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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5월 광주항쟁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 연구 - 김흥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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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항쟁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 연구

 

김 흥 수 (목원대 신학과 교수, 교회사)

 

 

1. 서론

1980년 5월 18일은 광주민주화운동 또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날로 간주되고 있다. 이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후, 전두환 등 일부 정치 군인들이 "헌정질서를 파괴하면서 정권장악을 기도하고, 이에 항거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을 동원해 강경 진압함으로써 다수의 무고한 사상자를 발생케 한 내란 및 반란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진상이 드러나지 않은 채 왜곡되어 오다가 최근 검찰에 의해 "국민 모두에게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고 역사 발전의 수레바퀴를 오욕과 퇴보의 늪으로 떨어뜨린 반국가적?반역사적 범죄"로 단죄되기에 이르렀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에 성공한 후 군의 주도권을 차지한 정치 군인들의 정권 장악 기도는 마침내 1980년 4월부터는 대학생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학생들은 개헌의 속도가 느린 것과 정부가 대통령 선거일을 발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여러 도시에서 시위를 확산시켜 갔다. 이 무렵 시위의 장소는 캠퍼스에서 캠퍼스 밖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5월 14일에는 가장 크고 격렬한 시위가 서울과 대부분의 주요 도시들에서 일어났고 광주에서도 수천명의 학생들이 전라남도 도청 앞에 모여서 '계엄령 철폐'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그후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학생들은 도청 광장에 집결해 '계엄령 철폐', '유신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구호들을 외치면서 평화스러운 시위를 벌였다. 5월17일 전두환은 계엄령을 나라 전역으로 확대하면서 모든 대학들을 폐쇄했으며 공공집회들을 금지시켰다. 계엄령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몇시간 전에는 학생 및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1980년 5월18일부터 10여 일 동안 광주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 시민들의 희생은 정치 질서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그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무장한 군인들이 투입되면서 비롯되었다. 군인들은 다수의 시민들을 학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이에 격앙된 시민들은 시민군을 형성, 맨손으로 또는 무기를 들고 싸움에 나섰다. 10여일 동안 계속된 이 싸움은 5월 27일 무장 군인들이 저항하고 있던 시민군을 굴복시킴으로써 끝났다. 이 날 새벽 광주시를 탈환할 때에도 독재자들이 보낸 군대는 마치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것처럼 전차까지 동원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시민들이 군에 연행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이후 가장 비극적 이 사건은 '광주사태', '광주 민주화운동', 또는 '광주 민중항쟁' 등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이 사건으로 인해 생긴 참혹한 비극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의 이름으로 어떻게 반응해 왔는가를 신앙고백과 신학적 해석의 차원에서 살펴보는 데 있다. 그들은 이 사건에 대한 경험을 단지 인간만의 사건으로 말하지 않고 신과 관련시켜 고백하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구원의 이야기" 그리고 성스러운 사건으로 만들어 왔다. 그와 함께,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신학의 상황화를 시도해 왔다. 여기서 신학의 상황화란 "주어진 역사적 현재에서 성서적 신앙을 새롭게 듣고, 이 현재적 상황에 실천적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이 상황을 분석하고 성서적 신앙의 의의를 새롭게 해명하는 이론적 작업"을 뜻한다. 달리 말해, 신학의 상황화란 역사적 "컨텍스트 안에서 그리고 그 컨텍스트를 통해서" 신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고찰하기 위해 먼저 기도?증언?성명서?설교 등에서 광주 비극에서의 종교적 경험과 고백의 내용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것들은, 폴 리꾀르에 의하면, '사변에서 나온' 표현이라기 보다는 '저절로 나온' 표현, 즉 덜 정립되어진 최초 고백의 표현이다. 그 다음에는 광주에서의 비극적 사건과 그것에 대한 최초의 고백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떻게 사변 속에서 의미가 부여되고 해석되고 있는지를 논문이나 논설, 설교 형태의 글들에서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 장은 광주사건에 대한 반응과 평가가 종교 영역과 비종교 영역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비교한다.

 

2. 광주항쟁 당시의 종교적 고백

 

5월 18일 광주에 주둔한 군인들은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한 채 시위대는 물론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곤봉으로 맞고 채이고 총 개머리판으로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옷을 다 벗기고 속옷만 입힌 채로 벨트로 손이 묶인 상태로 맞았습니다." 군인들의 잔혹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비행은 5월 19일을 지나면서 점점 더 잔혹해져 갔다. 사망자가 속출했다. 그들의 살상 행위는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거나 "나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 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는 시민들의 목격담에서 그 잔인한 정도가 폭로되고 있었다.

성난 시민들도 군인들의 잔혹 행위에 대응했다. 시민들의 이같은 대응은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 지도자들에 의해 폭도들의 난동으로 인식되고 표현되었다. 5월 21일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광주에서의 시민 시위와 관련, 첫번째 담화를 발표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불순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 "난폭한 폭도들"로 부르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인명이 살상되고 폭도로 몰리는 긴박한 상황을 맞이하여 광주의 기독교인들이 보인 첫번째 반응은 기도회와 모금, 그리고 수습위원회에서의 활동이었다. 5월 20일 오전 8시 광주기독병원에서는 기도회가 있었는데, 한 의사는 광주시와 그 시민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젊은이와 학생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이 예배에 참석한 침례교 선교사 피터슨(Arnold A. Peterson)의 증언이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 자신의 군인들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와 아이들을 죽입니까?" 그는 울음을 터뜨렸으며 대부분의 회중들도 울었다. 몇 분간 그는 침묵했다. 예배실은 우는 소리로 진동했다. 그는 지난 이틀간 군인들의 행동과,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겪은 무고한 고난에 대해 깊은 고뇌와 슬픔을 표현하는 기도를 계속드렸다. 그의 기도는 참석한 모슨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잠겨 있던 우려를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이들 의사들과 간호사들과 병원 직원들이 서로와 하나님께 슬픔을 나누면서 보인 그런 즉각적인 깊은 감정의 분출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 이 기도 시간과 드윗 매튜스의 설교 후에, 우리는《십자가 군병들아》라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예배를 마쳤다. 이들 의료진들은 큰 염려와 무거운 마음을 지닌 채로 병원에서 그 날 일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그 예배 시간은 감정이 복받치는 순간들이었다.

