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일가 김용기의 생애 - 이만열 교수

첨부 1


일가 김용기의 생애

 

이 만열(숙명여대 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1. 머리말

 

一家 金容基(1912~1988)는 거의 80 평생을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촌을 섬기고 농민을 계몽한 선각자요 농촌운동가다. 그는 단순히 농사에 파묻혀 부지런히 농사만 지었던 분이 아니고,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농본사상을 근대적으로 해석하여 새롭게 실천한 운동가요 지도자였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그의 농업에 대한 사상과 실천력이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다.

 

김용기는 저술가로 자처한 적은 없지만, 체험을 통해 축적된 지식을 글로 엮어 많은 저술을 남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는 연구자들의 관심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농촌생활 개선을 위한 갖가지 생각과 방안들은 체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터득할 수 없는 산 교훈들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는 근현대의 가장 저명한 實事求是적인 인물로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다고 본다.

 

그에 대한 연구가 여러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그를 우리나라 농민운동사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언듯 보면 그의 생애가 종래의 농민운동가가 취했던 방식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방면에서는 그의 행적인 잘 드러나지 않아 농민운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 의아스럽게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김용기 선생이야말로 우리 나라 근,현대농민운동사에서 새로운 방식의 농민운동을 주도한 인물로서 가장 뚜렷이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를 우리는 다음에서 천천히 풀어갈 것이다.

 

2. 출생과 성장

 

김용기는 京畿道 楊州郡 瓦阜面 陵內里의 禮峰山을 뒤로 한 奉安 마을에서, 논 15두락, 밭 2천8백평의 중농인 안동 김씨 金春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동네의 서당에 들어가 13세까지 明心寶鑑, 通鑑, 小學 등을 공부하면서 頭用直 手用恭 足用重의 교훈을 깊이 새기며 자라났다. 그의 부친은 넷째 아들 용기가 병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 전도인으로부터 받은 전도문서 중 요 3:16절의 말씀에 감동, 그것을 유교식의 順天者興 逆天者亡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양반 가문에서는 드물게 예수교인이 되었다.

 

교회사에 의하면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선교사들의 전도가 시작되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1895년에 이웃하고 있는 廣州郡에서는 新垈里교회가 성립되었고 1901년에는 광주 東幕교회와 新沙里교회가 각각 설립되었으며, 1902년에는 양주군 와부면 松村里의 龍津에서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 長老敎의 4선교부가 협력하여 大韓예수교長老會 獨老會를 조직하고 전국의 선교지역을 재정비하였다. 이 무렵부터 양주군에는 주로 郭安連(C.A.Clark)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08년에는 양주군 芝沙里 교회의 예배당을 건립하고 烽火峴 교회는 미 감리회에서 장로교회로 移屬되었다. 1911년에는 양주군 봉안리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같은 면(와부면)의 송촌리 교회 교인들이 열심히 전도한 결과였다.

 

서당의 학업을 마친 1년 후, 14세 때에 김용기는 양주에 있는 廣東中學校에 입학하여 성경, 산술, 지리, 역사를 배웠고, 여기서 참다운 지도력에 대한 훈련을 쌓게 되었다. 이 학교는 일찍 기독교인이 되어 개화에 눈뜨게 되었던 이 지역 출신의 夢陽 呂運亨이 설립한 학교였다. 그가 이 곳에서 여운형을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해방 직전에 김용기가 몽양을 봉안 마을로 모셔왔고 해방 후에 정치운동에 일정하게 관여한 것도 이 때의 몽양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일찍부터 민족애를 갖게 된 것도 몽양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김용기가 광동학교 입학에 앞서 8살 때 그는 3 1운동을 맞았다. 그는 아버지가 마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이웃마을 사람들과 3, 4 백명이 德沼까지 가는 것을 보았고 태극기의 물결을 보면서 조국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국사를 배웠고 광동학교에서는 특히 조원택 선생으로부터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는 교육을 받게 되었다. 서당교육과 광동학교 교육, 아버지의 신앙, 전통교육과 스승들의 민족, 근대 교육, 이러한 교육으로 그는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사유에 근거한 민족주의 의식과 합리적인 생활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19세때에 광동중학을 졸업한 그는, 당시 그 나이의 젊은이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뜻을 갖고, 중국의 동북지역(만주)으로 갔다. 그러나 심양(봉천) 西塔교회의 李成洛 목사의 종용으로 귀향하였고, 자신과 민족의 앞날을 나름대로 설계하려고 성경 탐독하면서, 檀君과 世宗大王의 유적이 있다는 강화도 마니(마리)산으로 가서 40일간 기도에 몸을 던진 적도 있었다. 그가 마리산을 찾은 것은 아마도 '마리산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함인 듯하다. 1915년부터 해마다 열린 평신도 중심의 '마리산 부흥회'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신앙적 체험을 강조"하는 한편 "민족의 국조신앙의 근원지인 참성단에 올라 기도"하는 것을 통해 '민족주의 신앙'을 배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기가 광동학교를 졸업했을 무렵, 그는 김봉희와 결혼하였다. 그는 결혼한 후에 보통학교 밖에 나오지 않은 아내를 서울의 성경학교에 보내어 공부하게 하였다. 23세 되던 해에 그는 신앙과 생활의 지도자였던 아버지를 여의게 되었다. 그의 부친의 연세가 58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창세기 3장 16절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농사군이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식인일수록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사야말로 산업의 원동력인데, 역대로 지식인들이 농사를 기피하고 무식한 村氓들만 이 농사일을 해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제 문명 등이 후진성을 불면케 되어 결국 日人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려면 먼저 경제자립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곧 지식인이 농사에 참여하여 농산물을 증산하는 길밖에 없다."

 

그가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농사군'으로 지낸 것은 바로 아버지의 이같은 유언이 큰 동기가 되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버지의 유언은 또 농사에 대해 정립하지 못한 자신의 사상을 확립시켜 주었다. 즉 세상 사람들은 농사가, 이윤이 적다느니, 힘이 들어 못할 것이라느니, 희망없는 직업이라느니 하고, 농사군은 천대받는다느니 우매해진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이러한 생각을 편견에 불과한 것이고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러한 농사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된 데에도 아버지의 유언이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마디로 농사만큼 이융이 남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무엇보다 이윤이 많은 것이 농사일이었다. 벼농사만 해도, 봄에 볍씨를 뿌려 6개월만 잘 가꾸면 볍씨 한 낟알 당 1,200~1,800 낟알이 된다. 조는 7,000~8,000 낟알이 되고, 참깨는 4,000~5,000 낟알이 된다. 채소 역시 호박씨 한 알에 애호박 300개와 3관짜리 늙은 호박 12개를 딸 수가 있고, 수박은 4개월 동안에 한 알 당 1관짜리 7개를 딸 수 가 있고, 참외는 12~14개의 수확을 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물론 종자개량, 토질개량, 영농방법의 개선 등 기술과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물론 농업에 대한 그의 철학이 아버지의 유언에 의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러한 철학의 바탕에는, 효도를 강조했던 그의 신념과 함께, 아버지의 유언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3. 奉安 理想村

 

김용기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농사짓기에 나선 지 2년만에 동네의 두레패에서 副領座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되었다. 아마도 당시 그 동네에서는 농사일과 경조사를 위해 두레 조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광동학교에서 쌓은 지도자적인 훈련과 두레패에서 얻은 신망을 기초로 하여 농촌을 지상낙원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가 꿈꾸었던 이상촌은 10가를 중심으로 이루는 촌락으로서 계획 단계에서 24,000평의 토지와 5천원의 자금이 소요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이 자금과 토지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2백원의 자금으로 중앙선 철로 공사판 옆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2년간 장사하여 3천5백원의 거금을 벌었으나, 목표액 5천원에 미달하였으므로 어떻게든 목표액을 벌기 위해 금광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년 반만에 그가 번 모든 돈은 모두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 때 그는 돈을 잃은 대신 평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잃은 돈보다도 더 값진 것으로서, 첫째 신성한 낙원건설은 욕심 많은 투기로써 하려던 당초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둘째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은 돈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피와 땀으로써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는 공동적인 이상촌 건설에 앞서 자신이 먼저 개간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는 광주 小城의 돈놀이하는 사람을 찾아가 담보 없이 4백원을 빌렸다. 그의 확신과 용기가 대금업자를 설득시킨 것이다. 빌린 돈에서 90원으로 마을 너머의 평당 3전하는 산 3천평을 사서 개간을 시작하였다. 그는 과목을 심고 젖염소 한 마리를 사서 키우며 그 젖을 마셨다. 주위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 1년 후에는 고구마 40가마 수확할 수 있었다. 그가 개간에 뛰어들면서 가졌던 것은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맨 손뿐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그 뒤 5회나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도록 용기와 확신 그리고 그 방법을 터득하게 만든 그의 첫 성공적인 개간사업이었다. 그는 첫 개간이 그 뒤의 개간사업에 큰 영향을 내용을 설명하는 한편 그 때 쌓았던 개간의 방법도 자세히 설명했다.

 

