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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하나님의 선교사로 ‘국회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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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최철국 의원(17대 열린우리당)

“최철국 만세!”

2004년 4월15일 저녁 6시. 총선에서 나의 승리 가능성을 예측하는 출구조사가 TV를 통해 발표되던 순간 선거운동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개표가 끝나고 당선이 확정된 직후 나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섬기고 있는 김해 제일교회 류종길 목사님을 비롯한 형제자매들이 선거사무소에 모여 당선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 때의 감격과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이런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당선되도록 길을 열어 주심에 진정 감사 드립니다. 2년 전 김해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글자 그대로 ‘백수’생활을 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게 하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믿으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알게 하시고 연단을 통해 인내와 인격을 쌓으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더욱 찬양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김해복음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한 충직한 일꾼으로 삼아 주옵소서.”

그렇다. 나는 기도 그대로 하나님의 ‘선교사’로 의회에 들어왔다. 의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열망이 나를 정치판에 끌어들였다. 정치계는 내 신앙의 실험장이며 선교의 장이다.

내가 진정으로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1991년 12월 충현교회에 등록하면서부터 였다. 당시 나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청와대 근무 중에 2년간 미국에 가서 선진행정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연수가 끝나가던 1996년 6월말 주일 저녁 약 보름간의 ‘지도자훈련’을 받으라는 미국 친구의 권유가 있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한국 상황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다. 천성적으로 나는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멀었고 돈도 없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사항 가운데 하나가 신앙과 정치를 조화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세 가지 이유로 나는 정치할 인물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친구에게 다음날 있을 지도자 훈련기관에 입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적극적 사고를 가진 그 친구에게 떠밀려 ‘지도자 훈련기관’(The Leadership Institute)에 등록했다.

첫 시간에 최근 서거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참모가 들어와서 레이건의 인기가 높은 이유를 설명했다. 레이건은 영화배우라서가 아니라 정치적 술수( political skill)를 쓰지 않고 평상심으로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인기고 높았다는 설명이었다. 둘째 시간에는 남부지역의 젊은 하원의원 당선자가 부자인 상대 후보를 이긴 사례를 발표했다. 마지막 시간에는 50대 후반의 흑인 여성 국회의원이 신앙과 정치를 어떻게 잘 조화시켜나가고 있는지를 설명해줬다. 놀랍게도 하루만에 내가 갖고 있던 의문 3가지를 모두 풀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감사 드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고향 김해에 가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고 서원했다.


국회 입성 민족복음화 소명 크신 뜻 

귀국해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등에서 근무하면서도 김해 지역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2년 2월 22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김해시장 선거에 뛰어들었다. 김해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나를 김해시장으로 사용하실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철석같이 믿었던 한나라당 공천을 못 받고 온실 밖으로 내팽개쳤다. 나는 참담했다.

그 때 김해제일교회 류목사님과 김해시기독교연합회 목사님들의 기도와 격려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열심히 뛰었으나 한나라당의 지역주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당 후보로서 역대 영남선거사상 최다 득표율(42.3%)을 기록했다. 모든 시민은 “최철국이가 비록 투표에서는 졌지만 선거에서는 이겼다”고 평가해줬다. 하나님이 여러 면에서 부족한 나를 연단을 시켜 주셨던 기간이었다.

누가 ‘집안을 가장 빨리 망하게 하는 지름길은 선거’라고 했던가. 낙선 후의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돈은 빌리면 되고 육체적 피로는 아내와 테니스를 치면서 회복할 수 있었지만 정신적 고통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았다. ‘출마를 결심했을 때의 분명한 확신과 뜨거운 믿음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며 나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 때 류 목사님이 심방을 오셔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이유없이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큰 뜻이 있을 것입니다”는 말씀과 기도를 해주셨다.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즉시 나는 일어나 한 달 동안 지역 구석구석을 돌며 시민들에게 감사인사를 드렸다.