 

이같은 참상 체험에 대한 고백은 당시 남동천주교회의 신부로서 시민의 편에서 광주 사건에 깊이 개입했던 김성용 신부의 일기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5월 21일의 일기에서 "피로 물든 석가 탄생일날, 살생을 단죄한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무자비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하고 묻고 있으며, 5월 25일의 일기에서는 "오늘은 성령강림의 대축일이다. 자비있는 날 성령의 은혜로 새 인간이 된 날이다. 그러나 오직 광주지역은 공포와 피비린내가 나는 혼란의 흙탕 속을 방황하고 있다"면서 성스런 시간에 악이 자행되는 현실을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김신부는 이 날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강론을 했는데, 여기에는 광주 시민의 비참한 상황이 고백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네 발로 기어 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와 같이 입을 먹이그릇에 처박아 먹어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가야만 한다. 폭력과 살상을 일상 밥먹기처럼 하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 때리고, 개를 죽이듯이 끌고가고, 찌르고, 쏘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광주 시민은 폭행당하고, 죽이듯이 끌려 가고,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인간 이하의 천한 생명을 지닌 존재였으며, "혼란의 흙탕 속을 방황"하고 있는 존재였다.

광주 시민들은 저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예언자 예레미아의 탄식처럼 "이렇게 수모를 받으며 생애를 끝마쳐야 하는" (예레미아 20 : 18) 존재가 된 것은 비굴한 "과거의 침묵"의 대가이다. 이 상황을 극복하여 "두 다리로 걷고 인간답게 살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져야 한다." 이처럼 그는 분노에 차서 학살자들에 대한 생명을 건 대항을 촉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 이 애국청년들을 누가 폭도라고 쫓아버리는가. 수습하자. 무엇이 어떻든 간에 수습해야만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5월 26일 새벽 전차가 진입해 온다는 긴박한 소식을 듣고나서는 비로소 "용기를 내자. 주여, 구해 주소서. 힘을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다.

같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지만, 시민군에 참여하여 YWCA를 방어하다 5월 27일 새벽 전사한 청년 박용준의 기도에는 김신부의 분노의 감정과 처절한 상황에 대한 절규가 놀랍도록 자제되고 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감한 듯 '죄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애절하게 고백했다.

 

주님, 나는 무엇입니까?

너무 가날픈 존재올시다.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너무 거짓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올시다.

목이 하나뿐이기에 목줄을 달래며

온갖 지저분한 것을 먹고 살고 있소이다.

너무 기이한 운명의 사람이지요.

쓸모 있는 자가 되려고 몸부림쳤지만

고작 남는 것이 초라한 내 모습뿐이었습니다.

죄 속에 파묻혀 어쩔 수 없이 지탱해야만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쓰디쓴 물, 흙탕물보다 더 더러운 시궁창 물을 마시며

하루하루를 영위하고 있는 상태이옵니다.

주님,

무엇을 위해 먹을까, 무엇을 위해 마실까, 아무것도 염려 말라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애도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감당치는 못했습니다.

밤은 어둡고 낮은 밝지만 언제쯤 밝음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

 

그는 자신이 죄에 의존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기도는 죄의 고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죄를 용서받고 싶어하며, 주님께서 "나의 죄, 죄가에 대한 벌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즉 "이 조그마한 한 몸의 희생"을 통해서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그래서 그는 "헬기 소리, 또 총소리" 속에서 "싸우다 쓰러져 간 우리 학우, 그리고 광주 시민"을 보면서 "나도 부끄럽지 않게 일어서리라"고 결연히 다짐한다.

"이 조그만 한 몸"을 희생하기로 다짐하지만, 광주의 처절한 상황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며 그래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조용한 밖, 흐느끼는 듯한 비가 내린다.

모든 걸 씻어 버리려는 듯 조용히

라디오에선 최 대통령의 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신이여! 무엇이오니까?

무엇 때문이오니까?

항쟁시 기독교 평신도들이나 성직자들의 종교적 반응 중 특이한 것은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터슨 목사의 경우이다. 그는 5월 25일 미국 ABC 방송사의 한 기자로부터 지난 한 주간의 사건들에 대해 녹화 인터뷰를 부탁받고는, 미국 남침례회의 해외선교위원회의 공식적 정책은 선교사들에게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사건들의 상세한 추이를 말할 수 없다면서 다만 이같은 위기상황에서 미국인으로서 지내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만을 말하는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어떤 편을 들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언급은 신중히 피했다. 그러나 인터뷰가 끝난 후 그는 선교부의 교회?국가 문제에 대한 정책과 현실 사이에서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다가 "잔혹행위가 저질러졌으므로, 현 상황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피터슨 목사의 경우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지침과 교리를 존중하면서도 인간의 생명이 손상당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교리의 준수보다도 인간의 생명과 진실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경우였다.

