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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재훈 <17·끝> 12년째 매년 100일 오지 생활… 오늘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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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13세 소녀가 많이 아파서 1000아리(약 350원)를 갖고 혼자 7㎞를 걸어왔다. 검사를 해보니 말라리아에 감염됐다. ‘이런 몸으로 먼 길을 홀로 왔다니.’ 수액 주사와 약을 처방하려 했더니 혼자 침대에서 주사를 맞는 게 겁이 났는지 도망가려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주사를 처방했다.

우리 막내가 말라리아를 앓을 때 옆에서 간호한 적이 있다. 아프고 힘들어서 엉엉 우는 아이를 힘들게 지켜보았었다. 이 소녀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화장실 가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을 텐데 도움을 받으려 수 ㎞를 혼자 걸어왔다. 도착해서도 뜨거운 햇볕을 얇은 천 조각 하나로 막으며 진료 순서가 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 부디 잘 낫고 다시는 아프지 말기를….

이동진료가 끝나갈 때쯤 해가 지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허허벌판에 서서 오랜만에 아내와 통화를 했다. 우리 팀원들의 모습을 본다. 결혼한 간호사 세 명이 공교롭게 아들이 하나씩이다. 진료를 하면서 틈틈이 휴대폰에 저장된 아들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들은 거의 일 년에 100일 정도를 오지에서 보낸다. 환자들이 몰려들 때는 잠시 앉아서 쉴 틈도 없다.

환자로 온 아이를 안아주거나 자기 간식을 나눠 주며 아이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잠시 내려놓기도 한다. 가끔 좋은 음식을 먹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반찬 한두 가지가 올려진 초라한 상차림을 대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도, 샤워 한 번을 하는 데도 불편함이 따를 텐데 지금껏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봉사하러 온 여교수의 화장품을 조금 빌려 쓰고 수줍어하며 예뻐진 자신들을 서로 보며 즐거워한다. 이들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네팔에서 지진이 났을 때 긴급구호팀으로 참가신청을 하려고 했다. 팀원들과 열심히 구호현장을 누빌 생각에 심장이 두근댔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네팔 정부에서 마다가스카르에서 오는 구호팀을 단호하게 사양했었다. 마다가스카르 전국 오지를 다니며 말라리아, 결핵, 한센병, 페스트 의심 환자를 만나면서 의료인을 위한 보호 장비를 국제보건기구에 요청했을 때도 우린 거절당해야만 했다. 사적인 단체라는 게 이유였다. 이런데도 우리는 왜 12년째 이런 일을 계속하는가.

처음 방문한 어느 마을에서 한 여인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마을 사람인줄 알고 인사를 했더니 “닥터 리, 마나호아나(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한다. 이 마을에도 우리 소문이 났는가 생각하는데 1년 전 아누시아리부 지역에 이동진료를 갔을 때 응급 제왕절개수술을 받은 적이 있단다.

“인사해 조시타. 이 분이 널 세상에 오게 도와준 사람이야.”

당시엔 내 눈앞에서 사경을 헤매던 여인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려 70㎞나 되는 거리를 아이를 업고 왔단다.

오늘도 나는 수백 ㎞를 달려야 하는 오지 마을로 떠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때마다 국제구호단체 웰인터내셔널의 명노철 이사장님께서 9년 전 베루루아에서 활동하던 당시 하신 말씀을 떠올린다.

“녹슬어 버려지지 말고 닳아서 없어지는 삶을 살자.”

언젠가 닳아서 못쓸 날이 오겠지. 그동안 열심히 몸뚱이를 쓰자. 썩어 없어질 것을 심었는데 신령한 것을 거둔다면 이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 있으랴. 그것이 곧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리라.

정리=최기영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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