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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랑, 그 찬란한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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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찬란한 열매 

- 도원욱 목사(서울 한성교회)
 

짧지 않은 목회기간 많은 사람과 다양한 일을 겪었다. 생긴 모습이 각양각색이듯 고민도 하나같이 다르고 해결책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적인 답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살면 살수록, 목회를 하면 할수록 삶의 궁극적 원인과 답은 여전히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수나 있었겠는가. 그 사랑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으로 정점을 이뤘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중심을 바꾸셨기에 가능했다. 사랑은 중심을 바꾸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중심을 나 중심에서 상대방 중심으로 옮겨 그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베푸는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은 당신이 사랑하는 독생자의 성육신(incarnation)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 절대 도달할 수 없음을 아시고 결단하신 눈높이 사랑이신 것이다. 

여자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 중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일명 ‘남편 성토대회’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 집사님은 ‘연애 시절부터 지금껏 살면서 나름대로 사랑이란 것을 받고는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랑에 만족한 순간은 손에 꼽는다고 한다. 커피 마시고 싶지 않은 날엔 커피를 사와서 마시라고 강요(?)하고, 쉬고 싶은 날 외출하자고 하는 등 단 한 번도 본인이 원하는 선물이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받는 것이 감사하지 않냐’는 말에 그 집사님은 딱 잘라 말했다. “사랑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아닌가요?”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일방통행의 사랑만 베푼 건 아니었는지 잠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혹시 가족들과 성도들에게 말과 혀로만 하는 값싼 사랑을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다면 그 경솔함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까지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요일 3:18)을 십자가를 통해 몸소 보이셨다. 또한 그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명하셨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 얼굴도 모르는 한 고아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기가 오히려 매일같이 이불을 덮고 마주하는 남편, 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조지 바이런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매일 보내는 것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죽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다. 참 의미심장한 말 아닌가. 막연한 사랑을 중언부언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그 사랑을 상대방이 느낄 수 있도록 성육신하는 구체적인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신 예수님을 우리가 알게 됐듯이, 상대방이 사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시급하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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