나는 처음으로 ‘백수’생활을 해 보았다. 철저하게 하나님게 매달린 시간이었다. 새벽기도 전교인수련회 부흥회 등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큰 은혜를 주셨고 내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셨다. 고통이 형통이며 하나님 자신의 뜻에 따라 나를 다듬어 주시는 연장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 덕분에 나는 김해제일교회 안수집사로 헌신하게 되었고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와 최씨종친회 김해회장이신 아버지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후 하나님께서 ‘최철국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드라마의 감독이 되셔서 일일이 내가 가는 길을 간섭하셨다. 2003년 11월 나는 40일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했다. 2003년 12월31일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깜깜한 새벽 2시에 300명 가까운 성도들과 함께 김해의 명산 만장대에 올라가 ‘비전선포식’을 가졌다. 성도들은 “김해시 복음화를 위해 최철국 집사를 하나님의 도구로 써 달라”는 통성기도를 드렸다. 나도 얼마나 간곡히 기도 드렸던지 차디찬 겨울바람에 목이 상해 심한 고생을 했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잠언 말씀을 되새겼다.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간섭하시며 성취시켜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의정활동을 벌여나갈 것을 다짐한다.
[역경의 열매 ―최철국 ⑶] 행시 합격 뒤 크리스천 아내 맞아 

가난이 뭔지는 몰랐으나 늘 배고팠던 어린시절,뒷동산 너머에 있는 예배당에서 떡과 선물을 준다는 소문에 이끌려 동네 개구장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몇 주간은 으레 착실한 주님의 아들이 되곤 했다. 목사님도 안 계신 아담한 예배당에서 이웃동네 박씨 아저씨로부터 성경말씀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 아이들에게 지급되는 성경과 찬송가는 없었지만 그 때 배운 찬송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다가 가끔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내려갔다. 고향에서 주일에는 믿지 않는 부모님 몰래 우리 부부는 집 뒤편의 교회를 찾았다. 한번은 목사님 설교 후 내가 요청해 지금은 장로가 되신 박씨 아저씨와 함께 ‘요한복음 3장 16절’ 찬송가를 특송으로 불렀다. 권사님이신 장모님으로부터 곡조가 틀린다고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던 그 찬송가였지만 박장로님과는 음정과 박자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불렀다.

부산으로 진학한 중학교 1학년 때 함께 자취하던 이종사촌 형님의 손을 잡고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말일성도교회’에 나갔다. 외국선교사로부터 영어도 배우고 성경공부도 했지만 그 교회가 이단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중학교 3학년 때 하숙을 하면서부터 하숙집 아주머니를 따라 일반 교회에 다녔다. 새벽공부 습관을 기르기 위해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는 열성을 보였다. 싸움 잘하고 인색했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불교를 ‘돌부처 믿는 무속’으로 매도했었다. 그 아주머니의 편협성은 나의 사춘기 반항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고2 때 동래 범어사에 가을 소풍을 가서 우연히 스님과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나는 “기독교에서는 불교를 비판하던데 불교에서는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지요. 우리는 기독교를 배우기 위해 스님을 외국으로 유학 보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린 마음에 불교가 훨씬 더 통이 큰 종교로 보였다. 대학에 입학한 뒤 바로 불교학생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불경을 외우고 목탁을 치며 구도의 길을 가려 했다. 그리고 조계사에서 무진장 스님으로부터 설법을 듣고 세상이 넓어지는 감동을 받았다.

무진장 스님은 “사람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녔으며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설파했다. 서울 근교의 흥국사에서 가진 수련회 때 유명한 스님으로부터 법명도 받았다. ‘덕우’(悳愚) 즉,크게 어리석다는 이름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수련회 기간 내내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교수 연구실 아래층에 자리한 법불회(法佛會)실에서 수시로 목탁을 치며 마음을 다스렸다.

여름방학 때는 고향 김해의 고찰 은하사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일종의 스님 수업을 쌓았다. 그리고 대학 3학년 때는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법대 불교학생회장을 맡아 회원들과 함께 유명사찰로 하계수련회를 다니는 등 열심히 활동했다. 육군에 입대해서 병영 생활을 할 때에도 부대 내 법당을 들락거렸다. 당시 법당은 행정고시 공부를 위한 치외법권지역이기도 했다.

병영 생활 중에 틈틈이 준비한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연애 중이던 아내와 80년 12월 26일 결혼식을 올릴 때도 나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던 아내가 나와 결혼한 자체가 주님의 큰 뜻이었다.


