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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가다머의 칸트 미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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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의 칸트 미학 비판

김종걸(미국 쇼트칼리지 종교철학 교수)

 

 

목 차

Ⅰ. 서론

Ⅱ. 근대의 美意識

Ⅲ. 칸트의 주관주의 미학

1. 칸트의 취미와 천재이론

1) 자유미와 부용미

2) 미의 이상

3) 자연미와 예술미

4) 취미와 천재와의 관계

Ⅳ. 가다머의 칸트 비판

1. 미적 현상

2. 미적 무차별

Ⅴ. 가다머의 칸트 미학 극복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 대한 설명을 통해

1. 놀이와 예술작품 그리고 주관주의적 해석

2. 놀이에 대한 가다머의 해석

Ⅵ. 결론

 

 

 

Ⅰ. 서론

 

이 글에서는 가다머(H.G. Gadamer, 1900- )가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에서 설명하고 있는 미학이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다머가 칸트(I. kant, 1724-1804)의 근대(近代) 미의식(美意識)을 비판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봄으로써, 칸트의 미학이론의 틀과 가다머의 미학이론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의 제1부의 Ⅰ?Ⅱ장에서 칸트의 근대의 미의식 개념과 미적 경험에 대한 부분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의 미의식 개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방식으로 ‘놀이’(Spiel) 개념을 제1부 Ⅱ장의 1?2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가다머의 칸트 비판에 대한 탐구는 미학이론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음은 물론, 해석학 분야에서 논의되는 예술작품에 대한 이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Ⅱ. 近代의 美意識

 

가다머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미의식’은 근대의 주관주의(subjectivism 혹은 subjectivity)에 뿌리를 두고 있는 技術論的 思考(technological thinking)에서 연유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관주의란 인간의 주관적 의식과 그것에 근거를 둔 이성의 확실성을 인간의 인식을 위한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데까르트(R. Descartes, 1596-1650) 이전의 철학자들(pre-Cartesian philosophers),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고를 존재 자체의 한 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주관성을 자신들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식의 객관성을 주관성에 근거 지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자 하는 바의 본성 자체에 의해 인도되는 변증법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인식 혹은 지식은 그들이 소유물처럼 갖고 있는 사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참여하여 그 자체가 드러나도록 하는 그런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인들은 진리에의 접근을 이루었는데, 이때의 진리는 주관적으로 확실한 인식에 근거를 둔 근대의 주관-객관적 사고의 한계들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가다머의 접근방법은 근대의 조작적이고 기술론적인 사고보다는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다머에게서 진리는 방법적으로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도달된다.

다머에 따르면, 非美的 經驗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美的 意識’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근대적인 용어이다. 사실 그 개념은 데까르트 이래로 사상이 일반적으로 주관주의화 되어 온 결과이다. 즉 모든 지식을 주관적 자기 확실성에 근거 지으려 했던 경향의 산물이다. 이러한 주관주의적 경향에 있어서 미적 대상을 명상하는 주관은, 지각들을 수용하고 때로는 순수한 감각적 형태의 직접성을 향유하는 공허한 의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은 여타의 보다 실제적인 영역들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용’(content)에 의해서는 측정 평가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식’(form)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적 경험은 주관의 자기 이해 또는 시간과 관계 맺지 못한다. 단지 그것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시간에 영향받지 않는(atemporal) 계기로 간주될 뿐이다.

이런 식의 주관주의적 사고 방식은 여러 가지 결과를 산출해 내게 된다. 우선, ①그것은 지각의 향유 이외에는 예술을 설명해 줄 어떠한 적절한 방식도 갖고 있지 못하다. ②예술에 대한 내용적인 측정이나 평가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의 예술은 인식(knowledge)이 아니기 때문이다. ③예술의 형식과 내용은 억지로 분리되어 미적인 쾌(快)는 형식에만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④예술은 더 이상 세계 내에서 명확한 위치를 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예술과 예술가 자신 모두가 어떤 식으로도 세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⑤예술은 그 기능과 분리되며, 예술가는 사회 속의 위치로부터 분리된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파괴함으로써만 감지하게 되는 예술의 명백한 성스러움(holiness) 은 전혀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예술가도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이 감정이나 미적인 쾌의 형식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면, 예언자이고자 하는 요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

 

 