"비록 3년 동안의 경험이었지만, 그 동안의 경험은 나에게 개간농장의 경영법을 거의 통달할 만큼 터득시켜 주어, 그 곳의 개간은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다섯 군대나 직접 내 손으로 황무지 개간을 했다. 앞으로도 그 일을 계속하겠지만, 그 때 얻은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면 과히 실패가 없었으므로 여기에 나의 그 황무지 개척, 농장경영법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의 황무지 개간은, 개간지의 위치를 선정하는 데서부터 개간지의 지형, 지질의 선텍거? 감별법, 개간 진행 일정, 자금 사용계획, 농장건설 순차, 6~7차년에 이르는 수지결산의 계획 및 기타 필요한 사항을 꼼꼼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기타주의 사항'에서, 객지로 개간하러 갈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4년 쯤 후에나 알리라든지, 되도록 말을 적게 해야 한다든지, 지방 사람들에게 학벌이나 富를 내세우지 말라든지, 개간지에 무슨 농장건설지 운운하는 간판이나 표말을 붙여서는 안된다든지, 누구에게나 친절해야 한다든지 하는 점 등을 세심하게 지적해 놓은 것은 그의 개간사업이 계획단계에서부터 얼마나 주밀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개간한 그 땅은 3년 후에 1,200원에 팔렸다. 빚(400원)을 갚고 나머지 8백원으로 그는 마을 앞의 산야 4천1백 평을 구입하고, 이상촌 건설 동조자를 모집, 10호로 제한하고 부락의 가호 배치에 따라 그곳에 집을 짓도록 하되 가족 수에 따라 대지평수를 증감하였다. 그는 부락민들에게 사치를 금하고 위생을 중요시하며 매호마다 산양을 비롯하여 가축을 기르게 하고 밭농사를 주로 하며 복숭아, 배, 포도 등을 재배하는 한편 고구마 생산에 주력하였다. 뒷날 그는 이렇게 고구마 생산에 주력하게 된 연유를 두고, 고구마가 척박한 토질에도 잘 되는 작물이기도 하지만, 일제 당국이 이것을 공출해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렇게 고구마 생산에 힘쓴 결과 첫해에 40여 가마니에 불과하던 수확이 그 다음 해에는 마을 전체에서 240여 가마니를 수확할 수 있게 되었고, 해마다 2백여 가마니를 생산하게 되었다. 문제는 고구마의 저장법이었는데, 3년간 120가마니를 썩히고 난 뒤 4년만에 1년간 저장할 수 있는 방법도 고안, 성공하게 되었다. 고구마의 저장법은 당시 농민들의 큰 숙제였는데 김용기와 봉안촌이 이를 해결함으로 근처의 여러 농가들은 물론 경기도 농민훈련道場長이며 고구마의 권위자라고 하는 일본인 武田도 견학하여 이 저장법을 배워갈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봉안 이상촌은 출발 년도에 40명이던 것이 5년 후에는 총 64명으로 늘어났고, 6,500평이 13,700평으로, 논 9천평이 13,900평으로, 과수원 4천평이 12,000평으로 늘어났고 소 2마리, 돼지 4마리, 닭 1백5마리, 산양 8마리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수치의 성장에다 이 이상촌의 삶의 질이 크게 변화되고 있었다. 김용기의 증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호마다 거의 1인 이상씩 서울의 중학교에 진학을 시켰으며, 가옥은 종이 창이던 것이 거의 모두 유리창으로 바뀌었으며, 다섯 채의 집이 기와지붕을 올리게 되었으며, 전채의 부락민 64명을 한꺼번에 회식할 수 있는 설비가 매호마다 갖추어졌으며, 연 2회 이상 의사의 진료를 받아 부락 안에는 기생충 환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이 이상촌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이 이상촌이 기독교신앙에 근거하여 동지애로 뭉쳐 자신감을 얻었고 이 이상을 전조선적으로 전개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지애와 관련하여, 그와 뜻을 같이 한 청년으로 呂運赫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운혁은 여운형의 族弟로서 1935년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몸이 허약하여 휴양 차 고향 陽平에 돌아와 피차 뜻이 통하게 되어 이상촌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신적 지주인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로 봉사하면서 이상촌 실현에 헌신했다. 김용기가 《봉안이상촌》의 저자 이일선에게 "이제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을 수 있다는 것 또는 전조선에 이와 같이 실시하면 농민이 행복된 문화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강한 신념을 얻은 것만은 소득이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봉안이상촌을 시작한 지 10여년 후이지만, 그 동안 이러한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이같은 신앙과 동지애로 뭉친 공동체의 결과였던 것이다.

 

한편 봉안이상촌은 일제 강점하에서 '민족애'로 뭉쳐진 공동체였다. 그들이 이상촌을 설립하려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농촌현실을 고려할 때, 식민지 백성에게 가해지는 경제적 사회적 민족모순을 해결하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 민족모순을 해결하기 전에는 한국 농촌의 열악한 경제 사회적 상황이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음직하다. 여기에서 봉안이상촌은 민족애와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 말기의 그와 봉안촌의 민족운동에 관한 이일선과 김용기의 증언이다.

 

"이 촌 사람들은 전부가 허물어진 조국을 원수의 손에서 회복하려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일본의 강제 창씨제도에도 끝끝내 항쟁한 김용기 씨 이하 몇 사람은 8.15 해방기를 자기의 성명을 가진 대로 맞이하였으며, 학병제도로 인하여 취학 중 거부하고 도주한 6, 7인의 청년을 촌에서 숨겨두고 보호하여 8.15에 이르렀고, 징병 연령 해당자인 5인을 정신 이상으로 가장케 한 후 도주시켜 서울 등지의 집에 숨겨 보호하여 8.15까지 이르렀으며, 징용 해당자를 이 촌에 받아들여 농업에 종사케 하여 보호하였고, 1944년 10월 8일에는 양평 용문산에 각 군의 대표를 소집하여 공출 반대, 징병 징용 불응에 대한 구체적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기었다."

 

"마침내 나는 좀더 적극적인 반일활동을 목표로 1944년 10월 8일, 양평 龍門山에서 더네 각부 농민대표들과 회동하여 공출반대, 징병, 징용 불응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었다. 그 방안이란 각 군 , 면, 리가 철통같이 단합하여 징병, 징용 해당자를 상호교환, 은닉, 기피케 하고 그 은닉방법은 그 동안 내가 실제로 실행한 대로 할 것이며, 공출반대의 방안으로는 가능한 한, 논농사를 짓지 말고 공출을 하지 않는 고구마 농사 즉 밭농사를 주로 지어 그것을 식량으로 대용하자는 것 등이었다. 그 때 모인 각군 대표는 양주에 필자, 양평에 李章浩, 崔龍根, 權重勳, 申在翼, 崔龍海, 여주에 辛弘鎭, 고양에 朴性復, 홍천에 朱翰衡 등이었다."

 

봉안이상촌은 민족해방 운동자들의 은신처의 역할도 감당하였다. 경셩 종로서에서 탈출한 민족운동가 全 모를 8.15까지 광주 同志家에 보호케 했는가 하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朴 모 중위는 칭병하고 이 촌에 와서 독립군을 조직, 항일투쟁에 나설 것과 장차 국군 편성계획을 수립하는가 하면, 항일 투쟁계의 선배들이 빈번히 내왕하여 지하운동의 본부가 되다시피 하였고, 저녁에는 단파 라디오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중학 5년생과 소학교 직원, 전문학생 약 30여명의 청년들이 핵심부대가 되어 민족의식을 고무하고 투쟁케 하였다. 봉안 마을의 각 집 문전과 정원에는 일제시대에 심은 5, 6그루 이상씩의 무궁화가 있었을 정도로 그들의 민족의식은 남달랐던 것이다.

 

일제 말기 여운형이 봉안촌에 와서 기거하게 되었다. 광동학교의 제자였고 평소에 친분을 쌓아왔던 김용기는 여운형이 서울에서 강제 소개를 당하여 갈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식구들을 안동하여 행랑채에 모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용기는 당국의 주목을 받아 이틀이 멀다하고 서울의 보호관찰소에 불려 다니며 여운형과의 관계를 추궁당하게 되었다. 해방 후 선생의 생일을 이 곳에서 마련하고 해내외의 쟁쟁한 애국지사들까지 초빙했던 김용기는 여운형에게, 신앙을 가지라는 것과 좌우의 사상을 분명히 하라는 것, 정계에서 은퇴하라는 것 등을 권했으나, "그 때 선생은 끝내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비운의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해방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기독교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인 정부의 수립을 기대했던 김용기는 그의 스승이요 향리의 기독교적 선각자이기도 했던 여운형에게 이렇게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해방 후 김용기로 하여금 잠시나마 정치에 관심을 갖도록 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다시 개척적인 농사군으로 - 삼각산 농장에서 가나안 농장까지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안겨 주었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운동에 일정하게 헌신하였던 김용기에게는 해방이 남다른 포부를 안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촌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시켜 덴마크와 같은 이상국을 건설해 보자는" '마지막 꿈'을 이룰 날이 도래되었다'고 판단하고 8월 20일 상경하여 동지들의 규함에 나섰다. 그는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자신의 이상촌 운동계획을 구체화하고 정부가 수립되면 이를 정책으로 건의하려고 하였다. 그는 <농민은 한데 뭉쳐 이상촌을 건설하자>는 슬로건을 걸고 이상촌 운동을 벌이기 위해 <농민동맹>을 조직하려 했으나 당시 좌익계의 조직력을 배경으로 진행되던 '許 모의 農民組合'과 대결,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서울에 머물고 있는 동안, 이해 12월 모스크바 3상회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소식이 들리자 그는 이에 반대하는 선언문 수 천장을 등사,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 요소에 살포케 하다가 4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 <임시군정치안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자신이 주모자임을 자백하자 다른 사람들은 석방되고 자신은 군정반대 죄목으로 5년형의 선고를 받았으나, 洪淳燁 등 10여명의 변호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재판에까지 회부된 그의 선언문의 요지는 <남쪽의 미군도 북쪽의 소군도 물러가라>는 내용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남쪽의 미군도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미국'을 구세주처럼 생각하고 미군정에 빌붙어 한자리를 차지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상황에서, 특히 당시 조금 깼다 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더구나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기득권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가 가졌던, 신탁통치를 하려면 <미군도 물러가라>는 그의 부르짖음은 그의 의식의 균형성을 보여주고도 남는 대목이라고 본다. 민족과 조국에 대한 신념과 정열이 강했기에 그는 자신의 이같은 정치적인 행보가 벽에 부딪쳤을 때에 다시 심각하게 자신의 진로를 하나님 앞에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후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로 몰려들 때, 농민운동의 형태이긴 하지만 김용기도 한 때 정치에 뜻을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곧 농민운동이든 정치든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뜻은 정치나 농민운동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농군의 손발로 또 땀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그는 운동의 좌절을 통해 다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뜻이 무엇임을 깨닫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진로를 두고 하나님께 엎드렸다. 그는 자신의 진로를 다시 정립해야 할 때에는 조용히 단독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그의 생애에는 모세의 시내산과 예수님의 겟세마네가 늘 떠나지 않았다. 이 무렵의 그의 간절한 기도는 바로 얍복강 가의 야곱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결적이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갖는 뜻은 진정한 농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 그는 봉안으로 내려와 자신의 농장을 90만원에 팔아 그 자금으로 1946년 10월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 <삼각산 농장>을 접수하여 황폐된 땅을 다시 개간했다. <삼각산 농장>은 지금의 자하문 밖에서 삼각산 쪽으로 가다가 왼쪽 산자락에 약간 들어가 터잡은 1만3천여 평이었는데, 원래 이 땅은 어느 부호가 샀다가 11년이나 묵혀 둔 땅이었다. 거기에는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는 3년 반 동안 노력, 과수원을 고쳐 놓게 되자 자신은 거기서 자신의 임무가 끝난 것으로 알고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1950년 5월에 다시 자리를 찾게 되었다. 구기리 <삼각산 농장>은 해방 후 전국적인 부흥회 강사로 활동하였고 '부흥성가'를 많이 작사한 유재헌 목사에게 양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농촌의 부흥을 통해 조국을 굳건하게 세우려는 김용기 장로의 이상과, 해방 후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황폐해진 心田을 起耕하여 민족을 영적으로 부흥시키려는 유재헌 목사의 의지가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삼각산 수도원이 자리잡은 곳이 그곳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유목사의 의지는 6.25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갔다. 그가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김용기는 농민단체에 출강하게 되면서 농촌부흥을 위한 그의 사상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건국 전후한 시기에 그는 <농촌진흥협회> 위원들 앞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농사철학을 개진하는 첫 기회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전국에 '농사관계 단체가 82개'나 조직되었을 정도로 당시는 "어떻게 할 줄은 모르면서 단체부터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던 것이다. 그는, 건국 초에 단시일 내에 농촌과 정부를 연결시켜 이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이 강연회에서, 歸農 실천을 부르짖고 국가경제의 기초가 농업이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건국초기에 무엇보다 重農政策을 써서 국가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모임에서 행한 강연의 일절이다.

