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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돋을새김-배병우] 이제민 교수의 ‘외환위기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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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는 어느 면으로 보나 한국현대사의 분기점이었다. 성장률 국민소득 고용률 등 거시경제지표는 물론 인구 건강 노동 등 각종 사회지표도 위기 전과 후로 뚜렷이 구분된다. 한국이 직면한 최대 난제인 비정규직 문제와 출산율 급락의 발원지도 외환위기였다. 거대한 국난이 일어난 지 올해로 20년이 됐다. 하지만 위기 20주년을 맞아 진행된 우리 사회의 토론 수준은 매우 낮았다.

단적인 예가 한 매체에 실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 인터뷰다. “외환위기는 한국에 축복”이라고 했던 그는 인터뷰에서 “노동 유연성을 높이는 등 개혁을 하지 않으면 한국이 10년 내 또 금융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캉드쉬가 이러한 경고를 할 자격이 있는지 우선 따져봐야 한다. IMF는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정리해고와 고금리 등을 강요한 초긴축 정책이 지나친 처방이었다는 반성문을 이미 공개적으로 썼다. 모든 것을 제쳐놓더라도 이 인터뷰는 한국민의 희생에 대해 사과할 의사가 있는지 캉드쉬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했어야 했다.

이처럼 위기 촉발자가 누군지, 피해자가 누군지도 헷갈리게 된 데는 학계와 정부 책임이 크다. 위기가 발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원인에 대해서조차 학계의 정설, 합의가 없다. 거시경제학과 노동, 금융 분야의 의견이 다르고 주류 경제학과 여타 사회과학 분야의 입장이 다르다. 위기의 원인에 대해 의견이 갈리니 위기의 결과와 이후 개혁의 성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국회를 포함한 정부가 ‘외환위기 백서’를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당시 정책담당자의 회고록 몇 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출간된 ‘외환위기와 그 후의 한국경제’는 주목해야 할 저작이다. 저자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경제발전론과 한국경제론에 오랫동안 천착해 온 학계 원로다. 외환위기 원인과 관련해 그간 ‘국내 경제구조’와 ‘단기자본 이동’이라는 주장이 맞서왔다. 이 교수는 당시 경제상황에 대한 촘촘한 자료 검증과 분석을 통해 재벌의 유동성 위기로 발생한 경제 혼란은 국내 금융위기로 끝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국내 금융위기가 외환위기로 비화된 데는 ‘월가-미국 재무부-IMF’라는 복합체의 의도가 절대적이었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국들의 외환위기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1000억 달러의 기금을 조건 없이 한국 등에 지원하려고 했다. 이를 강경하게 저지한 것이 바로 미국 재무부였다.

결국 한국은 IMF로 갈 수밖에 없었다. IMF가 자본시장 전면 개방과 경제구조 개혁을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붙인 데는 유동성 위기를 이용하려는 미국의 일방적 ‘의지’가 작용했다는 다양한 증언과 연구 결과가 제시된다. 이 교수는 ‘미국의 금융’이 일으키고 부담은 ‘한국의 노동’이 져야 했다는 게 외환위기의 적확한 성격이라고 결론 내린다.

어쩌면 위기의 결과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평가가 이 책의 백미일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성립한 체제는 과거 체제에 비해 성장률이 떨어지지만 위험이 줄어든 ‘저성장-저위험 체제’가 아니라, 성장률이 떨어지면서 위험도 오히려 증가한 ‘저성장-고위험 체제’일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월가가 획득한 이득이 최소 1조 달러이며, 위기 당시와 이후의 자산 투매 등 우리의 국부유출 규모가 38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 교수가 주류경제학의 구체적 분석을 사용해 이러한 결론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폄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캉드쉬는 미 재무부와 월가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테크노크라트였을 뿐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우리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로런스 서머스 당시 미 재무부 차관, 스탠리 피셔 전 IMF 수석부총재, 뼛속까지 월스트리트맨 로버트 루빈 전 재무부장관 등일 것이다.

배병우 편집국 부국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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