이상의 몇가지 사례에서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살상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좌절과 분노를 겪고 있으며, 그런 상황이 전개되는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그러면서도 그 상황에 맞설 것을 다짐하고 있는 점이다. 심지어는 보수적인 신학을 견지하고 있는 침례교 선교사조차도 교회?국가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시민 편에 서서 진실을 전할 것을 결심하였다. 피터슨 목사를 포함한, 침례교 선교사들은 이미 그들이 집전한 5월 20일의 광주 기독병원에서의 아침 예배에서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 들고 앞서 나가 굳세게 싸워라"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부른 바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에 거리를 두어 온 보수적인 성향의 선교사들조차도 인명이 무참히 짓밟히는 광주의 상황에 대해서 저항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비극적인 사건을 보고 체험한 기독교인들에게 그러한 저항 의식이 생기고 있을 때, 시민들과 신자들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당시 광주 계림동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던 조철현(비오) 신부는 5월 19일 아침부터 수많은 전화를 받았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전화를 한 사람들은 절반은 신자들이었고 절반은 일반 시민들이었는데, 시민들은 "시내에서 군인들의 만행이 자행되고 있는데 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항의했고, 신자들은 군인들이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신부님도 조심하라는 안부 전화를 했다. 또 다른 기대는 성직자들이 사태 수습에 나서는것이었다. 조철현 신부는 5월 20일 광주 동구청의 민방위과장과 직원들로부터 "광주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었으니 시민들이 믿을 수 있는 성직자들이 난국을 수습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종교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는 그밖에도 5월 25일 "전국 종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문서는, 모든 종교가 특수한 차이를 초월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의 정신을 신봉하고 있는 줄로 안다면서 종교인들이 전국적으로 궐기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광주 지역의 목사와 신부 등 종교 지도자 몇 사람은 5월 22일 15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5?18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5월 23일 수습대책위원회의 구성원이 다시 조정되었다. 새 수습대책위원회는 당초의 15명에서 5명이 사퇴하고 학생 20명을 추가, 30명으로 구성했으며, 성직자로는 조철현 신부, 신승균 목사, 박영봉 목사가 위원이 되고 윤공희 대주교는 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범교회 차원에서의 기도회가 항쟁 지역에서 처음 열린 것은 5월 25일 주일 오후였다. 그날 낮 12시 30분부터 목포역 광장에서 기독교인 6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목포시 기독교연합회 비상구국기도회'에서는 '광주시민혁명에 대한 목포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을 채택하고 집회에 참석한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기도회를 시작하기 불과 몇시간 전에 작성된 이 선언문은 "광주.목포 사태"의 성격을 "동학혁명, 3.?1운동, 4.19 민주구국 선언의 법통을 잇는 시민혁명"으로 규정하면서 "그리스도의 군병과 그리스도를 또 한번 못박고 군벌독재를 구축하려는 적과의 의로운 투쟁"임을 선언하였다. 살상에 참여하고 이끈 자들은 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주의 백성을 탄압하고 살육하는 오늘의 뿔달린 짐승"으로 보였고, 그들과 싸우는 시민들에게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또 시위 군중에 의해 방송국이 불타는 모습에서는 "우리 하나님이 역사적 현장을 외면하고 있는 이 나라 언론인에 대해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목포의 교회들이 교파와 관계 없이 하나가 되어 참가한 이 기도회는 광주사건에 대한 기독교회의 입장이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표명된 집회였다.

언론의 통제 속에서도 광주 학살 소식은 재빨리 다른 지역으로 알려졌다. 다른 사람을 통해 윤공희 대주교의 보고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은 5월 23일 전국 주교들과의 회합 후 명동 성당에서의 강론을 통해 "사랑하는 같은 민족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입고" 있다면서 "이번 사태에서 희생된 모든 형제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해 주시고 소요가 일고 있는 모든 지역의 형제들이 하루 속히 안정을 되찾고 위정자들은 냉철한 자기 반성으로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우리 모두가 평온한 날들을 보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하였다.

 

정치적 견해차로 빚어진 이러한 불행에 물리적 힘과 힘이 정면 충돌하여 같은 형제끼리의 비이성적 투쟁은 시시각각 가속화되고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우리 모두가 조용히 이성을 되찾고 한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더 이상 같은 땅에서 같은 핏줄의 형제들끼리 피를 흘리는 비인간적 충돌은 저지해야 하겠습니다. 감정적 흥분과 독선적 집념을 벗어버리고 형제적 화해의 기반을 슬기롭게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땅에 회개와 화해의 성령이 임하시도록 진심으로 기도합시다. 이미 여러 수도원에서는 여러 날에 걸쳐 철야 기도로 하느님께 평화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광주 항쟁에 참여하거나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한 목포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비상 구국기도회에서 광주사건을 "시민혁명", "적과의 의로운 투쟁"으로 규정하고, 사건 속에서 "주의 백성을 탄압하고 살육하는 오늘의 뿔 달린 짐과 투쟁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것을 각오했다면, 광주 참상을 목격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만 들은 김추기경은 강론에서 상호간에 이성을 되찾아 더 이상의 충돌을 막아야 한다는 것과 회개와 화해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항쟁 지역에서의 반응이 화해보다는 투쟁 쪽으로 더 기울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광주 사건 당시 광주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일고 있던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이같은 분노와 종교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궐기 요구는, 그 사건이 끝난 후 교회가 그것에 대해 어떤 입장과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으나 교회의 반응은 둘로 갈리어 나타났다.

 

3. 광주항쟁 이후의 반응

 

광주에서의 살상 사태는 5월 27일 새벽 진압군이 도청을 무력으로 함락시킴으로써 일단 막을 내렸다. 6월 이후 광주의 비극에 대한 교회들의 반응은 대체로 진상을 알리는 문서, 구속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재판과정에서의 진술, 추모예배를 통해 광주사건에서 희생된 자들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조찬기도회 등으로 나타났다.

1980년 6월 1일 천주교 광주대주교 사제단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거짓은 폭로되고 진실은 밝혀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면서 "양심과 신앙의 충동을 따라" 사태의 진상을 밝힌다는 점을 강조했다. 계엄사령부의 진상 발표와는 달리, 이 문서는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자위적 항쟁을 강조했는데, 특히 사건 초기 공수부대의 만행을 강조하였다. 이 문서는 군이 "한국 근대사상 유례 없는 유혈 사태를 유발하여 놓고 그 첵임을 광주 시민에게 전가"하고 있다면서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잔인한 만행에 대해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을 통탄하였다. 사제단은 군인들의 만행 속에서 인간의 잔인성과 일그러진 모습을 발견했지만, 치안 부재의 상태에서 "곳곳에 흩어진 돌맹이?유리?최루탄 파편을 쓸어내는 시민들, 총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던 의사?간호원들, 생명을 내맡기며 젊은이를 보호했던 운전사들, 어느 때보다도 가장 선량했던 세칭 부랑아와 버림받은 이들, 방망이를 휘두른 공수부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우리 모든 광주 시민들"에게서는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긍지를 발견했다.