오랜 방황 뒤 교회서 평온 찾아 

행정고시 합격 후 내무부 수습,경남도지사 비서실장 등을 거친 후 86년 초 전혀 예기치 않게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게 됐다.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의 95%가 외국유학을 최고의 희망으로 삼고 있던 때라 나는 유학 대기자 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그런데 88년 초 갑자기 유학예정자였던 모 과장이 상공부로 복귀한 덕분에 유학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내가 영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것도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이라고 믿는다.

2년 동안 영국에서 견문을 넓히고 경제학과 정치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주일에는 영어도 배우고 영국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영미문화의 기저가 되고 있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모임에서 항상 “나는 불교신자입니다만…”이라는 서두를 빼놓지 않았다. 유학 온 한국 목사로부터 교회 개척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노튼씨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은 불교에 젖어있던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열어 주고 있었다. 그 사랑이 바로 나를 만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한국에서 술이나 마시고 편하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 되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를 수없이 되뇌던 유학생활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간부들은 외국 유학을 놀러 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총리실 복귀 후 승진에 큰 애로를 겪었다. 심지어는 후배가 승진하여 같은 방에서 근무하는,참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자꾸만 뒤 처지는 승진 서열 때문에 밤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중증 환자가 돼 버렸다. 승진 탈락 때에는 인사담당 간부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하기도 했다. 소위 말해 갈 데까지 다 간 형국이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 참선과 독경 등 여러 가지 시도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도무지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때 이런 내 심정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던 국무총리실 기독신우회 홍현선 사무관이 나를 인도하여 인근 종교교회로 인도했다. 100년 이상 된 고풍스런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듣게 된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들으며 평안을 맛보았다. “너희들은 세상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살까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다 알아서 먹여 주고 입혀 주신다”는 말이 귀에 들어 왔다. 마음속에 ‘승진이 1∼2년 늦어진다고 죽게 되나. 모두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하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겼다.
드디어 1990년 12월1일 자발적으로 우리 아파트 뒤에 있던 임마누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불교신자인 나와의 결혼을 못하게 막아 달라고 기도하셨다는 장모님이 환상 중에 내가 장로가 되는 꿈을 꾸시고 결혼을 허락하신 뒤 밤낮으로 간구한 기도가 10년만에 응답된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2월31일 종무식을 마친 뒤 국무총리께서 나의 서기관 승진 서류에 결재를 하셨다. ‘종무식을 마친 뒤 한 결재는 무효’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극적인 승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의 일그러진 마음을 그렇게도 빨리 치유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기도 응답까지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꼭 주일성수하겠다는 서원과 함께….


고향 김해위해 시장출마 결심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믿게 된 나는 친구들이 모두 주일에 골프나 테니스를 치러 나가고 술 마시는 비신자들이라서 주일성수가 무척 힘들었다. 기도하며 서원을 지키는 과정에서 친구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는 아픔도 겪었다. 그 후 함께 유학을 다녀온 아들딸과 함께 충현교회로 옮겨 청장년예배 구역모임 영어예배까지 참석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94년 6월 정부의 세계화 전문요원 양성프로그램에 선발돼 2년 동안 미국 워싱턴에 연수를 가게 되었다. 1차로 유학을 다녀온 과장과 국장급들을 대상으로 한 계획이어서 지원자가 많이 몰렸다. 나는 유학 다녀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갓 승진한 처지여서 불리한 여건이었지만 꼭 선발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이때 신앙을 제1순위, 영어를 제2순위, 컴퓨터를 제3순위로 올려 놓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서원한 대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워싱턴 중앙장로교회에 등록했다. 주일성수와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2년이 꼬박 걸리는 제자훈련과 전도폭발훈련 두 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나는 점점 하나님의 은혜의 강가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던 대로 미국 연수생활 동안 신앙을 가장 우선시하였다. 그리고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워싱턴 중앙장로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부탁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증했다. 나를 구원하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3000여명의 성도와 함께 나누었다.