Ⅲ. 칸트의 주관주의 미학

1. 칸트의 趣味(Geschmack)와 天才(Genie) 이론

가다머는 칸트의『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제1부 제1편의 분석, 다시 말해 자유미와 부용미, 미의 이상, 자연미와 예술미, 취미와 천재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미학이론을 주관주의적이라고 결론 내린다. 가다머의 이러한 입장은『진리와 방법』 제1부 1?2장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가다머가 비판하는 칸트 미학의 주제를 칸트의『판단력 비판』에서 확인하면서 가다머의 입장이 유효한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칸트는『판단력 비판』제1편 ‘미적 판단력의 분석’의 제1장 ‘美의 분석’에서 趣味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취미란 ‘美를 판정하는 능력’이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식을 위하여 그 표상을 오성에 의해서 객체에 관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표상을 構想力(Einbildungskraft, 아마도 오성과 결합되어 있는)에 의해서 주관과 주관의 쾌?불쾌의 감정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취미판단은 인식판단이 아니요, 따라서 논리적이 아니라 미적이다. 그리고 미적이라 함은, 그 규정 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판단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취미판단의 제2 계기인 ‘분량’(Quantit?t)과 관련한 설명에서, 槪念을 떠나서 보편적 만족의 객체로서 表象되는 것을 美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칸트는 바로 뒤이어 § 8. 에서 취미판단에 있어서 표상 되는 만족의 보편성은 단지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미적 판단이 주관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보편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칸트 역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취미판단은 어떤 대상에 관한 만족을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보편 타당한 판단은 또한 언제나 주관적으로도 타당하다. 다시 말하면, 판단이 주어진 개념 하에 포함되어 있는 일체의 것에 대하여 타당한 것이라면, 그 판단은 어떤 대상을 이 개념에 의하여 표상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 보편성으로부터는, 다시 말해서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는 미적인 보편타당성으로부터는 논리적 보편타당성이 추론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판단은 전혀 객체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칸트는 위에서 제기된 문제, 즉 취미판단이 누구에게나 보편 타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근거가 필요한가 라는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접근하고 있다. 취미판단은 누구에게나 동의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언명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대상에 찬동을 보내고, 자기와 같이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언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취미판단은 무엇이 만족을 주는가 또는 무엇이 불만족을 주는가를 개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感情(Gef?hl)에 의해서 규정하는, 그러면서도 보편 타당하게 규정하는, 하나의 주관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칸트는 이 원리를 共通感(Gemeinsinn, sensus communis)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칸트의 입장에 따르면 취미판단은 공통감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공통감을 전제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칸트는 공통감을 전제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정의 보편적인 전달 가능성(allgemeine Mitteilbarkeit eines Gef?hl)은 하나의 공통감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공통감을 상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이 공통감을 심리학적 관찰에 입각해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보편적 전달 가능성의 필연적 조건으로서 상정한다고 한다. 이러한 필연적 조건은 어떠한 논리학이나 인식 원리에 있어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본다.

취미판단과 관련하여 칸트의 탁월한 설명은, 취미판단이 주관적이면서도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취미판단은 언제나 객체에 관한 單稱判斷(einzelnes Urteil)으로서만 내려진다. 그러므로 취미의 객관적 원리란 있을 수가 없다.(§ 35) 우리는 취미판단은 주관적이고 논리적 판단은 객관적이라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논리적 판단은 어떤 표상을 그 객체의 개념 밑에 포섭하지만, 취미판단은 그것을 전혀 어떤 개념 밑에 포섭하는 일이 없다. 만일 취미판단이 표상을 어떤 개념 밑에 포섭한다면, 필연적 보편적 찬동이 증명에 의해서 강제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미판단은 일종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논리적 판단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이 요구하는 보편성과 필연성은 객체의 개념에 따르는 것이 아니요, 따라서 단지 主觀的인 普遍性과 必然性이다. 우리가 취미판단이 지닌 성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취미판단이 종합판단이면서, 동시에 선천적 판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칸트 자신도 판단력 비판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선험 철학의 일반적인 문제, 즉 선천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wie sind synthetische Urteil a priori m?glich?) 라는 문제에 종속된다고 말하고 있다.

 

1) 자유미와 부용미

 

우선 가다머는 『판단력 비판』에서 전개되는 자유미와 부용미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검토한다. 칸트에 따르면, 美에는 두 가지 종류, 즉 自由美(freie Sch?hheit)와 한갓된 附庸美(anh?ngende Sch?nheit)가 있다. 자유미는 대상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관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으나, 부용미는 그와 같은 개념과 그 개념에 따른 대상의 완전성을 전제한다. 자유미는 이 사물 또는 저 사물의 (그 자체만으로서 존재하는) 미를 말하며, 부용미는 어떤 개념에 종속되는 미(제약된 미)로서 어떤 특수한 목적의 개념 하에 있는 객체에 종속되는 것이다. 칸트는 꽃들을 자유로운 자연미로 본다. 그래서 자유미를 (한갓된 형식에서 보아서) 판정할 때에 그 취미판단은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그러나 인간의 미, 말(horse)의 미, 건축물의 미는 그 사물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를 규정하는 목적의 개념을, 따라서 그 사물의 완전성의 개념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그것은 부용미이다. 요약하자면, 자유미는 感官(Sinnen)에 나타나는 것에 따라 판단을 내리고, 부용미는 思考(Gedanken) 안에 있는 것에 따라서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자유미는 純粹한(reines) 취미판단을 내리고, 부용미는 應用된(angewandtes) 취미판단을 내린다.