광주 사건으로 구속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종교적 반응을 보인 성직자는 김성용과 조철현 신부 두 사람이었고 평신도로는 명노근 교수와 홍남순 변호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앙인으로서 수사관들의 잔혹한 고문과 투옥생활 속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무엇을 체험하고 고백했을까? 먼저, 김성용 신부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2년 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1981년 8월 15일 형집행 정지로 석방된 인물이다. 1980년 10월 23일의 1심 보통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그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느다면서 "나를 이렇게 한 그 사람들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받을 벌을 생각하니, 벌이 그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대, 4대에까지 걸쳐서 내려질까봐" 잠을 못이룬다는 진술을 했다. 이 진술은 이 시기에 그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후의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는 그는 투옥생활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나단의 책망과 다윗의 회개 이야기를 인용, 학생들을 나단 예언자에 비교하고, 다윗이 회개했듯이 현재 정권을 잡은 자들도 진상을 밝히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철현 신부는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학생들과 함께 도청에서 함께 활동한 인물이다. 그 역시 최후 진술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받는 자신의 처지를 마치 거대한 바위 앞에서 바위를 넘어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어 그 앞에 주저앉아버린 노파에 비교하였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 나는 당혹감을 느꼈고 , 혐오감과 울분, 그리고 분노가 일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그는 구약성서의 죄많은 성읍 니느웨와 요나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신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요나에 비교하였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죄의 도성임에도 불구하고 니느웨를 아끼셨듯이 자신도 요나 선지자처럼 소명을 받고 광주사태 동안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두 신부들은 투옥과 재판 과정에서 시위대를 다윗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 나단에, 자신을 회개하라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요나와 동일시하고 하나님을 회개를 요청하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죄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읍에 자비를 베푸시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아울러 자신들과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세력들을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으로 구별함으로써 그것에 의해서 그들의 분노와 당혹스런 처지를 극복해 나갔다.

고등군법회의에서 15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1981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홍남순 변호사의 종교적 고백은 위의 성직자들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검찰의 취조를 받는 자리에서 조철현 신부를 만났을 때, "조신부님, 어디가 하나님이 있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소?"하고 통분과 항의의 고백을 하였다. 이것은, 그가 인간에 대한 살상이 자행되는 상황을 신의 부재 상황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명노근 교수는 징역 10년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을 "기독교 장로로서 신앙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말하였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추운 감방에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분명하신 음성을 듣고 이 고통을 참을 수가 있었다." 그에게 예수님은 당시의 민중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십가자에 처형된 존재이며, 악을 행하는 자에게라도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남긴 자로 고백되었다. 이러한 고백 속에서 그는 "내가 당한 수모와 광주사태로 받은 상처를 참아내고 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으며, 따라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기도하고 있다." 이처럼 투옥상태에서 그가 발견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다.

1980년 6월 이후 광주의 비극에 대해서 교회가 보인 반응은 가장 전형적인 반응은 희생자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도회와 추모예배를 갖는 것이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국은 6월에 들어서면서 6월 9일부터 한 주간을 기도주간을 정했으며, 전주에서는 전주 시내 전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참여하는 기도회를 6월 8일 밤 완산교회에서 2천여 명의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다. 이 기도회에서는 장로교 합동측의 서은선 목사가 "예레미아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교회측의 이러한 반응은 시위에 참석한 광주 시민들을 불순분자?불량배?폭도들로 규정하고 그들을 역사에서 배제하려는 정부의 시도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것은 마침내 교회와 정부의 충돌로 이어졌다.

광주에 대한 기억을 배제시키려는 정부의 방식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교회들이 광주의 희생자들의 아픔을 나누고 그들의 투쟁을 기억하기 위하여 갖는 기도회나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좋은 예는 1982년 5월 18일 광주 YWCA 회관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광주기독교연합회, 광주기독교청년연합회 공동 주관으로 광주항쟁의 희생자를 위한 예배를 드리려 하자, 정부는 같은 날 예배 직전 언론기관과 반공연맹 전남지부 등 각종 관변 단체를 동원하여 '새광주 건설 도민단합대회'를 개최하고 추모예배 주최자들을 불순 종교세력, 좌경화 종교집단 등으로 매도한 일이었다. 7만여 명이 참석한 이 대회는 "일부 불순 종교세력들이 광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기도하고 있으며, 거론하기도 싫은 광주사태를 들먹여 광주인들로 하여금 두 번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책동하고 있다"고 규탄함으로써 광주의 비극을 망각하고 싶어했다. 이와는 달리, 같은 날 2천여 명의 교직자와 신도,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예배에서 고영근 목사는 설교를 통해 "5?18은 순국의 피를 흘린 의거"라고 전제하고 "2년 전 피흘린 선열들의 뒤를 따르자"고 호소함으로써 광주를 기억하려고 하였다. 이날 남성성당에서도 윤공희 대주교 집전으로 추모 미사가 열렸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방식인데, 그것은 조찬기도회를 통해 집권자들을 광주 시민을 보호한 용사들로 미화시키는 방식이었다. 교회가 정부의 광주에 대한 기억의 저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한 것은 8월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포함, 20여 명의 교회 지도자들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두환 일행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나라와 겨레 그리고 교회를 위해 기도했지만, "일찍이 군문에 헌신해서 훌륭한 지휘관으로 나라를 방위하는 데 충성을 다하게 하신" 것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또한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여러 해 동안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돼 있는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운동에 앞장설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도 드렸다. 이처럼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는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에베소서 2 : 2) 사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교회 지도자들 중 다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도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그의 독재정치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거나 그의 치적에 감사해 한 사람들이었다. 전두환은 인사말을 통해 "광주 사태는 불순분자의 배후 조종으로 발생하여 6?25 이후 최대위기"였다는 것, 그리고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힘을 모아 노력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는 달성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며 이 자리를 빌어 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이러한 결의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전대통령 취임 축하 조찬기도회를 가졌다. 이 기도회는 9월 30일 아침 신라호텔에서 1,300여명의 각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기도와 설교 그리고 축복 찬양에 힘을 얻은 전두환은 인사말을 통해 "오늘의 기도회는 당면한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주복지 국가를 건설하여 교도소와 불량배가 없어져 모든 사람이 명랑한 가운데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는 막중한 임무를 성원해 주기 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두환에 대한 성원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성원은 조찬기도회가 끝난 후 그 기도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은 유호준 목사와 순서를 맡은 몇 사람이 청와대에 초청되었을 때에도 다시 반복되었다. 유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전대통령에게 우리 민족을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어떠한 위난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하자 전두환은 "유목사님 말씀 들으니까 용기가 배가되는 느낌입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회상한다. 이런 식의 결의와 성원을 통해서 전두환 정부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협력해 나갔고 따라서 광주는 기억 속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된 형태로 기억되어 나갔다.