96년 9월 귀국했으나 제대로 미국에서처럼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다. “신앙생활하기 어려운 한국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자가 정말 신실한 주님의 아들”이라는 재미동포 들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다행히 총리실 기독신우회의 홍현선 회장과 회원들이 내가 흔들리고 유혹받을 때마다 붙잡아 주었다. 97년 3월 청와대 의전행정관으로 발령 받았을 때는 청와대 주대준 기독신우회장이 나를 가장 기쁘게 맞아 주었다. 바쁜 업무 중에도 주위의 믿음의 동료들 때문에 기도와 성경공부에 아주 열심히 참석할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모두 신앙인으로서 청와대가 하나님 사랑으로 후끈 달아오른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신이 났다. 김해 복음화를 위한 내 서원을 지키기 위해 김해와 가까운 경남 문화관광국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창원한빛교회 윤희구 목사님을 비롯한 경남기독교협의회 구동태 감독님 등 많은 분들에게 신앙의 활력을 얻었다. 문화관광국장은 종교도 담당하기 때문에 경남극동방송이나 CBS를 적극 도울 수 있어 좋았다. 이윤구 인제대 총장님을 중심으로 한 경남 기독교 기관장 모임에도 적극 참석했다. 기독기관장이 지역 복음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감했다.

2000년 10월 창원에서 장유로 이사했다. 고향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이사한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로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김해에 내려올 때마다 주일예배를 드렸던 김해제일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 당시 담임목사님의 사임으로 교회가 어수선 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후암백합교회를 담임하시던 류종길 목사님께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셨다. 교회 분위기가 점차 안정되고 성도들의 얼굴에도 기쁨이 넘쳐흘렀다. 나는 고향을 위해 김해시장에 출마할 것을 목사님과 상의했다.


부모님 구원’ 사랑의 편지 결실이… 

내가 출마 의사를 밝히자 류종길 목사님은 김해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쓰실 것이라며 김해제일교회 당회와 김해시기독교연합회에 기도를 요청해주셨다. 그래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모든 성도는 김해복음화를 위해 나선 나를 적극 도와주었다.

그 때 받았던 사랑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특히 구상회 장로님과 지역 구석구석을 돌며 최철국을 알렸던 제일교회 성도들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민주당 후보로는 영남지역에서 역대 선거 사상 가장 높은 42.3%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국회에 입성한 주춧돌이 되었다.

선거에서 낙선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겪어 보지 않고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온실 속의 공무원이 폭풍우와 눈보라 휘몰아치는 광야로 내던져진 꼴이 되었다. 광야에서 시험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또 성령님이 내게 부어주시는 위로를 받으며 잘 견디어 나갔다.

선거 도중 밀양 청도에서 가진 전 성도수련회에 참석해 도전과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성경암송대회 참가하여 2등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어 가진 찬양시간에 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높이 든 두 손이 자꾸 이상한 힘에 의해 안쪽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꼭 누군가가 손으로 내 팔을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령께서 잡아 이끄신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는 선거 준비 기간에 연로하신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김해제일교회에 등록하시고 주일 저녁예배까지 참석하신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는 가족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우리 가족이 미국 연수를 떠나기 전 충현교회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때 부모님을 구원하기 위한 첫 단계로 기도하면서 정성껏 쓴 ‘사랑의 편지’를 매주 보내 드렸다. 부모님은 사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셨다.
할머니 제사 때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전도를 했다가 얼마나 큰 꾸중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런 아버님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그 기쁨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뿐.

미국 연수 중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이 심장병으로 부산 백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위독하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귀국 준비보다도 어떻게 어머님을 빨리 전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나를 오래 전부터 전도하기 위해 애쓰신 부산 부곡교회 김종후 (행정고시 시험 전날 처가에서 안수를 해주신 분) 목사님께 전화로 어머님의 구원을 위해 애써 주실 것을 부탁했다. 병환 중에서도 “구원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는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냐며 벌컥 화를 내시던 분이었다.

이렇게 완고하시고 불교에 평생을 몸담아 오신 어머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신 것이다. 권사이신 장모님께서 내게 “부모님이 예수 믿게 된 것은 최 서방이 김해시장 된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평가를 해주셨다. 예수 믿으면서 시작한 가족 구원 기도에 대해 꼭 10년만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거듭 감사 드렸다.


