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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연약한 나에게 큰 믿음을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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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주경렬 집사 (광주순복음교회)

할렐루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는 말씀처럼 겨자씨 같은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기를 10년 믿음은 성격에 따라 성장속도가 주어지는가 싶음에 내심 부끄럽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강한 믿음 갖기를 얼마나 열망하였는데, 하나님은 제가 지닌 성격 그대로 많지도 적지도 않은 분량대로 저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늘 은밀히 저의 곁에 계시는 주님을 이시간에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립니다.

제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3년, 고등학교 1년을 그냥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만 외우고 교회를 다니던 것이 신앙의 전부였습니다. 학교가 미션스쿨이어서 그냥 다녔던 것 같습니다.
또한번 전도를 받기도 하였지만 조금 다니다가, 그 후로 저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80년 결혼과 더불어 저는 아이 셋을 키우며 많은곳에 기웃거렸습니다.
제가 큰 풍파없이 사는것도 제가 잘나고 잘해서 잘사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교만을 꺽으시며 저를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89년 몹시 피곤하여 병원을 찾으니 급성으로 B형 간염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 병은 술 드시는 남자분들만 생기는 병으로 착각하고 저의 어리석음은 하나님께 저를 맡기지 못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이들 셋이 어리고 또한 학교도 보내야 하고 육신의 피곤함과 늘 마음가운데 간염이 가시가 되었습니다. 간염이 간경변이 되고 간경변이 간암이 된다는 의사의 말에 늘 마음이 편할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아파트에 교회에 다니는 구역장님을 따라 기도원에 갔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서도 부끄럽고 어색해서 아멘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구역장님의 전도로 광주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를 섬기는 시부모님과 남편사이에 어려움도 있었으나 겨자씨 같은 저의 믿음으로는 큰 충돌은 없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구역장 직분으로 믿음을 키우셨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는 횟수가 많아지자 남편의 불만이 컷습니다. 광신자가 되지 말라고 하거나, 가정에 불만이 있어 교회에서 만족을 얻으려 나간다는 등등의 말로 교회만 다녀오면 억지에 늘 냉전상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아이들에게도 교회생활은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남편과 다투는 것이 싫어 교회를 떠나 멀리 이사하기로 하고 먼거리에 있는 아파트 분양에 접수했습니다. 집이 멀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믿음없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의 계획을 아시고 가고자 하는 아파트는 추첨에서 떨어지게 하시고 교회에 더 가까운 곳으로 집을 구입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은혜의 섭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가 많은 양의 피를 쏟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냥 꿈이라 생각하고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몇일이 지난후 속이 답답하고 매우 불편하여 병원을 찾아갔더니 B형 간염이 있었는데, 지금은 깨끗이 나아서 항체가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운동 부족으로 콜레스테롤이 조금 있다고 하며 약만 주셨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10여년을 등에 지고 다닌 물건을 내려놓는 듯 했습니다.

주님은 늘 제안에 계셨습니다.
저의 마음과 계획을 다 지켜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았습니다. 그후, 또 남편이 서울로 발령을 받아 주말 부부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무조건 기도했습니다. 광주에는 보직이 없었지만 그래도 다시 광주로 발령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대전으로 발령을 받았었고, 특별한 일로 스웨덴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일을 마치고 광주에 오니 남편의 직책이 불투명하여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다른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남편 사업장이 분리되어서 하나의 작은 사업체가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보직을 맡아 3년간 일을 했습니다. 그때 회사가 부도위기에 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남편도 갈등하고 저는 직원이 수천명인 큰 회사가 설마 부도가 날까? 했습니다.
남편도 많은 생각중에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면서도, 19년을 다닌 회사를 금방 사표를 낼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농촌 실업학교에서 기계과 선생님을 모집한다는 추천이 들어왔습니다. 마침 남편의 고향집 근처라 조건은 좋았습니다. 19년의 아쉬움이 금방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얼마를 생각한 끝에 98년 3월초 신학기부터 학교에 출근을 했습니다. 나이 45세에 학교 선생님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 이듬해 회사는 정말 부도가 나서 많은 직원이 회사를 떠났지만, 남편은 늘 예비하시고 채우시는 하나님 은혜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통해 오늘도 우리 가정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실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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