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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5> “훌륭한 목사님 돼라 했건만 어째 거지들 밥만 먹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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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오로지 기도와 전도에 목숨을 건 분이셨다. 오직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보수적 신앙의 아름다움을 물려주셨다.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공언한 아들이 아버지 별세 이후 교회에 나가지 않고 방황하는 모습에 많이 놀라고 눈물도 흘리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많은 고뇌와 시련, 역경을 겪고 난 이후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고 목사가 됐을 때 어머니께서 느끼신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청량리 뒷골목에 들어가자 “목회하는데 그것이 좋은 경험이 될 거야”라며 1년이 될 때까지는 늘 기도만 하셨다. 그러다 2년이 지나니까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이러다가 덩말이디 아주 청량리 골목사람이 되갔어. 자네 왜 이러나. 목회를 하시게. 이러려고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나. 자네처럼 콩나물 씻고 행려자들 밥해주고 리어카 끌고 다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훌륭한 목사님 되라고 태중에서부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왔건만 어쩌자고 거지들 밥만 해먹이는 거야.”

3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비판하셨다. “친어머니 하나 봉양 못하면서 무슨 무의탁 노인을 섬긴다고 하나. 자네가 나한테 3년 동안 용돈 한번 줘봤나. 내 아들이 떳떳하게 벌어주는 돈으로 헌금도 하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다고. 아니 그래 마누라 노동력을 팔아서 밥을 먹고 아이들 교육을 시키냐고. 이게 목회냐.” 할 말이 없었다.

당시 내게 부임을 요청한 규모 있는 교회들이 여럿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알고 계셨다. “그렇게 기성 교회들이 못마땅하면 개척교회를 하라우. 내가 심방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일년 안에 100명은 책임지고 모을 테니까니.”

평생 기도하고 전도하며 전도사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셨던 어머니였기에 하신 말씀이다. 그래도 내가 말을 안 들으니 어머니는 가방을 싸들고 아예 누님 댁으로 가버리셨다. ‘아들 된 도리로 이럴 순 없다’는 자책과 고뇌가 종일 머리에 남는 시기였다. 고독함과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그때 포기했다면 오늘의 다일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1년 반 만에 돌아오셨다. 어느 날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계신 어머니를 발견했다. 웬일이시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아, 자네가 하는 일은 정말이지 예수님이 기뻐하는 목회야. 거럼” 하시며 한없이 눈물을 쏟으셨다.

누님 댁에 머무셨을 때 누님이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어머니께 전도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그래서 목사님과 교인들 집 이곳저곳을 심방 다니셨다고 한다. 집집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 내오는데, 그 음식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으셨다고 했다. ‘내 아들은 뭐가 못나서 지금도 노숙인들과 라면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통곡을 여러 번 하셨단다.

기도를 하시며 왜 당신의 아들이 사창가에서 사서 고생을 하는지 하나님께 울며 물어보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네 아들이 하는 일도 내가 기뻐하고 원하는 일이란다’ 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시다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심방 다니는 일도 기쁘지만 죽어가는 한 사람 살리자고 설거지하는 일이 더 기쁘구만 그래. 아주 귀한 목회야 거럼.”

그날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뻤다. 나의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신 주님과 낳아서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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