여기서 가다머는 칸트의 이러한 구별은 특별히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위험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자연미와 (예술의 영역에서) 장식(Ornament)은 순수한 취미판단에 적합한 미로서 나타나고, 이것들은 그 자체로(f?r sich)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의 체계에서 순수한 취미판단이 중요하다면, 부용미에 속하는 많은 것들은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다머는 만일 미학이 순수한 취미판단 안에서 발견된다면, 즉 취미의 기준이 단지 전제되지 않는다면, 예술을 정당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가다머는 칸트의 ‘순수한 미적 취미판단’(reinen ?sthetischen Geschmacksurteil)이라는 개념은 ‘자연’과 ‘예술’의 구별과는 무관한 하나의 방법론적인 추상(methodische Abstraktion)이라고 비판한다.

 

2) 미의 이상

 

가다머는 두 번째로 칸트의 ‘美의 理想’(Ideal der Sch?nheit)에 관한 이론을 다루고 있다. 칸트에 따르면,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개념에 의해서 결정할 취미의 객관적 규칙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판단은 미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판단의 규정근거는 주관의 감정이지, 객체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의 보편적 기준을 일정한 개념에 의하여 제시해 주는 취미의 원리 같은 것을 찾고자 함은 헛된 수고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미의 이상에 도달하는 것인가? 선천적으로인가 아니면 경험적으로인가? 또한 어떠한 종류의 미가 이상에 알맞은 것인가?

칸트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에 대하여 이상을 찾아내야 할 경우, 그 미는 막연한 미가 아니라 객관적 합목적성의 개념에 의해서 고정된 미가 아니면 안되며, 따라서 그 미는 전연 순수한 취미판단의 객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知性化된(intellktuierten) 취미판단의 객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理想이 어떠한 종류의 판정근거(gr?nden der Beurteilung)에 있어서 성립하여야만 하는 것이든, 거기에는 대상을 내적으로 가능케 하는 목적을 선천적으로(a priori) 규정하는 어떤 하나의 이성의 이념 -일정한 개념에 의거하는- 이 기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운 꽃이라든가, 아름다운 가구라든가, 아름다운 경치라든가 하는 것의 이상이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또한 일정한 목적에 종속된 미, 예를 들어, 아름다운 주택, 아름다운 樹木, 아름다운 정원 등에 관해서도 이상이란 표상될 수 없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러한 목적들이 그 개념에 의해서 충분히 확정되고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 합목적성이 막연한 미의 경우에 있어서와 거의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오직 자기의 존재의 목적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자, 즉 인간만이 이성에 의하여 자기의 목적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으며, 혹은 자기의 목적을 외적 지각으로부터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경우에도, 그것을 인간의 본질적 보편적 목적과 비교하여 이 목적과의 합치를 또한 미적으로 판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만이 미의 이상을 가질 수 있다.

트는 ‘미의 理想’은 미의 規準理念(Normalidee des Sch?nheit)과 구별된다고 말하고 있다. 미의 이상은 오로지 인간의 형태에 있어서만 기대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인간의 형태에 관해서는 이상은 道德的인 것(Sittlichen)의 표현에 있어서 성립한다. 도덕적인 것을 떠나서는 이 대상은 보편적으로도 또 적극적으로도(단지 격식에 맞는 현시에 있어서 소극적으로만이 아니라) 만족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을 내면적으로 지배하는 도덕적 이념들의 가시적인 표현은 물론 經驗(Erfahrung)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가다머는 위에서 논의된 칸트의 ‘미의 이상’에 관한 설명은 앞서 자유미와 부용미에서 제시되었던 순수 취미판단에 기초를 둔 형식 미학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라고 본다. 가다머는 미의 이상에 관한 논의에서 칸트가 자연미에 관해서보다는 예술작품에 관해 분명하게 주목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미의 이상에 대한 설명은 미적 이념과 도덕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의 理論, 나아가 예술의 본질을 정당화하기 위한 예비적인 시도로 본다. 결국 가다머가 보기에, 칸트의 순수 취미판단의 논의와 미의 이상에 대한 논의는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주관에 입각해 美를 설명하던 칸트와는 달리, 이제 ‘예술’은 自律的인 現象으로 될 수 있다(Jetzt erst vermag die Kunst zu einer autonomen Erscheinung zu werden)고 말한다. 그리고 예술의 과제는 더 이상 자연이념의 현시에 있지 않고, 자연 안에서, 그리고 인간적-역사적인 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기 만남에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다머의 이 표현은 예술작품에 대한 분석에서 ‘놀이’ 개념과 ‘지평융합’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다.

