의 터널을 한번 통과하고 나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마 20장)는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며 이를 항상 실천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나는 고객들을 위해 올해 두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먼저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만두역사박물관을 설립했는데 다음달에 문을 열 예정이다. 이 박물관에는 만두의 과거와 현재,그리고 미래의 모습 뿐만 아니라 취영루 생산공장 초기에 사용했던 성형기 반죽기 등 옛날 기계 등을 전시,만두 제조의 변천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 다양한 중국 유물을 전시해 고객들에게 보다 많은 볼거리도 제공할 예정이다.

두번째는 고객들과 직원,지역주민들을 위한 ‘취영루 음악의 밤’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최근에도 경기도 파주시 본사 야외무대에서 SBS 김정택 단장을 비롯,성악가 등을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밖에도 직원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을 방문,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사랑은 나눌 때 커진다는 말을 확실히 믿는다.

올해 수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해외출장이 잦아졌다. 나는 이제 취영루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크리스천 기업으로 부끄럽지 않길 기도하고 있다.그래서 다양한 문화사업을 펼치고 이윤을 사회에 돌리고 분배할 수 있는 일류 기업이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고난을 통해 신앙도 성큼 자란 것 같아 더욱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사업가로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 내용은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청지기가 되게 해주시고 성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옵소서”이다.

지금까지 내 경험에 비춰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마음의 그릇을 깨끗이 비울 때 넘치게 채워주셨다. 하나님께 그릇을 내밀어 구하면서도 온갖 생각과 욕심을 가득 담아놓으면 주님이 부어주실 공간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내가 생각하는 성공의 목표와 주님이 생각하는 성공의 목표가 달라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젊기 때문에 성공한 기업인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아직 여러 가지로 부족한 크리스천으로서 주님의 사역에 조금이나마 쓰임 받길 바라며 더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업의 어려움과 고통,상처들로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을 줄 안다. 내가 이분들에게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은 지금의 처지를 그 누구의 탓으로도 돌리지 말고,그 누구의 위로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성경 말씀에 기대어 용기를 얻고 일어서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의 고통을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으면 한다.

1945년 소공동에서 취영루가 문을 연지 올해로 만 60주년이 되었다. 물론 중간에 내가 인수했지만 나는 그 전통과 맛을 계속 발전시켜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넘나드는 외식사업체로 키워나갈 비전을 세우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 드린다.

“소망 중에 즐거워 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


정리 = [국민일보] 김무정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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