깨끗하고 성실한 ‘믿음의 정치인’ 소망 

부족한 나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름대로 감회가 깊다. 국무총리실에서 승진이 안돼 전전긍긍할 때 기독신우회장이 종교교회로 나를 인도,마음의 평안을 찾은 직후의 일이다. 서울대 불교총학생회장을 지낸 고교동기인 이홍성씨가 나를 찾아왔다. 대뜸 며칠 전 꿈에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는 기독교인이 되는 환상을 보았다면서 정근모 박사님이 쓴 ‘역경의 열매’를 선물로 주고 갔다. 물리학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이 너무나 감동적으로 쓰여 있었다. 곧바로 각 서점은 물론 국민일보사에 까지 전화해서 품절 직전이던 ‘역경의 열매’ 100여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서기관 승진 기념으로 연초에 주위 직장동료들에게 ‘역경의 열매’를 나눠 주며 전도까지 했다. 그 이후로도 국민일보를 구독하며 ‘역경의 열매’ 읽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13년이 지난 지금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신앙이 제대로 선 것 같지도 않은 내가 역경의 열매 주인공이 될 줄이야!

이 글을 통해 농사일로 바쁜 가운데에서도 주위 어린이들을 모아서 신앙의 씨를 뿌려 주신 농소교회 박석근 장로님께 감사 드린다. 행정고시 시험을 앞두고 예비 처가에서 만나 기독교는 ‘To do’가 아닌 ‘To be’의 종교라며 여유 있게 하나님을 소개해주시고 그 이후로도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부산 부곡교회 김종후 목사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미국 신앙 연수를 완벽하게 인도해주신 워싱턴 중앙장로교회의 이원상 목사님과 백순 장로님의 자상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신앙에 보탬이 되어주신 두 분 덕분에 신앙의 이론적 기초가 세워졌다. 미국의 지도자 훈련기관에서 훈련을 받고 귀국한 후 지도자 훈련 과정을 찾던 중 온누리교회에서 매년 8월에 개최하는 ‘비전과 지도력 축제’(VLC)를 소개받았다. 여름휴가를 내 2년이나 그 과정에 등록하여 ‘봉사하는 지도자상’(Servant Leadership)을 익혔다.

이에 대한 지방적 모형을 김해 와이즈맨(Y’s Men Club)에서 찾고 신앙에 기초한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훈련을 받았다. 다음달에는 동 클럽의 회장이 된다. 봉사하는 지도자를 발굴,육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고마운 분들은 김해제일교회 류종길 목사님을 비롯한 김해시 기독교연합회 목사님과 성도님들 그리고 김해기독실업인회 안흥원 회장님과 회원들,극동방송 CBS 관계자들이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항상 가까이에서 위로해주시고 중보기도로 힘을 북돋워 주신데 대해 진정으로 감사 드린다.

김종후 목사님의 말씀대로 기독교는 ‘To Be’의 종교임을 절감하고 있는 요즈음 하나님께서는 내가 정치한다고 바빠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까 봐 계속 곁에 붙잡아 주시고 계신다. 그분의 사랑과 성실하심에 감사 드린다.

제17대 기독국회의원 모임,김해제일교회 주일학교 예배 간증,김해 와이즈맨 클럽 회장,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등을 통해 당신의 자녀로 인(印)치시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느낀다. 믿음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처럼 국회의원직을 수행한 후 더욱 인기를 누리는 신실한 신앙인이 되고 싶다. 국회의원 자리를 하나의 신앙단계로 생각하고 ‘겸손하게 깨끗하게 성실하게’ 일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의 정치인이 되고 싶다.

정리 = 이태형 기자 [email protected]


◎ 최철국 의원 약력 = △ 51세. △ 경남 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 영국 옥스퍼드 대학원 경제학 석사, 영국 다럼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 행정고시 합격 (24회). △ 국무총리실 사정기획과장. △ 청와대 의전행정관. △ 새천년민주당 김해시장 후보. △ 김해발전연구소 소장. △ 17대 총선 당선 (열린우리당 경남 김해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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