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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4> “아버지 없는 천당엔 나도 안 가요” 교회 발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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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내가 중3 때 돌아가셨다. 병을 오래 앓으신 것도 아니고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나는 과외 열풍에 시달린 세대다. 명문 중학교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4∼6학년 때 혹독하게 과외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6학년 때 중학교 입학전형이 무시험 추첨제로 바뀌었다. 경기중학교를 목표로 공부하던 나는 추첨으로 집과 가까운 선린중학교에 배정받았다. 고등학교만큼은 명문학교로 가기위해 다시 3년 내내 과외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셨던 아버지를 잃었다는 생각에 엄청나게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너무도 그리워서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 산소에 갔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쫓아오셔서 말리셨다. “일도야,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네가 이럼 쓰니”라는 말에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보시며 말하셨다. “이놈아 내가 그걸 알면 남산 밑에 돗자리 깔고 오가는 사람들 갈 길이나 봐주지. 모르니까 분필가루 마시면서 너한테 수학을 가르치잖니. 정신 차리고 얼른 학교 가자.” 그러나 나는 학교 가기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통곡하시며 내게 말하셨다. “나는 네게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구나. 그리고 남편 복 없는 여자는 자식 복도 없다는 소리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아.” 어머닌 매우 무섭게 변하셨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야단을 맞을 때마다 울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벌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 심한 방황으로 인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 죄송할 따름이다.

방황하던 나는 툭하면 집을 나갔다. 전국에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방황하는 비행청소년이었던 셈이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있는데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찾아온 여전도사님이 날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일도야, 어려운 때일수록 더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학교도 잘 다녀야지. 교회는 왜 안 나오니.” 나는 앞서 담임선생님께 드렸던 질문을 똑같이 했다. “저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죠.” 그 여전도사님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디에 있긴, 지옥에 갔지.”

참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왜 지옥에 갑니까.” 그러자 그 여전도사님은 “주일에 예배당에 안 나오고 허구한 날 낚시나 다니며 어머니의 신앙생활에도 반대했으니 지옥에 가는 게 당연하지. 너도 지옥에 안 가려면 주일성수하고 예배당 열심히 나와야 해.”

대답을 듣자 허탈함과 분노가 몰려왔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전도사님이나 천당 아랫목에서 영원히 사십시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지옥가면 나도 지옥갈래요. 아버지 없는 그런 천당에 저는 안 갈랍니다.” 그 이후 난 6년간 교회와의 연을 끊었다.

빈민선교를 한다고 청량리 뒷골목에 들어선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윤락여성이나 깡패들이 아니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 그것도 열심히 믿는다는 이들에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았다. 주일성수도 하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지만 간혹 주일 성수를 못해도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분들, 오히려 그런 분들이 매주 교회에 다니지만 미움과 시기, 질투 속에서 사는 이들보다 훨씬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인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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