 

3) 자연미와 예술미

 

칸트는『판단력 비판』§ 48에서 자연미와 예술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연미(Natursch?nheit)는 하나의 아름다운 事物이며, 예술미(Kunstsch?nheit)는 하나의 사물에 관한 아름다운 表象이다. 하나의 자연미를 자연미로서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어떠한 사물이어야만 하는가에 관한 개념을 미리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 합목적성(목적)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러한 판정에 있어서는 목적의 지식을 떠난 한갓된 형식(Form)이 그 자체만으로서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예술의 산물로서 주어져 있으며, 또 그러한 것으로서 아름답다고 언명되어야 할 경우에는, 예술은 언제나 그 원인(또 그 인과성) 속에 하나의 目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관한 개념이 먼저 그 기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사물에 있어서의 多樣이 그 사물의 내적 규정과, 즉 목적과 합치한다는 것이 곧 그 사물의 완전성이다. 그러므로 예술미를 판정할 때에는 그 사물의 완전성이 동시에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자연미를 (자연미로서) 판정할 때에는 이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칸트는 자연미와 예술미를 비교하면서 자연미의 優越性(Vorzug)을 강조한다. 자연미가 예술미보다 우월하다 함은, 자기의 도덕적 감정을 陶冶(kultiviert)한 모든 사람의 순화된(gel?uterten), 그리고 철저한(gr?ndlichen) 심적 태도와 합치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예술미에 대한 관심이 전혀 道德的 善에 충실하다든가 또는 단지 그것을 애호한다든가 하는 심적 태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자연미에 대하여 직접적인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자연의 미를 판정하기 위한 취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언제나 선한 심령의 標徵(Kennzeichen)이요, 또 이러한 관심이 습관적이며, 자연의 靜觀(Beschaung)과 흔히 결부되는 것이면, 그러한 관심은 적어도 도덕적 감정에 호감을 가지는 심적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이렇게 하여 칸트의 자연미와 예술미에 대한 논의는 예술자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성의 문제와 연결되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인식능력 일반에 있어서 표상된 사물의 합목적성에 바탕을 두는데, 이것은 자연미에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취미판단이 자신의 비지성화된(unintellektuierten) 순수성에서 가리키는 것은 결코 어떤 내용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미의 방법적 측면에서의 장점이라고 가다머는 본다. 또한 자연을 아름답게 경험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이 그러한 미를 불러일으켰다는 사고를 갖는다면, 이러한 사고의 관심은 이미 도덕적 감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연에 있어서 미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는 한, 그 곳에는 이미 도덕적 감정이 잘 형성되어 있음을 뜻한다.

한편 아도르(Theodor W. Adorno(1903-1969))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양자 중 어느 한 쪽을 강조하기보다는 상호 얽혀 있다고 말한다. 자연미가 예술미와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은 자연미에 대한 체험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양자가 매개되어 있음은, 자연에 대한 예술의 관계나 예술에 대한 자연의 관계에서 알 수 있다. 예술은 자연이 약속하는 바를 실현하려고 한다. 예술은 그러한 약속을 깨뜨림으로써만, 즉 자신에게 되돌아감으로써만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런 한에 있어서 예술이 어떤 부정적인 것, 즉 자연미의 결합에 의해 유발된다고 하는 헤겔의 주장은 참이다. ...자연이 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는 일, 그것을 예술작품은 실현한다. 즉 예술작품은 눈을 뜨게 만든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연 자체는 그것이 활동의 대상으로 이용되지 않는 한, 憂愁나 平和 혹은 다른 어떤 표현을 띠게 된다. 예술은 형상을 통해 자연을 없애는 가운데 자연을 멀리하지만, 그럼으로써 또한 자연을 대변한다.

칸트의 자연미와 예술미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천재’ 개념에로 넘어가게 된다. 칸트는 아름다운 대상을 아름다운 대상으로 판정하기 위해서는 ‘취미’가 필요하나, 미적 예술 그 자체를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그러한 대상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4) 취미와 천재와의 관계

 