 

"농촌을 길러서 부유해졌을 때 세금으로 도회를 건설하고 공장을 세우고 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코스이다. 이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도 그 길을 밟지 않고 잘된 나라는 없다. 그렇게 하든가 도회가 농촌보다 더 발전하면 이번에는 도회의 세금으로 농촌을 또 건설한다. 이것이 소위 균형정치의 大道이다. … 이래서 우리 나라의 현재 형편은 우선 중농정책을 써야 할 단계이다. 우선 농민과 정부와의 유대를 맺어야 한다."

 

그는, 중농정책이 경제학자의 몫인 줄 알면서도, 농사가 농삿군들의 몫인 이상 아무리 훌륭한 경제이론으로 무장된 중농정책이라 할지라도 농삿군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농사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김용기는 "대소의 일이란 정신으로 하는 것이지 손이나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철학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정신상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일은 아무리 머리가 영리하고 힘이 세어도 제대로의 성과를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삿군들은 마지 못해 농사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공장이나 회사, 상점으로 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농삿군들을 데리고 농사일을 해 본들 중농정책이 제대로 실시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중농정책에 앞서 중요한 것이 바로 농삿군의 양성"이라고 힘써 강조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농삿군의 양성은 정부나 교회 혹은 특수교육기관을 통해서 하자는 것이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서는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농삿군의 양성을 위해서는 영농기술과 채산성을 가르칠 뿐아니라 농사가 최고의 직업이며 농사가 최고로 애국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농사일의 보람과 긍지를 심어줌으로 농사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가 해방 후 농업입국을 부르짖으면서 공개적으로 행한 첫 강연에서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이 농삿군 양성에 대한 그의 이념적인 기반으로서, 아마도 뒷날 <가나안 농군학교>를 시작하게 된 사상적인 연원이 이 때 이미 출발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삼각산 농장>을 정리한 김용기는 1950년 5월 다음 계획을 위해 잠시 고향 봉안촌으로 돌아갔다. 휴식은 재창조를 위한 기회다. 그러나 그 해 발발한 민족상잔은 그의 계획에도 큰 차질을 빚게 했다. 6.25 때 공산치하의 고향에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인 그가 자신을 잡으러 온 공산군을 설득하여 보냄으로 자신에게 부닥친 위기를 어떻게 극적으로 모면할 수 있었는가는 여기서 접어두겠지만, 그런 위기를 통해서 그는 늘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신앙이 더욱 깊어졌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늘 확인하는 신앙고백이 늘 뒤따르고 있었다.

 

6.25 전쟁은 전국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그와 함께 자신이 일궈놓은 봉안 이상촌과 구기리의 과수원도 모두 허무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잠시도 내가 일 않고 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육체를 편하게 놓아 두고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는 1952년 5월부터 경기도 용인군 遠三面 沙岩里의 6만여 평에 <에덴향> 개간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 때 그가 이끌고 간 사람이 27명이었는데, 그의 가족과 가산을 잃은 봉안촌 사람들, 그리고 그의 이상에 동조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전쟁 직후,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의식주가 모두 부족하였다. 이 때가 그의 개간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한다. 식기를 1, 2, 3호로 등급을 매겨 노동의 경중에 따라 식사량을 달리하여 먹었으며, 그래서 이 때 "내가 제일 고통스러웠던 일을 들자면 배고팠던 일이었다"고 언급한 그의 회상은 이 때의 힘들었던 상황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침 4시에 일어나 밤 10시에야 잠자리에 드는 고달픈 생활은 오히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성경말씀을 실제 생활에 실천하면서 그 진리를 터득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 피땀의 노동이 직접 복음을 전도하는 일이 됨"으로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이 곳에 교회당을 먼저 세우고 <복음고등농민학원>을 세웠다. 뒷날 가나안 농군학교의 전신이 구체화되어 갔던 것이다.

 

3년 동안 애쓴 결과 작은 부락 형태의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인근 부락민 중에서 40여명의 신앙인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에덴향>은 완성시키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아마도 합작했던 분과의 의견의 불일치가 그 원인이었던 것 같지만, 그는 이 일을 통하여 개척자로서의 자신의 임무와 목표를 더욱 뚜렷이 확인하게 되었다. 그의 술회다.

 

"내가 평생을 두고 하려는 일의 목표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곳에서 안락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곳곳의 못쓸 땅을 많이 개간하여 그 개척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나는 또 다른 데에 가 일을 찾아 해야겠다는 뜻에서 그 곳을 떠난 것이 그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개척자는 한 곳에 안주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그래서 개척자는 순례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다. 순례자가 한 곳에 안주하는 것은 순례자임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척자도 개척의 과실을 따 먹기 위해 한 곳에 안주하게 되면 이미 개척자로서의 사명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3년간 애써 가꿔온 <에덴향>을 떠나게 되는 데서, 그의 신앙인으로서의 순례의 삶이 가져야 하는 경건성과 무소유의 교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954년 11월 16일, 그는 용인의 <에덴향>을 떠나 경기도 廣州郡 東部面 豊山里로 옮겼다. 이에 앞서 그는 직접 답사하여 이 곳의 황무지 1만여 평을 구입하고, 새로운 개간사업으로 <가나안농장> 건설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 동안 세 곳의 개척사업을 하였지만 <봉안 이상촌>을 제외한 두 곳은 남들의 소개로 시작하였다고 한다면, 이 곳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곳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는 개간사업에 힘쓰는 한편 이 해 겨울부터 세 아들과 함께 4인조 악단을 만들어 농촌계몽운동에 나선다. <삼각산 농장> 시절부터 농민단체를 상대로 농경과 농촌생활에 관한 강연을 행한 적이 있고, <에덴향>에서 농민학원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경험과 자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20여년간의 개간사업과 이상촌 운동을 통해 농촌의 衣食住 생활과 각종 儀式을 개선, 간소화할 필요를 느꼈고 그것을 개선하려면 당시까지 농민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각종 미신을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1955년부터 그는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농장 5개년 계획>을 세웠다. 어떠한 개척사업에서도 강조해 온 교회당을 세우는 일부터 시작하여 <가나안교회>(천막교회)를 세우고, 1만여평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용도와 연도별 작업량 및 농장 개척에 따는 세부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우선 8천평은 농토로, 2천평은 풍치림으로 만든다는 기본 계획에 따라, 농토로 지정한 8천평을 1차년도인 1957년부터 4,000평, 1,500평, 1,000평, 1,000평 그리고 500평씩 각각 개간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 계획에는 <5개년 연차별 개간 상황> 외에 <연차별 농작물 7대 특수 作付 상황> <보통 농작물 재배 상황> <특수 농작물 5개년 作付 상황> <흙 벽돌집 연차 건립 상황> <축산(韓牛)> <養?> <환경정리> 등이 소상하게 나열되어 있다.

 

이렇게 개간 사업과 농촌 계몽운동을 통해 축적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개척 정신은 한국의 농촌. 농민 운동을 위해서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그는 이 자산을 우리 국민들 특히 농님들과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우선 전국 교회를 돌며 먼저 기독교인들이 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1956년부터 시작된 부흥회였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신앙의 생활화>와 <생활의 신앙화>를 외쳤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생활과 유리되어 신앙이 생활로 연결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는 신앙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말하자면 일종의 한국교회 갱신운동이었다.

 

그는 또 자신의 가정생활과 개간사업 그리고 영농생활 등 종합적인 자기의 삶을 현장에서 보이면서 훈련하기 위해 1962년 2월 1일부터 <가나안 농군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민족주체성과 국민윤리 규범, 민주적 지도인력, 올바른 국가관, 사회관 및 가정관의 확립, 근검 절약 등을 가르치고 훈련하면서 농촌개발과 복음화운동 등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종합적인 기독교 농촌운동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62세가 되던 1973년 3월 13일에 강원도 雉岳山 중턱인 원성군 神林面 龍岩里에 <신림동산 神林園>개간 기공식을 가졌는데, 이곳은 돌산 15만평을 개간하겠다는 것으로 그 연세에 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야심찬 사업이었다. 이어서 그 해 6월 21일에는 그 곳에 <제2 가나안 농군학교> 개교하여, 경기도 광주의 <가나안 농군학교>와 함께 수십만명의 수료자를 훈련시켜 제2, 제3의 개척자를 배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받아 각종 상과 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본인이 드러내기를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가나안으로 가는 길>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김용기가 1968년에 간행한 그의 자전적인 전기이다. 자전적인 이 책에 그의 생애와 사상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생애의 전 과정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의미가 심장하다고 생각된다. 이 표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의 생애의 목표를, 애굽에서 생활하던 히브리(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같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 사상'을 더듬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곧 김용기의 생애를 관통하는 그의 일관된 사상이라 할 것이다.

 

첫째,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기초는 기독교 신앙이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일반의 신앙과 교리를 준수, 실천하고 장로로서 교회 생활에도 충실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신앙의 범주 위에서 생활하지만, 그에게는 생활 철학면에서 기독교로부터 많은 것을 섭취하고 있다. 그는 우선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에서 인간이 창조 때로부터 생육, 번성하여 땅에 충만, 정복하라는 일종의 문화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전제를 발견하고 땅을 개간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땅을 개간할 때에는 창세기 3장 17절의 근거하여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라는 명령도 받았음을 강조한다. 여기에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데살 후 3: 10)"는 명령을 받았음을 상기시키면서 부지런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적인 '땀의 철학'을 개발하였고 그것을 실천한 선각자다.

 

둘째, 그는 농업과 농민에 대한 철저한 신뢰의 바탕 위에 서 있다. 과거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이것은 治者들의 구호에 그쳤고, 농민이나 농업은 착취의 대상으로 또 천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용기는 농업만큼 이익이 남는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농업이야말로 가장 신성하고 긍지있는 직업이라고 하였다. 과거 실학자들 중에서 農本主義를 주창한 적이 있으나 그들 역시 자신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입으로만 그것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김용기는 개간에서 과실을 맺는 과정까지 실천해 보임으로써 농업과 농민의 '天下之大本'됨을 입증하였던 것이다. 그이만큼 일찍이 우리 역사에서 농업에 대한 신뢰를 보인 사람은 없다고 본다.

 

셋째, 젊은 시절부터 고민하였고 만년에 정리된 그의 사상의 핵심은 '福民思想'이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 사상'은 바로 이 '복민사상'이다. 그는 이 '복민사상'의 제창자요 실천자였다. 그가 자기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용어로서 언제부터 이 말을 사용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이 사상을 정립하기 위하여 "고심참담하여 연구를 거듭"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복민사상은, 애굽으로 상징되는 억압과 빈곤 무지로부터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福地로 인도하겠다는 사상이며, 한마디로 백성들을 복되게 하겠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 꿈꾸고 실천했던 이상촌 건립의 목표이기도 했다.

