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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최일도 <13> 인생을 바꿔놓은 청량리역 노인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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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졸업학기 중인 1988년 11월 11일, 휴강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며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틈만 나면 어디론가 휑하니 다녀오던 방랑벽이 또 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역 광장을 지나고 있는데 대여섯 걸음 앞서 걷고 있던 한 노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를 돕다가 기차를 놓칠까 걱정됐고 다른 누군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다.

춘천에 도착해서 호숫가를 거닐거나 커피숍에서 시를 쓰며 한나절을 보냈다. 일주일 후 모교 채플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역광장을 가로 질러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침에 봤던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온몸을 오그린 채 광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분노였다. 동시에 ‘나는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신대원 졸업 후 독일유학을 다녀와 영성수련센터와 산속에 전원교회를 세우겠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끝낸 터였다. 쓰러진 그 노인을 돌보는 건 내 삶의 계획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신앙 양심은 남아 있어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어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하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서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뒤돌아서서 다시 할아버지를 봤다. 그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먹지 못했다 일도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바닥에 눕혀 놓을 셈이냐.” 주님의 음성이 죽어가는 양심을 찌르는 듯했다.

강도 만난 자를 스쳐 지나간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노인을 일으켜 근처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노인을 의자에 앉힌 후 설렁탕을 시켰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고 사지를 주물렀다. 그는 나흘간 아무것도 못 먹었고,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며, 고물상에 박스 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노인과 헤어지고 그를 수용시설에라도 모셔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행려자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에게 설렁탕을 사드렸다. 그들은 청량리 수산시장과 야채시장의 쓰레기더미에서, 경동시장의 한약방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고 역시 끼니 거르는 것은 일상이라 했다.

‘아직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나는 내 가족만 알고 살아 왔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씩 그분들을 만나러 청량리로 갔고 용돈은 날개 달린 듯 날아갔다. 턱없는 지출은 가계에 타격을 줬다. 아내는 혹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됐다. 오해를 풀기 위해 하루는 아내와 함께 청량리역 근처 설렁탕집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와 여덟 명의 행려자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밥값을 치르고 나오자 아내는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질 못했다.

이후 아내는 나를 말렸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일명 ‘대책없음’이라고. 고민 끝에 단안을 내리며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청량리역 가까운 곳에 교회와 다일공동체를 반드시 세워야겠다고. 독일유학과 전원 공동체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정리=이사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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