칸트는 § 46에서 ‘미적 예술은 천재의 예술(Sch?ne Kunst ist Kunst des Genies)'이라고 말한다. 천재는 藝術에 규칙을 부여하는 才能이다. 달리 표현해서, 천재란 생득적인 心意의 소질이요, 이것을 통해서 자연은 예술에 規則을 부여하는 것이다. 미적 예술은 그 산물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을 스스로가 생각해 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하는 규칙이 없으면 하나의 산물은 결코 예술이라고 일컬어질 수가 없으므로, 주관 안에 있는 자연이 (그리고 그 주관의 능력들의 조화에 의하여) 예술에 대하여 규칙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미적 예술은 오직 천재의 산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천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첫째로, 천재는 예술에 대한 재능이요, 학문에 대한 재능이 아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규칙들이 선행하고, 그것이 학문상의 방법을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천재는 예술의 재능인 만큼, 목적으로서의 산물에 관한 일정한 개념을, 따라서 오성을 전제하지만, 또한 이 개념을 현시하기 위한 소재, 즉 직관에 관한 하나의 표상도 전제한다. 따라서 천재는 구상력과 오성과의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다. 셋째로, 천재는 일정한 개념을 현시하여 소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발휘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의도를 수행하기 위한 풍부한 소재를 내포하고 있는 미적 이념들을 제시하거나 표현하는 데 있어서 발휘된다. 따라서 천재에게는 構想力은 규칙들의 어떠한 지도도 벗어나 있지만, 그러나 주어진 개념을 현시함에 있어서는 합목적적이 것으로서 표상된다. 넷째로, 구상력이 오성의 법칙성과 자유롭게 화합할 때에 절로 이루어지는 無意圖的인 주관적 합목적성은 이 양 능력의 균형과 조화를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들에 의하면, 천재란 곧 하나의 주관이 그의 인식 능력들(구상력과 오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때에 발휘되는 그 주관의 천부적 재능의 모범적 창조성이다. 그리하여 한 천재의 산물은 다른 천재에게는 模倣(Nachahmung)의 범례가 아니라 繼承(Nachfolge)의 범례인 것이다. 이상의 ‘천재’에 관한 칸트의 설명은 자연미에 부여한 우월성의 맥락을 천재 개념 역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천재 개념이 수행하는 것은 단지 미적 예술의 작품을 미적으로 자연미와 동등한 자리에 세우는 것이다.

 

 

Ⅳ. 가다머의 칸트 비판

1. 미적 현상(Aesthetic Phenomenon)

 

이제 가다머는 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의 美意識에 근거한 예술작품에 대한 견해는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 자신의 체험과 직접 모순된다고 말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예술작품을 접하는 ‘經驗’은 하나의 ‘世界’를 열어 준다. 이 경험은 단순히 형식 바깥에서의 감각적인 쾌가 아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의 작품을 ‘對象’으로 보지 않고, ‘世界’로 간주하게 되자마자, 즉 우리가 작품을 통해서 세계를 보게 되면 우리는 곧 예술이란 ‘감각지각’이 아니라 ‘인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술과 접할 때 우리의 세계와 자기이해의 지평들은 확대되어 우리는 세계를 새로운 빛(ein neues Licht)에 비추어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세계를 처음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심지어 생활 속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태도들도 예술에 의해 조명될 경우에는 새로운 빛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가다머는 예술작품은 우리 자신의 세계와 분리된 세계가 아니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경우에도 사실은 그것이 우리의 자기이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예술작품을 접할 경우에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외부에 있는 전혀 낯선 우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非美的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다 현재적으로 된다.

가다머는 우리가 타자의 통일성과 자아성을 ‘세계’로 간주하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충분하게 우리 자신의 자기 이해를 완성시키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이해하는 가운데 우리가 체험했던 바와, 우리가 누구인가를 재정립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체적인 자기 이해는 균형을 이루게 되면서 완성된다. 예술작품의 경험은 우리 자신의 자기 이해의 통일성과 연속성 속에서 포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생동적으로 현실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세계는 사라져 버리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작품의 세계’는 잠시 동안 자기 완결적이고 자족적인 세계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기 외부의 척도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현실(reality)의 모사로서 측정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우리 자신과 충분히 연결된 세계를 드러낸다는 주장과 그 질문이 어떻게 양립되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가다머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고 있다. 그것의 정당화는 존재론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위대한 예술작품과 접하여 그것의 세계 속으로 들어 갈 때, 우리는 귀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향을 떠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작품이 존재한다고 말할 뿐이다. 예술가는 존재(what is)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예술가는 ‘이미지’(image)와 ‘형식’(form)으로 현실을 포착한다. 그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허상의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고 활동하고 존재하는 경험과 자기 이해의 바로 그런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예술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형식’에로의 변형은 ‘存在 眞理’에로의 變形이다(Die Verwandlung ist Verwandlung ins Wahre). 예술의 정당성은 그것이 미적인 쾌를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술에 대한 이해는 작품을 방법적으로 대상화하거나 내용으로부터 형식을 분리해 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의 개시성(開示性) 및 작품 자체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을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세계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는 이 세계를 우리 자신의 척도나 방법론의 척도에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만 이 세계를 우리의 진리로 만들어주는 자기 이해의 구조에 이미 참여해 있음으로 해서만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한다. 이러한 자기 이해를 매개하는 것이 ‘형식’이다. 예술가란 자신의 존재 경험을 이미지나 형식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형식은 지속적이며 반복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의 활력(energy of being)이라는 성격과 함께 ‘작품’의 성격을 갖는다. 또한 형식은 ‘持續的인 眞理’(das bleibende Wahre)가 된다.