 

넷째, 그의 사상을 실천하는 윤리의 핵심은 정직과 근면, 절제다. 이 점 역시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개척자적 정신은 바로 이 윤리를 기초로 실천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이 점들을 강조한다. 그가 새벽 4시~5시에 일어나서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이나, 개간 계획을 제대로 실천하였다는 것 그리고 비누를 세 번 이상 비비지 않았다는 데서 얼마나 철저한 근면 절약을 실천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다섯째, 그는 평생 노력의 목표를 개간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가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에 정력을 쏟아부었고 그것을 평생의 과제로 알고 일관하였다. 그의 황무지 개간의 의미는 바로 우리 민족의 정신 개간에 직통하고 있었다. 그는 못쓰던 땅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 듯이, 개간되지 않을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개간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여섯째, 그는 과학영농을 실천한 선각자다. 과거의 농민들이 주로 경험에 근거하여 농사를 지어 왔지만, 그는 연구하여 과학적인 합리를 따지고 거기에 근거하여 기술을 개발, 터득함으로써 과거의 경험위주의 영농을 한 단계 넘어서서 과학영농을 실천하였다. 영농 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에서도 항상 합리를 따지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졌으며, 무엇보다 최신의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저술이나 강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 한국농민운동사에서 본 一家 - 맺는 말을 대신하여

 

일가 김용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고로 농민혁명이 성공한 예는 우리나라에는 물론 없고 전세계에서도 그 예는 아주 드물다. 東學亂이 그렇고, 洪景來의 난이 그렇고, 좀 더 올라가서 萬積의 난이 그랬다. 농민은 밀면 물러가고 누르면 들어간다. 농민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왜 농민은 힘이 없나? 역대 양반들이 또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두고 두고 농민들의 힘빼기 정치만을 해 왔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가 세계의 농민운동사는 물론 한국의 농민운동사를 어느 정도 꿰뚫어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저술에서 보이는 독서량으로 보아 그는 앞에서 말한 연구하는 '농삿군'이 되기 위해 농민운동사도 연구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 말은 농민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자신이 농민운동사에서 가질 위치도 어느 정도 재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한국 농민운동사에서 김용기의 위치를 살피자면, 우선 시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상촌건립을 목표로 농민운동에 나서는 것은 1930년대 중반 1936년경으로서,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는 등 전시비상체제를 강화하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한국 농민에 대한 일제의 수탈정책이 日鮮同祖. 農工竝進이란 명분 하에서 가장 심화되고 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고 토지소유관계를 근대화한다는 명분 아래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東洋拓植會社를 설립, 빼앗은 토지를 관리케 하면서 일본인을 이민시켰고 따라서 토지와 경작권을 빼앗긴 한국인들 중에는 만주로 이주하는 자들이 많았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작관계가 더 열악하게 전개되고 농민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자 1920년대에 들어서서 소작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소작쟁의가 격화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1923~24)와 北栗 소작쟁의(1924~25) 및 龍川 不二西鮮農場의 소작쟁의(1931~32)는 1920년대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유명한 소작쟁의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러한 소작쟁의를 막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 1932년에 제정된 朝鮮小作調整令이다.

 

소작쟁의와 함께 농민들은 식민지 하에서 농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농민단체를 조직하고 협陷조합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중앙의 조선노농총동맹(1924)과 지방의 소작회, 소작조합 등이 결성되었다. 1925년에는 천도교에서 朝鮮農民社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1930년에는 조선농민사와 전조선농민사로 분화되었는데 여기에 비해 기독교계에서는 기독청년회를 통한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대에서 30년대로 넘어오면서 농민운동이 계몽적인 성격을 다소 띄게 되었는데, 여기에 기독교와 천도교의 농민운동이 기여한 바가 컸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는 20년대에 이미 실패한 바나 마찬가지인 제2, 제3차 産米增殖計劃을 세웠으나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고, 농촌진흥운동과 自力更生運動을 벌였으나 조선소작조정령과 朝鮮農地令(1934)의 반포로 상황이 더 어려워갔다. 농촌이 몰락하고 기존의 농민운동은 잠적하였다. 이 무렵에 봉안 이상촌 운동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농촌을 건설하고자 나타난 것이 김용기였다. 따라서 그의 농촌운동은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로 농촌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어 농민들이 신음하면서 거의 절망상태에 빠졌던 한국 농촌에 새로운 희망을 북돋아주는 운동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김용기의 이상농촌운동의 성격과 계열상의 문제로서, 그의 농촌운동이 우리 나라 농촌운동의 어떤 장르에 속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일제하의 농민운동의 계열상의 문제다. 그것은 크게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과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으로 나눌 수 있고, 종교적으로는 천도교 계통과 기독교 계통의 것으로 구별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의 것은 주로 토지소유의 문제와 소작관계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는 기독교 계통의 농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의 이같은 활동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문맹퇴치, 농사개량, 부업장려, 농사강습회의 개최 및 농촌지도자양성기관의 설립 등에 역점을 두었다. 또 기독교의 농촌운동은 천도교의 조선농민사의 것에 비해 농촌 계몽운동과 농민야학의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우세하고 공동경작운동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농사개량, 부업장려, 농사강습회의 개최, 농업학교 및 농촌지도자 양성기관의 설립 등은 천도교의 경우 거의 보이지 않고 기독교의 농촌운동에서만 보인다.

 

김용기의 이상촌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의 농민운동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일제하의 이상촌운동의 개념을 '민족적 농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조동걸 교수는 이상농촌운동을 두고, "어떤 농촌이 농업경제적 측면에서 비록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여기에서 말하는 이상농촌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즉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민족 사상을 기저로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전제된다."고 하면서, 일제의 식민성을 탈피하고 민족 자주적 처지에서 농촌경제사회를 향상시키려는 운동이 바로 이상농촌운동이라고 하였다. 이런 관점과 관련시며 본다면, 김용기의 봉안촌운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일제 말기에 애국지사들은 은신시킨 것이라든가 일제가 강요하는 공출을 피하기 위해 고구마 생산을 장려하였던 것은 이러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일제하 김용기의 농촌운동은, 한편, 기독교농촌운동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 점에서는, 앞에서 말한 민족주의적인 성격만으로 그의 이상촌운동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족주의적인 이상농촌운동이 갖지 못한 성격을 그는 갖고 있었다. 특히 농업과 근로에 대한 이념에서 그는 철저히 기독교적인 이상을 갖고 농촌운동에 임했던 것이다.

 

그의 이상촌운동에는, 앞에서 언급한 민족주의적인 요소 외에도, 당시 기독교 농촌운동이 다소 경시한 부분을 강화한 측면도 있었다. 공동경작운동이다. 이 점은 오히려 천도교 측에서 더 강화하고 있던 부분이었지만 그의 이상촌운동은 처음부터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의 농촌운동은 아마도 '1930년대 전반기 민족운동의 한 주류였던 귀농운동'과 '춘천고보의 常綠會운동' 등을 포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상촌운동에 대한 면밀한 고찰 위에서 이뤄졌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고 김용기의 이상촌운동이 지향하고 실천했던 황무지 개간과 농사개량 등의 과학영농은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 그리고 종교적인 계열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를 한국 농민운동사에서 독특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농민운동의 위치는, 앞에서 말한, '가나안으로 가는 길 사상'을 비롯한 그의 농업사상의 측면에서도 고찰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 농민운동사에서 신앙과 이론과 실천력 등 세 요소를 고루 갖춘 농민운동가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기독교적인 신앙과 사상의 배경을 가지고 농업을 하나님이 내신 천직으로 알고 거기에 몰두했던 선각자였다, 이렇게 신앙적인 차원에서 농민운동에 달려든 사람이 흔치 않다. 근대 농민운동사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고 성직자 가운데는 농업(농촌)전문가도 있었으나, 김용기 같이 세 요소(신앙과 이론 및 실천)를 겸비한 농민운동가는 일찍이 없었다고 본다.

 

과거 실학시대에 유형원, 이익, 정약용 같이 농업(농촌)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중농주의 학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의 근본적인 관심은 토지소유관계에 역점을 두었고, 또 근.현대의 중농주의자들도 토지소유관계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에 비해 김용기는 주로 개간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토지의 분배적 측면보다는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 측면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농업관계 이론면에서 차별성이 보이고 있다. 또 김용기의 농민.농촌문제에 대한 연구는 과거의 농민운동가들이 취했던 농업생산력 증강면에 치중하거나 토지소유관계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소작쟁의 문제에 역점을 둔 것과도 또 구별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소작쟁의 같은 문제에는 관심을 덜 가질 수도 있었던 결과로도 볼 수 있지만, 그 보다는 김용기의 관심이 토지의 효율적인 활용에 있었음을 유의한다면 그 차별성과 함께 김용기의 농민운동의 한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농민운동의 범주가 영농문제는 물론이고 농촌생활 전반에 걸친 이론을 창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농민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일제하의 기독교의 농민.농촌운동은 기관의 설립운동과 농민계몽운동, 농업진흥활동, 농민단체의 조직과 공동경작의 보급 그리고 농업교육을 통해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전개하고 있었다. 이런 운동과 김용기의 운동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특히 개인이 할 수 있는 운동의 범위는 결국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기독교운동이라고 하는 것들이 과연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살려가면서 운동을 전개하였는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다. 단지 일제하의 기독교 농촌운동이 '합법적이고 온건한 노선'을 표방하였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적인 정체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김용기의 운동은 철저히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사명감을 토대로 하여 전개하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농촌운동이 간과했던 개간과 영농을 직접 실천하는 농민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농촌 농민운동은 다른 기독교 농민운동과 차별성이 있을 것으로 본다.

 

또 하나 김용기에게서 보이는 운동의 특징은 농업에 흔쾌히 종사할 농삿군을 양성하는 일에 일찍부터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해방 직후부터 농삿군의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계속 歸農을 강조하였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통해 훈련, 양성된 훈련생은 비단 농사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 각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의식변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교육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가나안 농군학교일 것이다.

 

따라서 일가 김용기는 그의 기독교 신앙과 합리적인 사고와 지식, 실천적인 활동이 한국의 농촌사업, 농업경영, 농민의 계몽과 교육에 미친 공헌으로 하여, 일찍이 성자로 추앙받던 의료계의 장기려와 함께, 한국 기독교계가 배출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러면서도 조용한 농민운동가로 한국의 농민운동사 및 한국 기독교사에 평가될 것이다.

