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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니아 연대기3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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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3을 보고

- 김선일 교수 (웨스터민스터신학대 교수)





오 아름다워라, 나니아의 세계!

평균 2년 반이다. 나니아 연대기 1, 2, 3편 사이의 간격 말이다. 그 동안 5월이나 12월이 되면 검색창에 ‘새벽출정호의 항해’를 입력해봤는데, 결국 딱 2년 반만에 3편이 나왔다. 중간에 나니아 연대기 다음 편이 언제 개봉되는지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려본 게 몇 번이던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집착적 관심이 있다. 그래서 개봉되는 첫날 아니면 시사회를 가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번에도 시사회 일정을 확인한 뒤 두 딸을 설득해서 함께 보고 왔다.

내가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판타지 동화인 나니아 연대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두 작품의 내용이 전개되는 무대 아래 은은하게 흐르는 기독교 내러티브 때문이다. 아직 교회에 안 다니는 이들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아이들과도 성경과 신앙에 관해서 직설적으로 말할 경우 내 직업 근성상 '설교스러운' 분위기를 피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 두 판타지 작품들은 무엇보다 소설이든, 영화든 부담 없이 권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신앙의 본론을 말하기에 앞선 준비작업으로 안성마춤이라는 말이다. ‘새벽출정호의 항해’에서는 ‘여정’이라는 틀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고 간다. 바다와 배 한 척이 그려진 그림을 보던 루시와 에드먼드, 그리고 그들의 사촌인 유스테스는 그 그림 속 세상(나니아)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왕이 된 캐스피언(나니아연대기 2편의 중심인물)이 지휘하는 새벽 출정호를 타고 함께 먼 바다로의 여행을 떠난다. 캐스피언 왕은 그의 직전 악한 통치자였던 삼촌 미라즈가 쫓아낸 부왕의 일곱 신하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마법에 묶인 신하들과 섬나라 백성들을 풀어주기 위한 의로운 싸움이 이 여정에 곁들여진다.

그런데 이 여정의 진짜 목적은 항해가 계속되면서 점점 떠오른다. 그것은 내면으로의 여정이었다. 예쁘고 성숙한 언니 수잔의 얼굴을 부러워하던 루시는 아슬란의 조언으로 존재감을 되찾고, 늘 불평만 일삼던 밉상 유스테스는 마법으로 용이 되어 괴물같이 흉측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다. 사실, 새벽출정호의 성공적인 항해를 위해서 싸워야 할 진정한 적은 바다뱀과 같은 괴물이 아니라, 모두의 내면에 있는 어둠이었다. 그 어둠은 두려움과 욕망, 열등감 등이다. 그래서 새벽출정호의 항해는 바로 내면세계로 떠나는 여정인 것이다. 여정은 다른 말로 순례라고 부른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삶을 순례의 길로 본다. 모든 그리스도인, 아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은 ‘본향을 찾는 순례자들’(히브리서 11:13-14)이다. 영화는 그 본향이 어디인지를 가리켜준다. 흥미롭게도 그 본향에 대한 갈망은 용맹한 생쥐 대장 리피치프경이 줄곧 노래로 표현하였다. 동쪽 바다 끝, 하늘과 파도가 만나는 곳, 바로 위대한 사자 아슬란의 나라다. 인생 여정의 본향, 오늘 우리의 너덜너덜한 삶도 바로 그 본향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음을 이 영화는 암시한다. 모험과 갈등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함께 하는 여정이라는 개념은 이 시대에 기독교 신앙이 소통될 수 있는 유력한 매개체가 아닌가.

둘째로, 나니아 연대기를 보면서 나는 몇몇 스치는 장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이를 천국의 심미안이 자극받았다고 한다면 너무 과분한 표현일까? 2차 유럽대전 당시 런던의 한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 소년 소녀들이 나니아의 세계에 빨려들어가서는 순식간에 왕과 여왕이라는 존귀한 신분으로 변모한다. 실제로 그들은 탁월한 리더십과 분별력을 발휘하며 나니아 왕국의 해결사 역할을 한다. 그 역량은 오직 아슬란을 기억하며 그와 접속됨으로 가능해진다.

운치 없이 해석을 덧붙이자면, 나니아는 내면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 너머를 느끼고 바라보는 영혼의 삶이다. 이 나니아의 통치자 아슬란은 그를 대신해서 주인공들을 왕과 여왕으로 삼는다. 바로 왕 같은 제사장 된 그리스도인의 영화로운 신분 변화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풀어주는 대목이다. 단순히 인물뿐이 아니라, 이야기 내내 아슬란의 임재를 따뜻하고 아름다운 감성 코드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나니아 연대기 전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백미다.

예를 들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별안간 느끼는 경외심과 행복감이라든가, 아슬란의 나라에 가까워오면서 등장하는 우아한 꽃잎들로 수놓인 은빛 바다 등은 하나님의 임재와 천국에 대한 서정적 아우라를 풍겨준다. 하지만 신앙을 비현실적 낭만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영화 마지막의 헤어지는 장면에서 아슬란은 이런 말을 한다. “여기서 나를 조금 알면 그곳(현실세계)에서는 나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페벤시가의 아이들은 나니아의 아름다운 경험을 안고 현실로 순간 이동한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영화 초반 생쥐 대장 리피치프의 대사 한 마디가 실마리가 된다. “믿음이 없다면 삶은 의미가 없어요.”

돌아오는 길에서 아이들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의 딸들이라 그런지 영화가 매우 기독교적임을 진작에 간파했단다. 그러면서 질문과 대답이 이어졌다. 아슬란은 누구를 상징해요? 나니아는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나니아가 천국이에요? 나니아는 나중에 어떻게 돼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줄거리를 아무 강요 없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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