이미지에로의 변형 과정에서 겪는 재료의 변화는 단순한 ‘변경’(Ver?nderung)이 아니라 ‘변형’(Verwandlung)이다. 과거에 재료가 갖고 있던 성질은 이제 사라져 버리며, 예술작품 속에 현재 실현된 것은 지속적인 진리가 된다. 형식과 함께 재현되어 나타나는 진리 혹은 존재의 융합은 완벽하게 이루어져 새로운 요소가 나타난다. 총체적인 매개(totale Vermittlung)가 포괄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형식 속에서의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은 그 자체의 세계가 되는 것이지, 어떤 것에 대한 단순한 묘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명백한 자율성은 미적 의식의 無目的的이고 고립된 자율성이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인식의 매개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했던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인식은 공유된 인식이 된다.

한편, 위에서 언급된 가다머의 ‘총체적 매개’ 개념은 또한 미적인 것과 예술작품 내의 기타 요소들과의 철저한 無差別(혹은 無區別)을 요구한다. 이 점은 가다머와 칸트의 큰 차이점이 된다.

 

2. 미적 무차별(Aesthetic Nondifferentiation)

 

가다머는 미적인 것과 비미적인 것과의 칸트식의 차별(구별)은 예술작품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는 데 충분치 않다고 본다. 예술의 매개는 전체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작품과의 만남이 갖는 미학적 혹은 형식적 측면은 예술작품에서 ‘말해진 바’(what is said), 즉 ‘의도된 事象(the thing meant)’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미적 차별(구별)성은 인위적이고 타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다머는 미적 차별(구별)과 대조되는 ‘美的 無差別’(?sthetische Nichtunterscheidung)의 원리를 주장한다.

예술작품의 미적 경험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이미지와 형식에 의해 총체적으로 매개되고 의도된 사상, 즉 그 자체 역동적인 ‘세계’이다. 가다머는 詩와 演劇을 예로 들어서 설명한다. 예술작품과의 예술적인 만남에 있어서 우리는 詩를 그것의 재료들로부터 분리해 내려 하지 않으며, 수행을 경험함에 있어서도 의도된 사상을 그 수행으로부터 분리하려해서는 안 된다. 재료와 수행은 둘 다 실제로 사상이 의도하는 바를 행위로 실현시킨다. 그리고 양자는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상호 삼투되어 있는 결과, 이것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인위적이고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가다머는 정확하게 그 요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詩와 그것의 재료 및 詩와 그것의 수행간의 이중적인 차별은 우리가 예술의 향유에서 인식하게 되는 진리의 통일성으로서의 이중적인 無差別(무구별)에 대응된다.” 그는 계속해서 연극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시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그 근거에 놓여 있는 줄거리에 주목하는 것은 시에 대한 참된 경험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객이 줄거리 자체에 주목하거나 공연을 공연으로만 간주하게 되면 연극에 대한 참된 경험을 얻을 수 없다.”

가다머는 칸트 식의 ‘미적인 것’의 고립성을 타파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의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의 예술의 無空間性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장식적 존재’(being decorative)로서의 ‘예술’ 개념을 제안한다. 예술은 무공간적(placeless)이지 않다. 예술은 자신의 공간을 요구하며 그 자체로부터 열려진 공간을 창조해 낸다. 예술작품이란 무공간적인 장소에 수집되어 있는 박물관의 전시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미적인 것으로서의 ‘예술적 이미지’(the art image) 개념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근대에 지배적이었던 ‘藝術觀’ 및 현대적인 전시장을 통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재현’(再現, representation) 개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에서의 ‘장식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장식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은 ‘순수 형식’(pure form), 혹은 ‘경험의 표현’(expression of experience)에 기반을 둔 미학에 의해 그 동안 불식 받아 왔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이러한 길을 찾는데 있어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하나의 이미지가 사물에 대한 模寫와 어떤 측면에서 구별되는가? 둘째,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와 그에 대한 재현의 관계는 어떻게 성립되는가? 분명 예술은 어떠한 사물을 재현하고 있다. 예술은 바로 이 사물로 인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분명히 열려져 있는 세계도 존재한다. 가다머가 보기에, 순수하게 미적인 것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미학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줄 수 없으며, 또한 낡은 의미에서 경험에 기반을 둔 미학도 이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 그리 적절치 못하다. 왜냐하면 둘 다 예술작품을 주관-객관의 이분법에 있어서의 주관에 속하는 것으로 잘못 전제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이제 주관-객관의 낡은 모델을 넘어설 수 있는 설명의 틀을 ‘놀이’ 개념에서 찾고 있다. 이것을 통해서 그는 예술작품의 기능과 목적, 양태와 본질, 시간성과 공간성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Ⅴ. 가다머의 칸트 미학 극복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 대한 설명을 통해