 

基督敎 信仰人으로서 古堂 曺晩植

 

이 만열(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 古堂 曺晩植

 

古堂 曺晩植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 강점기와 해방 초기에 걸쳐 교육 경제 언론 체육 정치 등 근대 한국의 민족 민주 통일 운동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생이다. 그는 풍운이 감돌던 19세기 말 음력으로는 1882년 12월 24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양의 진향리에서 한학의 조예가 깊었던 昌寧 曺氏 景?과 慶州 金氏 敬虔을 부모로 하여 외아들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그가 태어났던 1882년은 壬午軍亂으로 한국의 신구세력이 치열한 대결을 벌이던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5월에 미국과의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이기도 하다. 1876년 일본과 국교를 튼 조선은 청 나라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양 제국과의 국교를 터서 개화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미국과 국교를 맺은 후 이어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도 국교를 맺게 되었다. 白凡 金九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맺어지던 해에 출생, 거의 평생을 일본에 대결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고당 조만식은 미국과의 국교가 트여진 1882년에 출생하여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역사에는 가끔 이렇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우연스럽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고당 조만식에 대하여는 그분이 위대했던 그만큼 그 동안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번의 학술대회에서도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 동안 고당에 대한 연구가 거의 교육자로서 혹은 물산장려운동의 실천자로서 또는 해방 후의 정치가로서의 모습은 부각시켰으나, 이러한 그의 삶의 근원이 되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는 단펀적으로밖에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이번 학술대회에서 '종교인으로서의 고당 선생'을 발제의 하나로 올려놓은 데에는 종래 그에 대한 이같은 연구경향을 반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의 생애를 전환시킨 기독교 신앙과 그와 관련된 기독교 활동을 살피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한 이후 곧 선교학교인 숭실학교과 관련을 맺었고 일본에 유학할 때에는 동경에서 장 감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데에 협력하였으며, 귀국해서는 기독교학교인 오산학교와 숭인상업학교에서 가르쳤고 평양 YMCA 총무에 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으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는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격려하며 그가 용감하게 그 반대투쟁을 선도하도록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일별해 볼 때, 대부분의 사회적 민족적 활동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느낍조차 갖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일생의 활동을 기독교적인 활동 내지는 관점과 관련시켜 살펴보는 것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반대로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활동이지만 기독교와 관련되지 아니했다는 필자의 판단 때문에 언급되지 않을 부분이 있을 것임을 미리 전제해 두고자 한다.

 

2. 기독교 신앙 입문

 

 

고당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1888년 7세때부터 평양의 관후리에 있는 한학자 張正鳳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이 때 같이 공부했던 학우로는 뒷날 그의 기독교 입신의 계기를 마련해 준 韓鼎敎와 평생을 그와 동지적 관계에 있던 金東元이 있었다. 1896년 15세 때에 일단 한문수학을 마친 듯한데, 이 때에 익힌 한문은 40여세에 이르러 민족적인 고뇌로 괴로와할 때 때때로 익명의 한시를 남기게 했다. 한문수학을 마친 그 이듬해 1897년부터 그는 상업활동에 종사하게 되었고, 1904년 2월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상업을 그만두고 3월 13일 가족을 따라 대동강 중류 베기섬(碧島只里)로 피난하였다. 그가 기독교에 입신하고 곧 금주 단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즈음인 듯하다. 그 이듬해 1905년에 그는 선교사 베어드(W.M.Baird 裵緯良)가 1897년에 설립한 숭실학교(중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보에는 없지만, 그가 선교사를 만나고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열한두살 때라고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장황하지만 뒷날 그의 기독교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용해 보겠다.

 

"서양인을 처음 보던 감상은, 아이 때의 일이 되며 잘 생각되지 아니하나 기억에 남아있는 몇가지만 말씀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기는 열한두살 되었을 때 즉 임진년(1892)인가 계사년(1893)인가라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술막골 한석진 목사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목사의 맏 자제 고 民濟 兒名 갑손이는 나의 글동무였습니다.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洋鬼子'였지요. 이 양귀자는 馬布三悅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그 때는 물론이오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무섭다기보다는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때 일반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몰래 얼른 입에다 슬쩍 스치기만 하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양, 그런 말 때문에 더욱 자주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나는 책자를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으로 번역하여 인쇄한 쪽복음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기타 부속서류인 引家歸道 臨慧入門(sic. 德慧入門인듯) 등과 같은 조그마한 전도서류이었는데 洋紙 냄새와 印刷墨 냄새들이 그렇게 변하여 양귀자 냄새로 되었던 것인데, 그 냄새가 역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40여년 전(1890년경)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1892년에 들어서면서 선교사 마펫(S.A.Moffett, 馬布三悅)과 그래함 리(Graham Lee, 李吉咸)를 평양에서 활동하도록 하고 韓錫晉을 조사로 이 곳에서 함께 활동하도록 하였다. 고당은 어린 시절 한석진의 아들 민제를 글동무로 삼아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선교사를 만나 그가 주는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의 쪽복음 성경과 <인가귀도>와 <덕혜입문> 등의 전도문서를 접한 적이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가 선교사를 '양귀자'라고 회상하였던 것도 당시의 다른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사에 대한 그런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1894년 평양에서도 기독교인 박해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다 한때 그와 상업을 같이 한바 있는 어린 시절 글돔무 한정교의 전도로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아마도 술과 환락으로 그의 상업이 거의 거덜난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상업에 실패하고 홧김에 놀음을 계속할 때에 어떤 분이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해보라는 권고에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숭실학교의 문을 두들겼다고 한다. 그의 기독교입문과 숭실학교 입학은 장사에 실패하고 난 뒤에 이루어진 변화다.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고당의 생애에서도 나타난다. 숭실학교 입학과 관련,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숭실학교에 입학할 결심을 했고 아버님에게 승락을 받은 선생은 지금까지의 술동무, 화류계 동무들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그날 밤이 새도록 餞別酒를 마셨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장관이거니와 밤새워 술을 마시어 아직 입에서는 술내새가 나고 발걸음을 갈지자고 걷게 되는 작취미성의 몽롱한 꼴을 하고도 좌우간 숭실학교를 찾아가 당시 설립자요 교장이던 고 배위량(裵緯良 미국인) 박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했다. 배 박사는 조선생의 곤쓰고 주정뱅이 같은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공부는 무엇하려구 하겠나" 하면서 숭실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표시이었으나, 조 선생은 지금에도 어떻게 그러한 걸작의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하고 대답을 한 것이 배 박사를 감격케 하여 "좋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으로 공부하시오" 하면서 조 선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한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생활과 숭실학교 교육을 받게 되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전혀 새로운 생애를 걸어가게 하였다. 그는 이 때부터 40여년간 금주 단연하는 생활을 철저히 지속하였다.

 

고당의 기독교 입신과 관련하여 연상되는 한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평안도 지역에서 기독교의 수용이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고 광범위하였으며 또 다른 지역보다도 신자화와 교회설립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평안도 지멱은 복음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만주에서 번역, 보급된 성경의 영향과 서간도 지역에 진출했던 한국인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광범위하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둘째로 이 지역은, 숭실학교를 건립한 선교사 베어드(W.M.Baird, 裵緯良)의 지적처럼, 일찍부터 '자립적인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이 우세하였고 이들은 새로 수용된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서북지방에 기독교가 번창하게 된 요인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이 지역에 보급되었을 때에 기독교를 통해 개화운동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앞장 서게 되었다. 조만식을 비롯하여 이승훈 안창호 등이 중산층 계급으로서 뒷날 기독교에 입신하여 민족운동에 나섰던 것은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그가 숭실에서 어떤 신앙훈련을 쌓았는지 남은 기록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1905년 입학했을 때에는 설립자 겸 교장이었던 베어드와 한국인으로 朴子重이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베어드는 맥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시카고의 진보적인 신앙사조에 대항하여 설립된 그 학교의 출신답게 마펫 등과 함께 선교사로서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당시 한국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감안, 교육자로서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선교를 꾀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당시 선교사들이 가졌던 보수적인 신앙과 함께 베어드가 가르치는 '사회적 구원'의 신앙을 감명깊게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베어드가 말했다는,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 조선인은 내세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보다 현재의 사회적 구원 즉 실제생활에서 구원을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 이것은 그가 베어드로부터 어떤 점에서 감화를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당이 학생이었을 때에 한국인 교사로서 박자중이 약 1년간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1895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처음에 소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1900년에 중학교 교사로 전임하였다. 박 선생은 "성품이 온화하고 지추가 청한하며 행위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고 지식이 넓어 일찍이 세상에서도 꽃다운 이름을 얻은" 분으로 교회에서는 장로추천까지 받았으나 1906년 56세로 돌아갔다. 장례 때에 숭실의 소중학교와 온 교우 형제자매 수천여명이 그 상여 전후에 호상한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흠모가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교사 박자중도 고당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당은 23세에 입학한 숭실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에 접함으로 세계관을 넓히고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는 등 '거듭난'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당은 학생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학생 때에 개화한 사람은 양안경을 끼어야 한다는 법이라 하여 미국으로부터 도수가 맞지 않은 금테 안경을 쓴 것이며, 숭실도서관 근처에서 쉬는 시간에 담배쟁이들이 모여 망을 보며 몰래 담배질을 하던 것이며, 운동회 때 紅帽를 쓰지 않도록 항의한 일 등도 있었지만 "모든 학과의 과목이 새롭고 새로우며 또한 신기하여, 이런 학문을 내가 왜 이제야 배우게 되었는가 하는 晩時之歎이 생"겨서 열심히 공부하여 無等(1학년의 예비급)으로 입학한 그가 1년후에는 2학년으로 승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통한 새 생활의 재미를 '무엇이라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겼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통해 그는 많은 기쁨을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숭실 시절을 이렇게 결론내렸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러고는 학우들끼리 즐겁고 웃고 놀고 불규칙하나마 운동하고 이렇게 학우들은 친밀이 사귀며 지냈다. 여기는 반목도 질투고 시기도 파벌도 彼我도 다 없는 참사귐이었으며 참 낙원이었다. 이것이 순진한 초대 학생이었는가 보다. 옛날의 그 일이 퍽 그리워진다."

 

고당은 뒷날 '白光'지와의 인터뷰에서 숭실학교 시대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우를 소개하라는 질문에, "무어 가깝다는 것보다도 그 때 동기생으로 林鍾純 朴尙純 金得洙 故 孫貞道 등 제씨였지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 중 임종순 박상순 손정도는 한국교회사 및 한국민족운동사에 남는 인물들이고, 김득수는 생물학자요 교육자며 좋은 신앙인으로 평양의 광성중학교의 교장과 평양 YMCA 발기인으로도 활약한 이다. 처음 무등으로 입학했을 때는 13명이었으나, 그가 월반하는 등 변화가 있었으므로 숭실중학 5회로 같이 졸업한 이들은 23명이었고, 고당이 거론하지 않은 인물 중 이성휘 선우혁도 쟁쟁한 분들이었다.