교회와 사회에서의 광주의 비극에 대한 상이한 반응은 '기억의 저주'와 '경건한 회상' 사이의 싸움이었다. 경건한 회상을 통해 광주를 기억하려는 기독교인들은 광주와 하나님을 연결시킴으로서 광주 사건을 거룩한 사건으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교회가 하나님이나 해방자 예수와 연결시켜 광주사건을 성스러운 구원의 사건으로 만들어 나갔다면, 사회에서는 종교적 표상 대신 동학혁명과 4?19혁명과 같은 집단적 표상에 연관시켜 그 사건에 해방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4장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광주의 비극적인 사건은 한국의 교회와 사회 모두에게 몇가지 중요한 영향을 끼쳐 나갔다. 먼저 반미 성향이 증대해 나간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1982년 3월 18일 부산에 있는 미문화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지부에 대한 방화 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방화의 주된 동기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한 폭력적 진압에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이 사건으로 한국 사회는 다시 한번 경악했으며, 국민들에게 광주사건에서 미국의 책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문부식과 김은식은 부산 고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한 사람은 최기식 신부였다. 이 사건 이후 사회와 교회에서, 특히 대학사회에서 반미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홍근수 목사에 의하면, 광주민주항쟁은 처음으로 미국이 "한국을 위한 해방의 천사나 큰 형이 아니라 무서운 발톱을 가진 악랄한 제국주의라는 사실과, 한국 민중에게는 등을 돌려대고 군사 독재자를 뒤에서 떠받치고 있는 장본인이요 원형"이라는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남한교회에서 일각에서 일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북의 김일성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1986년 10월 옛 동독의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인 종교단체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도 반미선전에 참가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실제로 광주항쟁은 전통적인 한미관계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이는 광주항쟁이 지닌 주요한 의미 중의 하나로 광주항쟁을 하나의 지역적?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민족운동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반미성향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마침내는 남한의 교회와 사회에 한편으로는 자주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동조하는 친북 세력을 형성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영향은 광주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나 그 상황을 방관했던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죄 의식의 문제였다. 시인들은 죄 의식을 반복해 토로함으로써 그것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내면에 침전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다가 광주의 아우성이 귀청이 메어지게 들려올 때도 없지 않았지만, 대개는 아주아주 어렴프레 들려오는 걸 들으면서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치솟는 분노를 멍든 가슴으로 새기는 선생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 얼마나 아프실까 얼마나 깜깜하실까 하는 것도 제게는 관념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점점 더 깊은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죄책감은 특히 오월에 되살아 난다. "오월이 오면 부끄러워라 / 눈을 감아도 천 길 바다 속 / 터지는 가슴으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다.

부끄러움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해 5월 살려달라는 아우성 비명소리 / 차마 듣지 못하고 보리밭에 누워 / 멀리 고속도로 군용트럭 긴 행렬 바라보았다." 멀리서 긴 행렬을 바라보기만 한 시인은 자신 속에서 일고 있는 분노를 발견하지만, 그 분노는 죄 없는 보리이삭만을 후려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해 5월 아직 덜 익은 보리밭 / 조선낫으로 죄 없는 보리 이삭 후려치며 / 허공 후려치며 밭둑에 멀거니 서 있는 / 수양버드나무 조선낫으로 찍었다." 이러한 죄의식과 자신에 대한 분노는 현실 저 너머에서 둥둥 떠다니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개인적인 죄도 아니다. 이들에게서 죄 의식은 철저히 구체적이고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의 죄 이해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죄 이해와 다를 바 없다. 시인들은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 /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면서도 광주는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내면에 한 덩어리의 원죄로 남아 있어서 "우리는 살아 남아서 / 그 죽음 그 참변으로 평생을 울지 않으면 안된다"고 비통해 한다.

이처럼 광주 참상으로 인한 충격과 그 사건 후 우리 사회에 확산된 죄 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형태를 바뀌거나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들에 기대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광주의 한 성결교 목회자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교인들의 의식화 작업에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광주사건 때문에 평범한 가정 주부에서 투사로 변신한 예가 있는가 하면,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됐으며, 앞서 언급한 피터슨 목사의 경우처럼 교회?국가 관계를 새롭게 이해한 경우도 있었다. 예수교장로회(개혁측)의 변남주 목사는 광주사건 당시 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에 참여하고 장례위원으로 1백여구의 시신을 처리하면서 칼빈의 저항권 개념을 다시 발견하였다. 광주사건 당시 신학생이었던 김병균 목사는 후일의 증언에서 그 사건이 자신의 신앙 내용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고 5?18유가족과 부상자들의 통곡을 보면서, 선언적인 인권운동에서 벗어나 민중이 주체가 되는 변혁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고 한다. 1989년 6월초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2, 3천명의 사상자를 낸 천안문 사건 후 중국교회에 생긴 주목할 만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인들의 급증 현상이었다. 1990년 4월 북경의 한 소식통은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는 데 반하여 공산당 당원 가입에는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숫자가 신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통계에 의하면, 북경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당원 수는 1984~1986년에 비해 1987~1989년에는 45%나 감소된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삼자애국운동위원회에 소속된 교회에 등록한 신자의 수는 170%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천진이나 성도 같은 도시들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이 시기 중국교회의 급성장의 주역은 지식인과 학생들인 것같다. 몇몇 도시에서는 전체 학생 수의 10%가 기독교를 믿을 만큼 개종자가 현저하게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약 천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중국에 있으며, 이들 중 40%는 지식인들과 학생들이다. 이것은 특히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참여로 말미암아 교인수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안문 사건 후 기독교로의 급증하는 개종은 서구문화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영적 공허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인간관의 변화와 관련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북경대학의 한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천안문 사건의 잔악성은 그들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믿음을 회의하는 대신, 죄와 대속의 교리를 가르치는 기독교 교리를 깊이 생각하게 해주었다. 예컨대, 기독교로 개종한 한 학생은 기독교를 "현실적인 종교"로 이해하면서 "기독교는 우리 인간에게 악한 성향이 있으며 또한 이 악한 성향이 정복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개종했다고 고백했다.

우리 사회의 경우에도, 광주 사건에서의 인간 존재의 악마적 성격에 대한 체험과 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것이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나 대규모의 개종으로 연결되었는지는 소수의 케이스 외에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80년 광주사건 직후인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80 세계 복음화성회'에 한국 개신교 역사상 유례없는 인파들이 몰려들었던 것만은 확인할 수 있다. 이 대규모 전도대회에는 8월 14일 저녁 집회에만 270만 명이 모였고 총출석으로는 1,725만명을 기록했다. 개종자들의 수도 70여만 명에 달했다.