 

1. 놀이와 예술작품 그리고 주관주의적 해석

가다머가 예술에서 ‘놀이’(spiel) 개념을 맨 먼저 도입한 인물은 물론 아니다.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놀이’(spiel)라는 현상에는 수많은 중요한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 놀이 개념을 기존의 근대 미학이론에서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대 미학이론에서는 놀이가 ‘인간 주체의 활동’으로 파악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자신의 세속적 삶을 벗어나 예술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 세속을 떠난 인간 주체에게 快를 주는 일종의 遊戱(playing)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예술가는 ‘形式’을 이용하여 재료를 조작함으로써 감각적인 쾌를 얻어내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지닌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는 마치 칸트가 설명하는 ‘천재’ 개념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가다머는 이러한 이론들에서 모든 것을 인간의 주관성과 관련짓고자 하는 근대의 일반적인 오류를 발견한 것이었다. 따라서 가다머가 말하는 놀이는, 인간 주체를 창조하고 즐겁게 하는 태도나 활동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 주체의 자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분명히 말해서 ‘놀이’란, 예술작품 자체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가다머가 예술과 관련하여 놀이의 개념을 논의하는 의도는 藝術을 主體의 活動과 관련짓는 전통적인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다머의 의도는『진리와 방법』제1부 Ⅱ절 ‘예술작품의 존재론과 그것의 해석학적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미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놀이’ 개념을 출발점으로 선택한다. 우리는 이 개념을 주관적인 의미로부터 탈피시키고자 하는데, 이 주관적인 의미는 칸트와 쉴러, 근대 미학 전체와 인류학을 지배해 온 개념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예술 경험과 관련하여 놀이를 말한다면, 놀이는 태도(verh?ltnis)나, 창작자의 심적 상태(Gem?tsverfassung), 혹은 예술작품을 즐기는 자(감상자)의 심적 상태, 그리고 일반적으로 놀이에서 표현된 주체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놀이는 예술작품 자체의 존재방식(die Seinsweise des Kunstwerkes selbst)을 말한다.“

 

2. 놀이에 대한 가다머의 해석

 

가다머는 놀이의 구조와 그것과 예술작품과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가다머가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놀이’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예술작품이 지닌 존재론적인 성격을 규명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칸트까지만 해도, 예술작품은 인식 객체로서의 하나의 對象(인식 대상)에 불과했고, 그 대상이 지닌 ‘美的 要素’를 드러내는 것이 인식 주관의 목표였다. 가다머가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는 항상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의 입장에 서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예술작품의 근원』Der Ursprung des Kunstwerkes (1952)에서 예술작품 에서 드러나는 ‘美’를 ‘眞理’와의 관련성 속에서 진행시킨다. 그런데 칸트는 ‘미’를 ‘道德性’과 관련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 점이 하이데거와 그를 따르는 가다머 그리고 칸트 사이의 차이점이다. 하이데거는 아름다움(미)은 진리가 생성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또한 진리가 생성되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작품의 작품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자신의 독자적 방식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개시한다. 작품 가운데서 개시, 즉 탈은폐(entbergen), 즉 존재자의 진리가 생성된다. 예술작품 가운데서 존재자의 진리가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진리의 작품 가운데로의 자기 정립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시대 이전의 주관주의적 思潮에 대한 비판에서, 주관주의는 창조적, 독창적이라는 것을 자주적 주체의 천재의 행위라는 의미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에서의 모든 창작(Schaffen)은 (천재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길어냄(Sch?pfen)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가 작품 가운데 자기를 정립할 때, 미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작품 가운데서, 진리의 존재로서 또한 작품으로서, 현상하는 것이 바로 美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을 가다머는 ‘놀이’ 개념을 매개로 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놀이 개념 역시 존재론적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서, 놀이자와 놀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놀이의 존재론적인 성격이 드러나게 되고, 놀이의 존재론인 성격은 예술작품의 존재론적인 성격과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니까 가다머는 우리가 놀이를 할 때에, 놀이에 몰입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놀이가 생겨나게 되는 과정을 들추어냄으로써, 우리가 예술작품을 대할 때 관계하는 작품과 감상자의 만남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놀이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선 놀이는 놀이자, 놀이 규칙, 놀이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놀이는 그 속에 진지함(Ernst)을 가지고 있다. 만일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놀이를 망치는 자(Spielverderber)가 되고 만다. 놀이는 놀이자들의 의식과는 독립되어 있는 그 자체의 역동성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놀이는 주관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객관(혹은 객체)이 아니다. 왜냐하면 놀이는 우리가 그 속에 참여하는 존재의 자기 규정적인 운동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본래적인 주제는 놀이에 대한 우리의 참여가 아니라 바로 놀이 자체이다. 물론 놀이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드러난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주관성들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이다. 놀이는 우리에게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드러난다.