 

이렇게 고당은 1905-1908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가는 시기에 숭실에서 좋은 벗들을 사귀며 자신으로서는 새로운 신앙에 심취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숭실과 기독교 신앙, 그의 생애에 함께 닥아왔던 이 두 사건은 조만식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그의 생은 이렇게 수용한 기독교 신앙을 근거로 해서 전개되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3.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 東京 유학생 시절

 

고당은 숭실을 졸업하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신앙으로 무장된 그는 처음 그가 숭실에 입학할 때 베어드 교장에게 약속했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더 배워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1908년 3월에 숭실을 졸업하고 4월에 동경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거의 3년간 영어를 전공하였다. 이 때 고당은 비로소 인도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채식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다. 뒷날 그가 한국의 간디로 추앙받게 되는 것은 이런 계기가 있었다.

 

29세에 영어학교를 졸업한 그해 1910년 그는 다시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도 같아 많은 우국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계속 일본에서 공부하려고 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논리 못지 않게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일시적인 분노와 좌절을 절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그뒤 그가 한때 망명의 길을 택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일신의 안녕을 포기하고 평양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민중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그의 신앙은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점차 성숙되어 갔다. 신앙은 듣고 가르침 받는 것을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봉사를 통해서도 성장하는 법이다. 고당은 동경에서는 한인교회의 설립과 연합 그리고 영수의 책임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오산 광성 등 기독교학교에서 성경교수와 설교를 통해,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그리고 평양 YM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한국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한인들에 의한 '동경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8년이며 유학생들과 관련이 깊었다. 1876년 이래 한국인들의 일본유학이 시작되었는데, 1908년 교회가 설립될 때에는 동경유학생이 관공립학교를 통털어 270명이나 되었다. 유학생들을 위해 1906년 8월에 '在日本東京 朝鮮基督敎 靑年會'가 창립되었고, 이 때 조만식은 청년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다. 청년회관에는 주일마다 학생들이 모여 예배하고 있었다. 동경의 청년회 총무를 역임한 白南薰의 증언에 의하면, 1908년에 鄭益魯 장로가 평양으로부터 국한문 옥편을 편찬하기 위해 동경에 와 청년회관에 유숙했다. 앞으로 유학생이 많아질 것에 대비, 정 장로는 교회를 세울 것을 권고하였다. 논의 중에 장로교로 할 것인가 감리교로 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감리교 신자가 한 사람 뿐이므로 장로교로 하기로 하고 본국의 장로교회에 이를 보고, 목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그 이듬해(1909) 5월에 韓錫晉 목사가 와서 김정식 조만식 吳舜炯을 領袖로, 金顯洙 莊元瑢 張惠淳 白南薰을 집사로 하여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장로교회로 출발하고 보니 뒷날 문제가 생겼다. 감리교인 학생들(盧正一, 金永燮 외 6, 7명)이 왔다가 이 교회가 장로교회임을 알고 유학생 감독부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던 고당은 이를 알고 급히 백남훈에게 편지를 띄우는 등의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고당은 일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따로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고당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 본국의 장로교 감리교회와 교섭, 동경교회를 장 감연합교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당의 에큐메니칼한 이념과 실천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의식이 뒷날 '고향을 묻지 맙시다'라고 외치면서 예상되는 교파적 분열은 물론 지역적 갈등도 대승적으로 승화시켜 민족적 화합을 주장하게 되었다.

 

4. 기독교 신앙교육과 실천성 - 오산학교 봉직 시절

 

1913년 명치대학 점문부 법학과를 졸업한 고당은 평북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받아 부임하였다. 늦깍이로 배움의 길에 나섰던 그였지만, 이제 자신이 그동안 배운 바를 나누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왔던 것이다. 더구나 五山이라면 그가 존경하고 있던 南崗이 창립한 학교다. 그로서는 배움의 길에 나선 이후 그 배움을 실천하는 첫 발걸음이 오산으로 향했기에 더욱 흔쾌한 마음으로 부임했을 것이다. 오산은 개교이래 선생과 학생이 함께 기거하는 전통을 세웠다. 고당은 이 전통을 더욱 견실하게 만들면서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신앙의 훈련을 강화하였다. 오산에서 고당의 지도를 받았던 김기석과 김홍일은 이렇게 그들의 존경하는 스승을 회상한다.

 

"그는 아침 6시에 학생들과 같이 일어나 아침체조를 같이 하고 학생들 틈에 끼어 구보도 같이 하였다. 그 때 오산학교는 사환이 없고 청소를 위시하여 난로피우기 장작패기 같은 일은 선생과 학생들이 맡아서 하였다 고당은 여러 번 학생들을 데리고 제석산에 가서 오리나무를 베어 같이 날라왔다. 겨울에 눈오는 날 아침이면 고당은 맨 먼저 교정에 나와 선생과 학생들이 다닐 길을 내고 운동장 눈을 쓸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활을 지도하고 같이 장작을 패고 눈을 쓴 것뿐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도를 올리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고 설교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맑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당이 오산에 온지 1년이 못넘어 오산은 놀랍게 변모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다시 단결을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는 검소한 기풍이 번져나가고 학교와 교회에는 새로운 신앙이 불타 올랐다" "그는 교장이면서 사감이면서 사환과 교목까지를 겸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같은 돈독한 목자들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인제(白麟濟)가 독일로 유학을 가고 朱基鎔과 金恒福이 교육에 헌신하기로 하고 金弘壹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고 洪鐘仁이 신문기자가 되고 李鎬와 林克濟가 이과계통에 진학하고 한 것이 고당의 영향아님이 없었다. 이 예언자를 겸한 교육자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건한 신앙과 높은 이상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헌신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스승의 고매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는 제자들을 게으른 잠에서 깨어 일으켜 그들의 혈관 속에 새로운 피를 부어넣어 주었다. 고당은 오산에 있으면서 보수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 받는 동지들에게 보수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을 미안하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1926년 가을 고당은 전후 9년에 걸친 오산생활을 그만두고 평양으로 나왔다."

 

"고당 선생께서는 그 때 오산중학에서 수신(도의)에 해당하는 성경을 가르치시고, 또 특별예배도 주도하셨는데, 하루 아침엔 수신시간에 들어오셔서 성경을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人子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은 눈물과 땀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눈물 즉 同情과 사랑, 피 즉 희생, 이 세가지는 우리가 본받아서 민족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땀흘려 일을 해야 하며, 최후에 가서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시간에 비록 전문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가르친 것이었지만 고당은 기독교의 대속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쳤고 기도회를 주관하고 특별예배를 인도하는 등 오산인들을 신앙인으로 무장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오산을 졸업한 이들 중 민족과 인류를 위해 희생 봉사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그의 이러한 신앙교육이 남긴 값진 유산 때문이요, 그가 세운 이러한 신앙중심적인 학풍 때문이었다.

 

오산에 부임한 지 2년 후 그는 교장의 자리를 맡아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남강이 자기는 학교의 운영만 맡고 교육을 고당이 맡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김기석은, 고당이 학교의 책임을 맡은 1915년부터 교장직을 물러나는 1919년까지 5년간을 '오산학교 교육의 황금시대'라고 하였다. 이 때 백인제 백봉제 김주항 주기용 박동진 주기철 김택호 이약신 김동진 한경직 임창선 김항복 김홍일 조진석 등 한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고당이 교장에 취임한 그 다음해(1916)에 입학한 한경직은 스승 고당에게서 배운 성경과 지리 특히 사도행전 강의를 오랜동안 기억한다고 하면서, "선생의 교육방침은 철저한 신앙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며 학문과 지식을 배워서 민족중흥에 투신할 수 있는 애국자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고당은 오산에서 신앙과 실천에 바탕한 민족교육을 시행하였다.

 

5. 기독교 운동과 사회 활동의 접목 - 평양 YMCA 總務

 

고당의 행적 중 필자에게 석연하게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1919년 2월 27일 都寅權과 함께 상해로 가려다가 江東에서 붙잡힌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2년의 언도를 받았고 이듬해 1920년 1월에 가출옥되었다. 남강 또한 3 1운동 주도자로서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고당은 남강을 면회하고 이 해 9월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돌아왔다. 3 1운동 때 오산학교는 일제에 만행으로 교사가 불탔다. 고당은 교사 학생과 함께 임시교사를 지었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오산학교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인가하지 않아 1921년 4월에 오산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한다. Y는 1914년에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평양 Y는 1920년 11월부터 준비하여 그 이듬해 3월 21일 남산현 예배당에서 '각 교파 교인들과 사회인사 8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기회장 김동원의 개회로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들은 "평양 교계만 아니라 민족적인 지도자들로서 장 감 양교파 지도자들이 이처럼 결속된 것"은 이채로운 일이었으며, 초대 임원진은 회장에 김득수 부회장에 김동원 총무에 조만식이었다. 창립취지문에서 그들은 자유와 인도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 것을 주장하고 만국청년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경천애인의 복음으로 經을 삼고 청년의 지덕체 三育의 발달로 緯를 삼았음을 강조하고 평양에서 늦게나마 시작된 이 청년회운동에 크게 호응하기를 권고하였다.

 

"조선의 제 2도시로 신문화 발전의 영원이요 기독교의 중심지인 우리 평양에 이러한 기관이 우금까지 설립되지 아니함은 실로 기괴한 사실이요 또한 유감천만으로 여기던 바이더니, 다행히 작금 수년에 우리 청년은 크게 각성한 바 있어, 혹은 부허경박하고 무위안일에 답하고, 혹은 사리에만 급급하던 可憎 可憂할 지경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수양과 사회활동에 전심하려는 크게 경하할 경향이 있음을 본 오인은, 우리 청년은 이제는 차차 세계의 청년으로 더불어 보조를 아울러 인류의 문화와 행복을 위하여 만분의 공헌이 있기를 바라며, 따라거 평양 청년을 위하여는 영원무량의 행복이 되기를 위하여 '평양기독교청년회'를 발기하노니, 오인의 所意를 양해 공명하는 유지 청년 제군은 호응 찬동하기를 절망하노라."

