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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2> “태중에 하나님께 바쳤다”… 진보·보수 두 신앙의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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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 근처 둑에서 강 건너 보이는 마포 나루터와 여의도, 밤섬에서 뛰어 놀았다. 지금도 눈 감으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인천에서 마포까지 새우젓을 나르던 황포돛대배가 떠오른다.

부모님은 모두 이북 출신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가난한 어민의 아들이었다. 황해도 송화가 고향인 어머니는 대지주의 딸이었다. 신분 차이가 컸지만 인물이 준수하고 행동거지가 발랐던 아버지는 부잣집으로 팔려가다시피 장가를 드셨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두 분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6·25전쟁이다. 외가의 상당수가 공산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살아남은 외삼촌은 아오지로 유배를 갔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반공투사가 되셨다. 민간인 유격부대에 입대해 지휘관이 되면서 상륙함정(LST)으로 피난민을 나르는 임무를 감당하셨다. 특전사 전신인 8240부대 독립대대의 대대장으로 오늘의 북방한계선(NLL)이 있게 한 진짜 군인이셨다. 휴전 이후 60년 만에 그 활약이 드러나 화랑무공 훈장을 받으셨다. 대신 훈장을 받은 어머니는 그 훈장을 특전사에 기증하셨다.

6·25 전부터 예수를 영접한 어머니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의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었다. 주일성수를 하는 것은 물론 항상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셨다. 아버지는 달랐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모순이다. 하나님은 산에도 들에도 계시다”며 주일에도 낚싯대를 메고 훌쩍 집을 나서곤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자유로운 신앙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 바쳤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손을 잡고 부흥회에 자주 갔던 기억이 난다. 큰 천막 안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꼭 강대상 바로 앞에 자리를 잡으셨다. 목사님을 코앞에서 보는 그 자리가 일등석이라며 말이다. 부흥회는 종종 자정 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어머니 눈에는 주일에 밖에 나가 자연에서 예배를 드리시는 아버지가 ‘나이롱 신자’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고 ‘꼴통보수 신자’라고 부르셨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주장한 아버지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회에서 성탄절 성극 연습을 하던 중 나와 같이 동방박사 역을 맡았던 친구가 예배당을 뛰쳐나간 일이 있다. 성탄절이 다가왔음에도 무대의상을 준비하지 못해서 배역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자 부끄럽고 속상했던 것이다. 겉옷 한 벌로 겨울을 나던 집이 많았던 시기라 성극을 위한 의상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전하자 아버지는 말없이 나갔다 오셨다. 양손에는 그 친구가 입을 새 옷과 모자, 동방박사 역할을 맡은 세 사람이 걸칠 무대의상 등이 들려있었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나눈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진보와 보수 신앙을 가진 두 분의 합작품이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믿음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앞에 더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생각해보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물 한잔이다. 그러나 물을 어떤 그릇에 담을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정작 마실 물을 담지 못한다면, 그래서 결국 갈급한 이에게 물 한잔도 내어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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