주관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놀이는 주관의 활동, 즉 사람들이 참여하여 자신들의 쾌락을 얻는 데 이용되는 자유로운 활동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놀이 자체가 무엇이며 그것의 성립 과정이 어떠한지를 문제 삼게 되면, 다시 말해서 놀이를 인간의 주관성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으로 간주하게 되면 놀이는 전혀 다른 측면을 띠게 된다. 즉 놀이의 재미가 우리를 그 속으로 몰아 넣는다. 왜냐하면 놀이가 진행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놀이자에게 있어 지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그 자신의 독자적인 정신을 갖고 있다. 놀이자는 그 자신이 어느 놀이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그가 어떤 놀이를 선택하고 나면, 그는 놀이자들에게 그리고 놀이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놀이의 단절된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리하여 놀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계기에 의해 스스로 진행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즉 놀이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가다머는 놀이의 존재론적인 구조를 예술작품의 존재론적인 구조와 연결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에서 이처럼 의도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事象(Sache)들의 존재 방식, 존재의 진리, 즉 사상 자체(die Sache selbst)이다.

이제 예술작품은 단순한 쾌(快)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에 부여된 사건으로서의 존재 진리의 현전이다. 가다머는 예술작품과 놀이 사이의 유비점들을 파악함으로써, 그리고 고유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는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그러한 ‘구조’의 지배적인 모델로 ‘놀이 구조’를 택함으로써, 그는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우선, 예술작품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動態的이고 力動的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예술작품이 고정된 전시 장소인 박물관이나 전시장 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작품이 만들어진 시대를 벗어나서 또한 전시되어 있는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서도) 늘 작품의 고유한 세계를 간직한 채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다머의 견해를 따를 경우, 주관성에 주안점을 두는 미학의 입장은 극복될 수 있으며, 놀이를 이해함에 있어, 더 나아가 예술작품을 이해함에 있어 주관-객관의 도식이 적절치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극복될 수 있다고 표현한 까닭은, 작품의 고유한 존재 세계가 감상자의 세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은 그 작품의 존재 진리를 드러내고 개시해 주며, 감상자의 세계와 만남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측면을 설명하는 가다머의 설명 방식이, 인식 대상으로서의 ‘작품’ 그리고 그것의 ‘美’에 대해서 논하는 칸트 식의 설명 방식보다는 보다 풍성하다는 의미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예술작품, 美에 대한 양자의 견해는 인식론적인 입장과 존재론적인 입장의 차이라고도 보여진다.

 

 

Ⅵ. 결론

 

가다머의 주장이 갖는 기본적인 강점은 그가 ‘藝術 經驗’을 자신의 출발점이자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증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美的 意識이 예술 경험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칸트의『판단력 비판』에서 나타나는 주관주의적 형이상학에 기초를 둔 반성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작품이 단순히 자족적인 주관에 대립해 있는 객관(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예술 경험’이다. 예술작품의 진정한 존재는 그것이 경험되는 과정에서 경험자를 ‘變形’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점은 가다머의 미학 이론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가? 가다머에 따르면, 예술작품이 경험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예술작품 자체가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의 심적 태도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가다머는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예술을 경험하는 주체는 그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은 놀이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도 보여진다. 가다머에 따르면, 놀이도 놀이자의 의식과 독립된 그 자체의 본성을 갖고 있다. 진행되고 있는 놀이의 그 본래의 주체는, 주관성이 아니라 놀이 자체라는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주관성의 태도 방식에 놀이를 관련시키는 데에만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이 방식에만 몰두하게 될 경우, 우리는 미학 이론을 논의할 때에 주관 對 객관, 형식 對 내용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하여 가다머는 주관주의화 된 미학, 즉 -주관-객관, 형식-내용의 이분법의 파산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해석학의 변증법적 존재론적 성격을 정당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놀이’ 개념을 통해서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가다머 논의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그의 놀이와 예술작품간의 유비는 ‘미적 차별성’의 신화를 받아들일 때(칸트적인 근대 미학이론) 생겨나는 ‘예술작품의 고립성’에서 벗어나,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확고하게 정당화시켜 주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여 팔머는 가다머의 예술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을 진정으로 ‘객관적‘(genuinely objective)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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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하이데거.『예술작품의 근원』. 오병남 외 역. 서울 : 경문사, 1990.

T.W. 아도르노.『미학이론』. 홍승용 역. 서울 : 문학과지성사, 1984.

 

 

 

 

 

 

 

 

 

 

 

 

 

 

 

 

 

 

A Critique of the Kant's Aesthetics by Gadamer

 

 

김종걸은 숭실대학교 대학원(Ph.D)에서 종교철학(해석학)을 전공했다. 숭실대학교, 침례신학대학신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으며, 현재는 미국 죠지아주 Shorter College의 초빙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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