 

고당은, 연보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간 평양의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봉직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전국 Y연합회의 도시부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9년에는 황찬영씨가 기부한 2천여평의 토지에 콩과 고구마를 회원 공동으로 재배하였으며 대동군 청동리에서는 절약저금조합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총무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 Y와 관례를 맺고 있었는데, 1932년 12월 29일 서울의 중앙청년회 회관에서 전국 62명의 대표로 개최된 제 7회 조선 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정기대회에서 고당은 윤치호 유억겸 양주삼 등 15명과 함께 연합위원에 선출된 적이 있고, 1938년에는 평양 Y의 이사로서 회장 김동원과 총무 김취성를 도와 기독교청년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당은 좋은 신앙은 좋은 인격을 낳는다는 신념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실천하였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졌듯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에는 추호도 타협이 없었으며 거짓을 싫어하고 꾸미는 것을 미워하였지만, 회무를 처리할 때에 늘 인화와 관용을 중요시하였다. 최승만의 다음 회고에는 고당의 이러한 인격이 배어나 있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위원회 때의 일이다. 그 때의 위원은 李商在 尹致昊 申興雨 兪億兼 李舜基(함흥) 매큔(선천) 金東元 고당 선생과 본인 등이었는데, 의논하는 일은 함흥에 있던 서양인 번스와 중앙에 있던 서양인 간사 내쉬에 관한 일이었다. 중앙의 신흥우 연합회 총무와 협동총무 반하드 씨는 번스와 내쉬도 간사직에서 파면시켜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 중앙과 지방의 의견이 대립되어 상당한 격론이 있었는데 그 때에 가장 열렬히 반대의 의견을 주장한 분이 고당 선생이었다. 아직도 네 귀에 쟁쟁한 것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다소의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를 면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화평을 좋아하면서도 그릇되고 의 아닌 일에는 모른 체하시는 어른이 아니었다. 결코 무사주의나 안일주의로 불의부정에 타협하시는 어른이 아니었다"

 

고당이 기독교 청년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것은 다음 몇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상담을 통해 '민중'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즘 말로 상담이지, 당시로는 억울하고 어려운 일들을 호소하는 것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식민지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들과 고난을 같이하는,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시민들은 고당이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었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吳基永의 회상이다.

 

"선생이 매일같이 기독청년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정말 각 방면 인물이다. 억울한 호소, 딱한 의논, 입학시험에 낙제한 학생의 부형, 낙제의 염려있는 학생의 부형, 지방에서 처음으로 평양 오는 사람의 방문, 심지어 년전에는 出奔한 계집 때문에 찾아 온 노동자도 있었다. 선생은 반드시 이들과 악수하고 친절로써 그의 온화한 성품을 발휘한다."

 

두번째로 그는 기독교청년회에 있으면서 각종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거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고당이 기독교청년회 총무시절에 관여한 대부분의 민족운동, 예를 들면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신간회 운동 등과 또 오산학교 교장에 다시 취임하고 숭인상업학교 이사장으로 활략한 것은 기독교청년회 총무직과 병행하여 수행하였던 것 같다. 그는 기독교 청년회 총무직에 무보수로 봉사하였으나 그 총무직이 갖는 다양한 활동영역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으로 만들어갔음은 부정할 수 없다.

 

3 1운동을 전후하여 교회에서는 금주 금연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8월 24일에는 평양의 조만식 김동원 등 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물산장려회를 창설하고 국산품애용운동에 나섰다. 물론 이 운동은 1922년부터 자급 자족 운동과 병행하여 더욱 본격화되었고 1923년에는 전국적인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에 국산품애용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평양에서는 면려청년회와 평양노회 농촌부와 Y가 크게 협력하였다. 이 때부터 고당은 말총모자와 짧은 수목두루마기와 편리화를 신어 유명하였다. 그가 물산장려운동을 벌이는 기간은 그가 평양Y의 총무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민립대학기성회(1922)에 관여한 것이나 민족운동 단일체인 신간회(1927)의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 있었던 것도 Y총무 시절이다. 그는 Y를 매개로하여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과 민족의식의 사회화를 접맥시킬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및 민족의 지도자로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세번째로 고당은 Y총무 시절에 무엇보다 젊은이들을 깨우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전국 Y 제1회 하령회(1927)부터 3회(1929)에 이르기까지 계속 강사로 참여하였다. 하령회에서 강연한 내용은 당시 기자가 청강하여 Y연합회 기관지인 《靑年》지에 계재하여 그가 외친 내용을 통해 그의 사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강연에서, 전래 초기에 猛進的으로 우리의 제도와 생활을 변화시키던 기독교가 이제는 睡眠 중에 있다고 경고하는가 하면, 어느 박사가 조선을 시찰하고 동경에 돌아와 조선 유학생들에게 했다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조선처럼 일 많은 나라는 없다. 동시에 조선청년쳐럼 사명이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젊은이들을 격려하였고 또 숭실학교 창립자 선교사 삐드워드(베어드, W.M.Baird 裵緯良) 박사로부터 "내가 조선인에게 전도함은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今世에서 민족적 구원을 위함이라고" 들었던 말을 인용하고는 "기독교인인 우리는 何事를 하든지 此 福音을 압세우고 大願을 품고 진정한 봉사가 잇은 후에라야 진정한 수확을 得할 것이다. 결론에 우리 생활은 좋은 신앙 좋은 수양을 가지고 진정한 봉사를 하라 함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고당은 숭실 대강당과 각 교회에서 부흥집회와 민중을 깨우치는 집회를 자주 열었고 지방의 강연에도 부지런히 내왕하여 청년들을 깨웠다.

 

고당은 또 평양 소재의 광성학교와 숭인상업학교에서도 아침 예배를 볼 때에 가끔 설교를 하거나 혹은 강연할 때가 있었다. 채플 시간이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고당 선생의 말씀은 대인기였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유머와 풍자가 있었으며 젊은이들을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朴在昌의 회고다.

 

"그래서 선생은 늘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산을 높이 봐라, 보통 낮은 데에서 옆을 볼 때와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옆을 볼 때와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높이 봐라 그리고 더 멀리 원대한 앞을 봐라, 높이 멀리 크게 지금 당장은 암담하고 당장은 일본의 천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크게 봐라 멀리 봐라(高 遠 大)'라는 말씀을 늘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태산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신념이다'(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납니다".

 

이렇게 보면 고당의 평양Y 총무로서의 활동기간은 그의 기독교 이념을 사회에 적응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인격을 실험하는 때였고, 그가 조선의 조선의 기독교계 및 민족의 지도자로서 발돋움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 한국 기독교계가 가졌던 '예수 천당' 혹은 '말세와 재림' 신앙에 몰입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사회와 민족 속으로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의 신앙체계가 당시의 보수적인 체질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와 민족의 아픔에 대하여 귀를 열어두고 거기에 동참하려는 자세를 늘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고당은 민족말살기에 들어서서 영적 지도자인 장로로서의 위치를 굳굳하게 지켜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신앙과 민족적인 정절을 굳게 지키며 조용하게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이었다.

 

6. 신앙과 사회 경제 - 신앙과 사회운동의 접목 [試論, 未完]

 

기독교인 조만식은 그러면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가. 그는 숭실학교에서 성경교육을 받았고, 동경교회에서는 영수의 직분을, 그리고 산정현교회에서는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져 교회 봉사와 신자들의 신령한 일들을 총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교리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정도를 유지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고당이 민족문제를 생각하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가 고백하는 기독교는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떠한 신앙고백을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代贖하신 피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고백의 터 위에 서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가 숭실에 입학한 당시로부터 1920년대까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서구의 보수적인 신앙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로 미국의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과 신학을 전수받은 서북지방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신봉하고 있었다. 장로교가 강조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는 것, 우일신 하나님과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피조물됨, 인간의 완전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代贖, 성령의 역사, 구원역사의 예정, 세례와 성찬 중심의 성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성도의 부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고당이 숭실학교에서 베어드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관과 역사의식의 폭이 넓긴 하였지만, 그러나 신앙함의 본질에서는 앞서 언급한 장로교회의 신조를 중심으로 그의 신앙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당에게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행위나 실천과 별개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 肉化되어 실천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당 신앙의 장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기의 인격으로 살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초기부터 칼빈주의적인 정교도 신앙과 그 실천을 받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앙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책임과 실천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에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그의 칼빈주의적 청교도성은 생활의 절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구의 칼빈주의가 갖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정직과 신의, 근면함과 절제 절약으로 집약된다. 고당은 생활의 절제성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의 물산장려운동도 사실은 이러한 절제운동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물산장려운동은 또한 민족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신앙적 소산이다.

 

고당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조선교회가 경제방면에 안목이 열리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그 이유의 하나를, 협성신학교의 어느 학생이 선교사의 사업을 비판한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 선교사들은 경제관념을 우리이게 도무지 넣어주지 않은 것이 금일 교회유지와 발전에 큰 장애라"고 간주한 바가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경제생활과 관련하여 의복제의 혁신과 근검절약, 경제책연구 및 교육혁신을 강조한 바가 있거니와 더 나아가서 조선의 교회가 거교단적으로 조선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그 하나로 주장하였는데 장황하지만 살펴보자.

 

"(조선의 빈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에는 희망안과 가능안 두가지가 있는데 희망안은 다만 희망함에 불과하므로 가능성이 거의 없고 가능안은 거의 가능한 것입니다. 가능안인데 이 가능안은 즉 빈궁한 원인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일반 民度未及의 대책으로서는 농민지도 계발 즉 농촌진흥책이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매 미개하여 헤매는 자에게 광명과 생명의 도 외에는 다시 없음으로써이다. 다음에는 복음전도인데 이 복음선전은 농촌진흥의 한 조건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구함에 오직 '알파'요 '오메가'일 것입니다. 즉 전적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一洞一敎會주의 실현과 주일학교 대확장(주일학교 사역자 양성필요)인데 10년 계획으로 일동일교회 실현을 꾀할 것이며 수량도 수량이려니와 특히 이후부터는 질에 유의할 것입니다. 일찌기 배드워드(베어드?) 박사는 말하되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 조선인은 내세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보다 현재의 사회적 구원 즉 실제생활에서 구원을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과연 백성을 위하여 눈물의 전도자, 熱의 종교가, 사랑의 사역자, 情의 설교자가 대량 산출되어야 함이 필요한 사실입니다. 이렇듯 복음선전으로 농촌계발의 필요를 부르짖게 된 실례는 많은데 그 좋은 예로는 利川 의 三洞이 그것입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의

 

1동 신자 극소 술집 두집 極貧 30-40호

 

2동 신자 반수 술집 한집 少貧 40-50호

 

3동 신자 거진 술집 없음 稍富 40-50호

 

위에서 빈부의 원인과 그 비례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바 그 힘의 큼을 가히 짐작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도하자는 말은 보통 꽹과리식의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는 자주 회집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복음전도와 지도자 양성문제는 느린 듯하나, 그러므로 나는 일생을 통하여 주창하는 바는 절약과 검소 그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조선인은 생산이 저능하면서도 소비에는 대담하?로써이고 둘째 토지 가옥을 방매하여 일상용품을 買用하므로써이고, 셋째 수입에 초관되는 지출을 함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선 대세로 보아서 물론 호경기라 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냐 함에 있어서 오인은 반대로 조선엔에게 남용과 사치의 악습관을 주는 악영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남용과 사치를 방지하고 절약과 검소의 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실현케 함에는 이하 몇 가지를 필요할 줄로 압니다. 첫째 지도자급(교원 목사 사회기관인, 청년인도자 등)이 솔선하여 실천 감행할 것. 줄째 30만 기독교도가 단합 실행하도록 통제할 것. 셋째 사회적으로 각 단체가 연합하여 이를 감행토록 할 것. 넷째 각체에 이상촌 건설을 대규모로 시행하여 절약, 검소룰 실천케 할 일 등일 것입니다. 이상으로써 불완전하나마 빈궁조선을 구제할 줄로 믿습니다. 요컨대 일반대중은 생존의 의식을 철저히 가지고 이상적 대인물을 중심으로 한 집중결합이 또한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대션전과 30만 교도의 철저한 각성이 급선 要務라고 생각할 바입니다."