4. 신학적 사유 속의 광주

 

1980년대 중반 이후 공포정치가 어느 정도 완화되면서 교회 일각에서는 광주에 대한 고백을 신학적 언어로 해석하는 현상이 생겨났다. 다시 말해, 1985년 이전에는 다소 감정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자세로 광주의 비극을 바라보았다면, 1985년 이후에는 그 비극을 신학의 언어로 체계화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였다.《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가 일반사회에서 진행된 광주항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첫 결실이라면, 교회에서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의 이름으로 나온 글 "광주항쟁의 성서신학적 의미"(1985)가 신학적 해석의 첫 결실이었다.

"광주항쟁의 객관적인 분석을 뛰어넘는 신앙적 해석을 위한 제안"이 담긴 이 문서는 1980년 5월 18일의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군시작전을 "환란의 날이며 질책과 치욕의 날"(열왕기하 19 : 3)로 보면서, 광주의 학살에서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잃고 우는 라헬"(마태복음 2 : 16~18)의 통곡소리를 들었다. 학살로 인해 생긴 민중의 한은 라마에서 들리는 라헬의 울음소리이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요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자이므로, "라헬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말이다. 따라서 오늘, 라헬의 울음소리는 우리 한민족 전체의 통곡소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죄 없는 어린 양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하고, 광주의 죽음도 "우리 모두의 죄악 때문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죽음"(이사야 53 : 5~1)이다. 광주의 희생자들은 민족의 대속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젊은 예수, 작은 예수"들이다. 십자가형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죄의 권세,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예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광주의 죽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의 원초가 됨을 알 수 있다." 이 죽음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부활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죽음을 선포하는 세력에게 죽음을 선포할 수 있는 부활, 민중의 부활이 광주항쟁의 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KSCF의 문서가 광주의 이야기를 성서의 이야기와 동일시하면서 "오늘의 그리스도는 광주민중항쟁의 죽음"이라고 단호하게 고백한 반면,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는 〈새벽〉에 실린 자유기고가 이시돌의 글 "광주항쟁의 신학적 조명"은 그리스도론보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먼저 묻는다. 필자는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의 표현을 빌려, "하나님은 인류를 억압의 쇠사슬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이 하나님은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직접 개입하시는 "역사의 주재자"이다.

1988년에는 대한성서공회 번역실장으로 있던 구약학자 민영진이 "광주에서 나올 진혼의 사제 나훔"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구약성서의 하박국서?요나서?시편 등에서 예언자들과 사제들과 시인들의 절규에서 "1980년 5월 광주 현장에 나타난 사태를 목격하고, 하나님께 항의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광주의 그 현장에 없었던 이들에게 그날을 증언"하는 음성을 듣는다. 시인의 "살려달라 울부짖는 이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시편 22 : 1)하는 항의와 "나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때려 잡는데 잠자코 계십니까?"(하박국 1 : 13)하고 따지는 하박국의 모습은 광주 시민의 모습이요 광주시민의 항의이다. 하박국이 왜 잠자코 계시느냐고 따지자 하나님께서는 다만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 살리라"(하박국 2 : 4)고만 대답한다. 하박국도 광주 시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답변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답변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들더러 믿고 기다리라고"만 한다. 이처럼 광주의 참상에서 민교수가 발견하는 하나님은 믿고 기다리라고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답변이 고작 "기다려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고 하는 것이었을 적에 이와 같은 답변이 과연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의 물음은 니느웨 성읍에 대해 맺힌 원한 때문에 니느웨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에게 따지고 대드는 요나를 연상시킨다. 나훔서에서는 "극성스레 원수 갚으시는 하나님"(나훔서 1 : 2)이 등장한다. 이스라엘과 무관한 사람들은 나훔서보다는 요나서를 더 높이 평가하고 "광주의 절규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광주의 참상을 겪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이면 용서니 화해니 한다. 이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심판, 보복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날 등에 관한 신학은 아예 무시되고 있다." 그러나 중재자가 되려면 피해자의 흘린 피와 호소에 귀를 귀울이고, "용서치 아니하리라"(아모스 7 : 8; 8 : 2)는 하나님의 응답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화해는 그 다음의 일이다. 이처럼 민교수는 광주의 비극을 회상하면서 기다리라고만 말하는 하나님보다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상을 더 부각시킨다.

광주의 비극 속에서 이시돌이 해방의 하나님에, 민영진이 심판의 하나님에 주목한다면, 김진홍 목사는 1991년에 쓴 글에서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하나님"을 떠올린다. 그는 눈물을 씻어주는 하나님 상을 신약성서에서 발견한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시록 7 : 7) 백성의 눈물이란 무엇인가? 그는 백성의 눈물을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설명해 준다.

광주에서 오십여리 떨어진 어느 마을에 다섯 자녀를 거느리고 일곱마지기의 논에서 농사짓고 살아가는 한 농사꾼 부부가 있었다. 다섯 자녀 중 맏아들이 전남대학에 들어갔다. 가난한 농가에서 나머지 네 동생들은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만을 마치고는 형을 밀어주기 위해 힘을 합하였다.

그래서 그 가정은 큰 아들 하나에 희망을 걸고, 다른 식구들은 희생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아들이 광주항쟁 때 총 맞아 죽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손이 뒤로 묶인 채 총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전쟁포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 군인들이 해도 너무한 짓을 했습니다. 그 아들 시체를 본 부모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온 가정의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의 시체가 망월동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어머니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달이 만월로 밝은 밤이면, 그 어머니가 호미를 들고 걸어서 망월동 묘지로 왔습니다. 새벽녁 묘지에 도착하면 아들 무덤을 호미로 파서 관이 닿는 데까지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에 입을 대고 어머니가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개야! 에미가 왔다. 너 목타지 않냐?"하고 물은 후 다시 어머니가 아들 목소리를 흉내내어 답하기를 "엄니 나 목 말라. 나 사이다 한 병 사다줘" 하면, 어머니가 다시 말하기를 "그래, 불쌍한 내 새끼야, 내가 사이다 사다 주마" 하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날이 밝아지면 다시 제 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의 눈물이란 것입니다.

