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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김홍일 <7> “빈민의 삶 복음적 가치로 변화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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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네를 옮겨 다니며 살던 어린 시절, 가난이 한 사람의 존엄과 가족의 행복을 얼마나 훼손하는지를 보았다. 가난한 사람의 삶을 복음적 가치로 변화시켜 나가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고 믿게 됐다. 우리 역할은 가난한 이가 주체화하는 과정을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나눔의 집은 다양한 주민모임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탁아소 선생님들은 밤늦게까지 가정방문을 하며 탁아소 부모회를 조직했고, 문해 교육 교사들은 어머니 학교 동문회를 조직했다.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시급한 이들에게 모임은 늘 부차적이었다.

사람들을 연결할 방안을 고민하다 마을 단오축제를 열었다.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돼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지역 공부방 수녀, 전도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마을의 큰 축제가 됐다. 월간 마을신문도 발행했다. 주민들이 직접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방식이었다. 배달은 공부방 학생들과 교사들이 맡았다.

1980년대 말 서울의 많은 달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산동네들이 연립주택 밀집 지역으로 바뀌었다. 가난한 세입자들은 의정부 등 경기도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나눔의 집은 가난한 사람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가장 먼저 나눔의 집 가정결연 대상을 임대아파트 주민들로 확장했다. 임대아파트 통장, 새마을부녀회 회장, 마을 방범대장 등에게 방문 봉사와 생활비 지원이 필요한 이들을 추천받았다. 임대아파트 마을잔치가 있는 날에는 대학생 풍물패를 섭외했고 노래방 기계와 음료를 지원했다.

임대아파트 주민지도자 워크숍도 매주 진행했다. 주민들이 느끼는 어려움을 공유했고 외국 사례를 들어 제도적 문제의 개선방안 등을 토론했다. 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를 조직하고 지역 외 대표자들, 주거운동단체, 연구자들과 연대하면서 법 제정 운동을 진행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협동운동을 시작했다. 열악한 영세하청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야학 졸업생들과 함께 공장을 얻었다. 도급제 방식으로 일하면 좋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92년 초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 ‘실과 바늘’이라는 공장을 만들며 처음으로 노동자협동조합을 시작했다.

사장 없이 자신이 노동한 만큼 급여를 받으며 재미있게 일했다.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들으면서 일했다. 친지들의 애경사가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다녀올 수 있었다. 청년들은 여러 공장을 경험했지만 이렇게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일해 본 경험은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경영의 어려움으로 임금체불이 이어지자 95년 한동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는 협동조합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실과 바늘은 여러 지역에서 봉제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의 불씨가 됐다. 서울과 인천의 몇몇 공장들이 모여 협의체를 구성하고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일도 생겨났다.

자발적 생산공동체 운동은 93년부터 주민들의 주체적인 탈빈곤 운동 모델로 정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96년 보건복지부에서 생산적 복지정책의 하나로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을 전국 5곳에서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첫 시범사업으로 진행된 자활지원센터는 나눔의 집이 위탁받았다. 공공부문과 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던 나눔의 집이 지방자치단체와 공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된 것이다. 이는 나눔의 집 선교의 새 전환점이 됐다.

정리=김동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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