 

고당은 평등 사상과 사회정의 관념은 특정계급의 배제, 사유재산의 제한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상케 해주는 대목이 없지 않다. 그가 '新東亞'와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답변한 바가 있다.

 

"설문에 대한 고당 선생의 답변(II) '만일 내가 세계의 독재자라면, 사회제도와 경제제도 개혁안 이상계획의 지지책 및 반역자는 어떻게 취급할까?' 조만식의 답: 위선 특정계급을 배제하는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강폭한 민족을 억제하여 평등과 평화를 유지하겠습니다. 사유재산을 제한하여 일가족이 10만원 이상의 치부를 금하고 총 산업기관을 민중화하겠습니다. 위선 세계적 불경기 타개착으로는 국제간 개인간을 물론하고 일체의 公私債를 절대로 해방하겠고 일부 국가에 偏在한 金을 약소국가에게 최저 이부로 대부하도록 명할 터입니다. 이상의 계획으 실시하기 위하여는 박애주의를 기초로 하여 적당한 법령들을 발포하겠고 以黨治世主義로 나가겠습니다. 반역자가 있으면 改悛할 때까지 禁錮해 둘 수 밖에 없겠습니다. 인구가 너무 증가하는 것이 病痛이니까 물론 산아제한을 즉각으로 실시하고 교양하며 선전할 것입니다."

 

[미완]

 

7. 信仰과 節操 - 殉敎者와 同行하고 殉民의 길을 가다.

 

 

고당은 1922년 그가 봉사하던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로부터 1905년 분립해서 닭골에 설립된 교회로서, 片夏薛(C.F.Bernheisel) 韓承坤 安鳳周 姜奎燦 宋昌根 朱基徹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한때 朴亨龍이 부목사로 봉사한 적이 있다. 장로로서는 초기에 金東元(1910-) 朴禎翊(1913-) 吳允善(1922-) 조만식(1922-)이 있었고 1930년대에는 劉啓俊(1930-) 金鳳淳(1930-) 鄭在允(1933-) 金燦斗(?) 홍정락(?) 있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사임하고 평양 YMCA의 총무로 부임한 1921년부터 산정현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다가 그 이듬해에 장로가 되었다. 1922년 6월 14일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평양노회에서 오윤선 조만식 등이 장로 시취를 받았는데, 그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 아니면 장로를 원치 않았던지 장로시취에서 불합격하여 오윤선(6월 18일 장립)보다 6개월이나 늦게 그 해 12월 31일에 장립받았다. 오기영의 증언이다.

 

"선생은 장로교의 장로이시다. 일찍이 장로로 추천되어 그 문답을 받을 때 요리문답에 낙제되어 다음 번에야 장로가 되었다. 다음 번에도 대답이 장로답지 못한 것을 말하자, 특등 취급으로 準無試驗 장로가 되었다. 물론 선생이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결코 아니다. 장로 문담에 낙제라는 것도 선생이 아니면 없을 일이다. 그는 장로를 원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에게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는 장로로서 겸손히 교회를 섬겼다. 예배 때는 맨앞자리에 앉았고 당회에서는 말언을 별로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것만 말씀하였다. 黃聖秀는 장로로서의 그러한 고당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고당과 같은 장로가 있었기에 산정현교회에 그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있게 되었고 특히 주기철 목사 같은 이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 나갔고 나중에는 산정현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의자가 없이 맨바닥에 앉던 시절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친(황보익 목사)께서는 어린 나에게 "그 분이 민족의 영도자요,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요 백성의 모범이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고당 선생님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였습니다. 산정현 교회 장로님이신 선생님은 당회에서 별로 말씀하신 일이 없으셨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간혹 무게있는 발언을 하심으로 그의 인격의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하며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을 감독선도하였으며 특히 그러한 당회 후원을 받아 교계의 거성인 강규찬목사, 박형룡박사(전 총신대학장) 송창근 박사(전 한신대학장) 그리고 한국기독교 순교사상의 샛별인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고당은 장로로서 노회와 총회에도 참석하여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와 행정을 지도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봉사하였다. 193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0회 총회가 금강산 온정리 기독교수양관에서 회집되었을 때 고당은 평양노회의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그는 변인서 홍택기 이인식과 함께 절차위원으로 선임되어 회기동안 총회의 제반 회의과정을 점검하였다. 그는 또 총회에서 선임하는 이사로서 김우현과 함께 세브란스의학교의 이사가 되었다. 또 평양노회의 보고를 통해 그가 교장 혹은 이사장으로 있던 숭인상업중학교를 30만원의 재단법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총회에 보고되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만주사변(1932)을 일으키고 중일전쟁(1937)을 확대하였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전시체제의 구축은 더욱 악랄해졌다. 일제의 마수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형태로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뻗치고 있었다. 이 때 고당은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셔와 그가 신사참배반대의 선봉장이 되도록 격려하면서 이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고당과 주기철의 관계는 오산학교에서 시작된다. 경남 웅천 출신인 주기철은 고향에서 사립 開通小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고당이 明治大學을 졸업하고 오산에 부임하던 해에 주기철은 입학하였고 졸업하는 3년간 고당의 지도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주기철은 고당의 제자다. 주기철은 중학시대에 재주가 있고 웅변이 뛰어나 처음에는 정치방면에 유의하였다. 이는 일제강점하에 있는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한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학교 창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그의 재학 당시 이 학교의 교사요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스승의 지도를 받아 주기철은 장차 경제적으로 민족을 구하고자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의 안질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향해 있다가 金益斗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크게 회개하고 중생을 체험하였다. "한 때 민족운동에 열중하였지만 소명감에 불타는" 그는 1921년 평양신학교에 진학,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졸업 후 그는 부산 草梁敎會를 거쳐 마산 文昌敎會에서 안정되고 부흥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1936년 평양의 산정현교회는 宋昌根 목사가 사임, 부산으로 옮기고 후임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 학교와 일부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기독교의 중심지요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대표하는 산정현교회는 이제 일제의 이같은 기독교 핍박과 대결할수 있는 목회자를 은연 중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 목사를 지목하고, 20여년 전 주목사의 은사였던 고당을 주목사의 청빙위원으로 삼아 마산에 파송, 일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한 때 사제관계였던 두 사람은 이제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서 그 관계가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고당은 제자였던 주 목사를 잘 받들었다. 고당의 이러한 자세가 온 교회로 하여금 주 목사를 극진히 받들도록 만들었다. 김인서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예전 서울 안국동 교회를 양반교회라 이르면, 평양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자의 교회라 이른다. 조만식 선생 외에 민족진영의 여러 거성이 장로로 시무하였다. 그래서 산정현교회의 전통은 그리스도 정신에 화한 민족애 그것이었다. 조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시대에 주목사는 오산학교 학생이었으니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다. 두 분이 서로 선생으로 모시는 미덕은 참 부러웠다. 그래서 주 목사의 지도라면 일일이 순종하였고 입옥한 뒤에 전 교인이 효자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받들었다. 예배당문은 봉쇄당하였으나 연보를 거두어 주 목사의 가정은 물론 남녀전도사의 가정에까지 매월 생활비를 제공하되 8 15 예배당문 열기까지 계속하였다. 경찰서에서는 일본에 반역하는 주 목사에게 생활비를 제공함은 背日행위라고 번번이 위협하였으나 信義一貫한 산정현교회는 이에 굴하지 아니하였다.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사되게 함에는 吳부인의 격려와 산정현교회의 힘도 컸었다."

 

김인서의 지적과 같이,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격려하는 한편 가족들을 보살폈다. 산정현교회가 주 목사와 전도사 가족들에게까지 생활비를 제공하게 된 데에는 바로 고당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함으로써 신앙의 순결과 민족적 절조를 지키는 주 목사를 격려했을 뿐아니라 그 스스로도 민족적인 긍지를 지킴으로 옥 밖에서 옥중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고당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동참하지 않았고, 일제의 학병권유 제의에도 칭병하고 나서지 않았으며 드디어는 시골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당과 산정현교회의 이같은 자세는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주 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주 목사는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산정현교우들과 함께 걸어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를 쓴 安道明은 주기철을 주기철되게 한 산정현교회와 고당 조만식에 대해 이렇게 적절하게 썼다.

 

"펑양 산정현 교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 하에서 강요한 신새참배를 반대하고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교회다. 이 사실로 평양 산졍현 교회 함녀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전 민족적으로 순교와 순국을 완수한 대표적 교회로 알려졌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蘇羊 주기철 목사가 그 고회의 당회장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이러한 표본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조장로와 주 목사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양립되고 조화됨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 평양 산정현 교회 함녀, 역사적으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분가한 교회였지만, 관서 지방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민족주의 애국자가 집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망을 가진 교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南崗 李昇薰 선생도 이 교회와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 교회 장로님들도 평양에서는 굴지의 유지들로 꼽히는 기라성과 같은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평양 산정현 교회가 생긴 것은 그 중심역할을 고당 선생이 무언중에 했었기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에 전국의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탄압이 치열해지니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일본 제국주의 앞에 굴복을 했고 또 민족적 지도자들도 하나씩 변절했다. 이러한 때에 고당 선생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하듯이 創氏改名도 하지 않고 민족지조를 지키며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고 있었다. 이 때에 고당 선생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선두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다른 장로 네명(오윤선 박정익 유계준 정재윤)과 청년집사 네명(한원준 김승기 김경진 김성식) 도합 아홉명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사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철두철미한 민족주의 학교로 꼽히는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였고, 또 신사참배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주 목사가 一死覺悟를 하고 당회장 목사로 부임해 왔다. 조 장로와는 오산학교에서의 사제관계의 인연을 가진 사이이다. 만약 그 때에 주 목사가 다른 교회에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하듯,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더라면 그 교회에서 내어 쫓았을 것이고, 또 반대로 평양 산정현 교회는 주 목사 같은 목사가 아니고 , 일제 앞에서 친일하며 어물어물하는 목사였더라면, 당신 같은 목사는 필요없으니 우리 학교에서 나가시오 하고 내어 쫓았을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산정현교회라는 場에서 정치적인 면의 조만식 장로와 종교적인 면의 주기철 목사의 양립과 조화로서 영광의 승리가 성취되었다. 평양 산정현 교회와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길이 횃블이 될 것이다."

 

옥문 밖에서 순교자와 동행했던 고당은 해방 후 자신을 기대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버리는 殉民의 길을 걸었다. 한 몸이 살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나 혼자만이 살기 위하여 이곳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일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소"라는 비장한 결심은 바로 일제하의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자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崇神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을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活人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길이었다.

 

고당은 그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찬송가의 가사,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모든 것을 이기리라는 믿음으로 일제와 무신론자들을 이기는 삶을 살아간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