 

김진홍에 의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런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하나님이고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역시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나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백성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 상은 한국 사회와 광주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즉 압제 상태와 독재자들 그리고 민중의 고난을 통해서 본 하나님 상이다. 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고통스런 현실을 결코 외면하시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인 신관, 즉 '전지'?'전능'?'무소부재'를 강조하는 무감각하고 감동이 없는 신 이야기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그의 백성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광주 비극 당시 어디 계셨고 어떤 일을 하셨을까? 이것을 묻는 글은 이대섭의 "그리스도인은 광주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광주항쟁의 신학적 조명"(1995)이다.

 

80년 5월 학살과 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하나님은 공포에 질린 시민들과 함께 계셨고, 광주의 청년?학생?시민?민중들이 쓰러져 갔을 때 함께 쓰러지셨고, 시민군과 함께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물리치셨으며, 양동 시장, 대인동 시장 아주머니들과 함께 김밥을 싸서 시민군과 학생들을 먹이셨고, 열흘 간의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신 곳에 계셨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 즉 절규의 피안에서 "응답자 또는 해답자"로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고 절규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광주의 청년,?학생?시민?민중들이 쓰러져 갔을 때 함께 쓰러지"신 하나님이다. 앞서 언급한 홍남순 변호사는 광주비극을 직접 체험하고 그 일로 고문과 재판을 받으면서 "어디가 하나님이 있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했다. 이대섭은 그 사건으로부터 15년 뒤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은 공포에 질린 시민들과 함께, 쓰러지는 민중과 함께, 김밥을 싸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계셨다. 그 예로 이대섭은 당시 광주 숭일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강구영의 체험을 든다.

 

갑작스런 총소리와 함께 나의 몸은 옆으로 나뒹굴었다. 다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아! 내가 총에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엄습하던 생전 처음 느껴본 공포, 두려움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번듯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 와중에서도 어떤 낯모르는 손길이 나를 부축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도 그 손길의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그저 그 손길이 이끄는 대로 현장을 빠져 나왔을 뿐이다. 어쩌면 그 손길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홍남순의 질문이 고난 경험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백이라면, 이대섭의 답변은 그 고백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대섭을 포함하여 민영진?이시돌?한국기독학생총연맹 등의 광주 비극에 대한 신학적 조명들은 "주어진 종교적 사상이나 현상들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지니게 되는 의미의 연구", 즉 '재평가'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재평가는 가치의 유지를 위한 재해석이며, 엘리아데(Mircea Eliade)식으로 말하면 "성스러움의 유지를 위한 재해석"을 뜻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광주사건 이후 기독교회를 포함한 한국사회에서는 역사 인식의 형태로 또는 신학적 진술의 형태로 그것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수행되어 왔으며 그 작업들은 결국 1980년 5월의 광주를 성스런 시간과 공간으로 만들려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사건이 터지면서 집권세력은 그 사건을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유발된 폭도들의 무장난동"으로 규정했다. 이 입장은 맨처음 1980년 5월 21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에서 표명되었다. 그는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간첩들"의 선동에서 기인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말하자면 전두환 등 집권세력은 시민들의 시위와 투쟁을 '광주폭동사태'로 인식했고 그것은 5공화국의 공식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시민들의 행위를 폭도들의 질서 파괴 행위, 즉 '광주폭동사태'가 아니라 불의의 세력에 저항했던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강한 도전을 받았다.

역사적 의미가 부인된 채 '사태'로만 인식되었던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퇴진하고 나서부터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광주의 비극에 대해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려는 노력의 첫 결실이었다. 그후 이러한 평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광주민중항쟁으로 부르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계급적?민족적 모순이 만들어낸 지배층과 피지배 민중간의 대립"이 특정 시기와 특정 장소에서 폭발된, "군부의 거대한 거대한 무력에 맞서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쟁취코자 전개된 민중투쟁"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의의를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사회의 민족과 사회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고 억압하는 국내외적인 반민족?반민주?반민중적 세력에 대한 확고한 인식의 틀을 세워 주었으며, 그러한 적대세력에 대한 투쟁과 변혁주체로서의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것을 보여"준 데서 찾았다.

광주사건에 대한 민중항쟁으로서의 재평가 작업과 함께, 그 사건이 발생한 공간과 시간은 성스러운 공간과 시간이 되어갔다. 광주는 "의로운 지역"이며, 망월동 묘지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이 묘지는 광주직할시 북구 운정동 산 46번지 광주 시립 공원묘지 제3묘역을 일컫는 명칭으로, 1980년 5월 27일 새벽까지 계엄군에 의해 숨진 주검 중에서 신원이 확인된 시신 126구가 집단으로 묻힌 곳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5월이면 정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위령제와 추모 기도회가 열렸는데 전국에서 참배객들이 찾아와 광주의 희생자들을 경건하게 기억하고 추모하는 성스러운 제단이 되어갔다. 이곳을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는 사람들은 망월동 묘지가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부정한 자로 분류되는 전두환?노태우 등 대통령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방문조차도 반대하거나 막았다. 망월동 묘지를 성스럽게 만드는 작업과 함께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해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최근 광주항쟁 기념행사는 아주 다양하다. 1966년 5월의 경우, 광주대교구는 5월 13일 망월동 묘역에서 윤공희 대주교 집례로 5?18광주항쟁 16주기 추모 미사를 드렸으며, 개신교 교회들로 구성된 광주기독교연합회는 5월 18일 한빛교회에서 광주항쟁 16주년 기념예배를 가졌다. 이러한 종교단체들의 행사 외에도, 5?18민중항쟁 16주년 기념행사위원회의 주관 하에 광주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든 추모 인파들과 광주 시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야제와 기념식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5월 18일에는 관공서에까지 조기가 게양되었다. 이것들은, 광주항쟁 기념 행사가 미국의 현충일(Memorial Day) 행사와 같은 정도의 공민종교(Civil Religion)의 성격을 띠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형태의 의례와 공통가치 체계를 지니고 있고 또 이 기념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광주항쟁에서의 희생자들과 숭고하게 결부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성스러운 제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광주사건이 민중들의 민주항쟁으로 그 의미가 부여되고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과 같은 과거의 해방운동 편에 있는 사건으로 경계가 그어지고 구별됨으로써 거룩한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면, 기독교인들은 그 사건에서의 참상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했던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성스러운 사건, 구원의 사건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비극적인 상황을 방치한 듯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신학적으로 사유해보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해방운동사의 연속선상에서 광주사건을 이해하려고 한 종교계 밖의 재평가를 수용하면서도 출애굽과 같은 하나님의 해방운동의 연속선상에서 또는 구약성서 속의 불의한 세력으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과 연계시켜 광주사건을 이해하려고 해왔다. 따라서 세속적 재평가에서는 한국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중시되고 있다면, 종교적 재평가에서는 한국사회의 해방운동과 기독교의 해방전통이 함께 중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5월의 광주는 성스러운 시간과 성스러운 공간일 수 있다. 민영진 교수는 성지가 되려면 다음 세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광주가 그 후보지라고 한다.

 

1) 무죄한 이들의 피가 소리치고 있는 곳이어야 한다. 2) 원혼의 한을 달래는 진혼의 사제가 있어서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당한 원과 한을 기억하고 원수 갚으시는 하나님께 원수 갚아 주실 것을 비는 기원이 그치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3) 원한에 사무친 피해자들을 설득시키려는 하나님의 노력이 받아들여지는 곳,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를 확인한 피해자들 가운데서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기도가 나와 궁극적인 평화가 깃들일 기틀을 마련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 후보지 가운데 한 곳이 우리나라 광주다.

 

이 인용문에서 주목할 점은 성스런 공간의 한 조건으로서 용서와 화해의 기도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지는 가해자들이 용서를 빌 때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듯 싶습니까?"(창세기 50 : 19)라고 말하는 피해자들의 용서와 화해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면서도 화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광주 참상에 대한 종교적 반응들 중의 한 특성이다. 화해와 관련하여 김진홍 목사는, 사울에 의해 기브온 사람들이 학살된 후 왕권을 잡은 다윗이 기드온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내가 무엇으로 보상을 하여야, 주의 소유인 이 백성에게 복을 빌어 주시겠소?" (사무엘하 21 : 3)라고 한 말과 기드온 사람의 대답을 인용한다. "사울이나 그의 집안과 우리 사이의 갈등은 은이나 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사무엘하 21 : 4)

그러나 화해는 진상 규명을 전제한다. 김진홍에 의하면, 참된 보상은 피의 보복에 있지 아니하고 "역사에 묻혀버린 그 사건의 사실을 사실대로 드러내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기드온 사람의 요구이고 광주 사람의 요구이다. 채수일 목사도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한다. "십자가 없는 화해, 즉 죄의 고백과 심판 없는 화해는 값싼 은혜일 뿐이다. 심판은 진상규명과 다르지 않다.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규명만이 피해자의 적극적인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김병균 목사는 진상 규명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서 화해만을 외치는 성직자들을, 아모스 예언자에게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말아라.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다"(아모스 7 : 13)라고 말한 "이 땅의 아마샤들"로 규정한다. 그들은 1980년의 조찬 기도회에서 그랬듯이 학살자들에 대한 회개의 촉구 없이 용서로 감싸주기에 바쁘다.

5. 결론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 교회는 광주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형태로 반응해 왔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일을 해왔는가 하면, 그 사건을 통해서 성서적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도 해왔다. 전자가 진상규명 활동이나 기도회, 예배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후자는 신론이나 기독론에 대한 신학적 진술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형태의 활동들을 통해서 교회는 광주사건을 인간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거룩한 사건으로 고백해 왔으며, 그 고백은 광주사건의 역사적 컨텍스트에서 체계화되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큰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 작업은 내용에서 그리고 연구자의 수에서 볼 때 아직 초기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해석 작업의 결과가 좀더 체계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대학의 신학자, 즉 신학의 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도 광주사건에 대한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신학의 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광주사건에 관한 한, 현재까지는 대학이나 신학교의 교수들보다는 사건과 상황의 전개에 민감한 기독 청년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대학 밖의 신학자 한 두 사람이 그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더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신학적 반응의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의 정체에 집중되고 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존재라는 추상적인 이해보다는 역사의 현장과 관련시켜 심판하고 해방시키고 눈물을 닦아주는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에서 신학의 상황화가 진행되고 있는 증거를 어렴풋이 발견한다. 광주사건을 통해서 성서가 새롭게 해석되고 해방자?심판자?위로자 같은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형상화된 하나님 상이 부각되는 것이 그 증거들이다. 아직 광주는 "우리나라의 십자가"로서만 이해되고 있지만, 그것이 아시아의 십자가, 세계의 십자가가 되려면 광주 민중들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전세계 하나님의 백성들의 양심과 정의, 자유가 부활하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 작업은 한국신학을 창출하려는 이들 앞에 놓여진 가장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신학의 상황화가 광주사건에 대한 교회 밖의 평가 작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교회 밖에서는 동학이 광주항쟁의 뿌리로서 중요시되고 있으나, 신학적 해석 작업에서는 그것을 넘어서서 성서적 세계에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교회 밖의 평가 작업에서 항쟁의 성격이 강조됨으로써 그 사건에서의 민중들의 해방운동의 차원이 주로 부각되고 있다면, 신학적 해석에서는 민중들의 고난이 중시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과 위로가 부각되고 있는 것도 두 평가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사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과 해석이 교회 밖의 평가와 다른 점을 또 하나 든다면, 그 비극적 사건의 책임을 가해자들에게만 돌리지 않고 자기 반성을 하고 또 화해의 문제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성용 신부는 그 비극의 한 원인을 국민들의 비굴한 "과거의 침묵"의 대가에서 찾았으며,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의 문서는 광주의 죽음을 "우리 모두의 죄악 때문"으로 반성하고 있다.

교회와 사회 모두에서 5월 광주항쟁은 성스러운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비극적 참사로 기억하면서도 전 민족이 "환희의 광장으로 나서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지명관 교수의 말대로, 우리는 아무리 고되어도 그 날에 대한 레퀴엠을 계속 불러야 한다. "그들의 양심과 청춘을 지켜가기 위해서도 결코 그 날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점에서 광주항쟁은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으며, 성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5월을 기념비나 신화로 만드는 데 열중하는 일보다 신화의 지평 위에 새로운 행동의 실천을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은 광주의 그 날들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경청해야 할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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