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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암 박윤선 신학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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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正岩) 박윤선 신학의 특성

-계시의존 사색을 중심으로-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한국개혁신학회초대회장)

 

 

머리말

 

1988년 합동신학교에서 거행된 박윤선의 장례식에서 제자인 고려신학교 이근삼은 조사(弔詞)의 한 대목에서 다음같이 피력하였다: “평생을 개혁주의 신학, 특히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을 통박하는 개혁주의 보수 정통신학의 기수로서 우리가 신학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터 위에 굳게 설 수 있도록 해주셨다.” 박윤선은 주경신학자로서 신구약 66권의 주석을 출판함으로써 그 분야에서 한국에서 독보적인 금자탑을 쌓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 합동신학교의 교장으로 신학교의 행정가로서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조직신학자 박형룡과 함께 한국신학의 초석으로서 청교도적이고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에 도입하고 이것을 학문적으로 정초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분이다.

 

본 논문의 의도는 “계시의존 사색”으로 특징지워지는 박윤선 신학의 정통 개혁주의적 특성을 조명하며,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에 대한 그의 비판, 그리고 그의 변증학적 사색이 갖는 한계점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데 있다.

 

1. 숭실 전문과 평양신학교의 청교도 전통에서 형성된 보수개혁 신앙

 

박윤선은 1927년 23세의 나이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숭실전문학교는 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설립한 4년제 학교로서 청교도적 정신에 입각하여 기독교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학교이다. 숭실을 설립한 베어드(William Martyne Baird)는 19세기 초 중서부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결실로 세워진 보수신학의 온상지였던 맥코믹신학교의 출신으로 철저한 보수주의, 청교도적 엄격성과 경건성으로 훈련받은 복음주의 신학자요 선교사였다. 그는 평양 숭실학당을 이러한 정신으로 설립했고 그렇게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평양신학교의 설립자요 숭실전문의 3대 학장이었던 마펫(Samuel A. Moffet) 박사 역시 베어드의 맥코믹 신학교 동창생으로서 영감된 하나님 말씀을 믿는 종교개혁적 복음주의 전통과 영국 청교도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회정치 원리에 기반을 두었다. 박윤선이 입학 할 당시에는 숭실전문학교 학장으로 모의리(E. M. Mowry) 선교사가 봉직하였다.

 

박윤선은 평양 숭실에서 4년동안 순회전도와 기도생활에 힘썼다. 아직도 생존하시는 교계원로 목사 방지일은 당시 박윤선의 경건생활에 대하여 다음같이 회고한다: “평양 모란봉 위 가재란 곳이 있다. 주님은 그곳에 꿇어 엎드린 박윤선을 보셨을 것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박윤선은 모란봉 너머 있는 가현교회에서 설교하고 심방하고 목회하였다. 그는 설교를 하면서 자유주의 신앙을 배척하는 신앙관을 확고히 가졌다고 회고한다. 숭실의 베어드, 마펫의 청교도적 보수신앙은 박윤선의 신학적 성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박윤선은 1931년 3월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바로 그해 4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장로회공의회가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설립하였고, 평양 숭실의 3대 교장이었던 마펫이 초대교장으로 학교를 이끌었다. 박윤선이 입학할 당시 학교는 선교사 5명, 한국인 3명이 교수진이었다. 마펫(S. Moffet)은 요리문답, 교장 나부열(S. I. Roberts)은 성경해석, 이눌서(W. D. Reynolds)는 조직신학, 업아력(A. F. F. Robb)은 교회사, 곽안련(Charles A. Clark)은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등 실천신학, 왕길지(Engel)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이들 선교사들은 하나같이 관대하고 인품이 훌륭한 청교도적 보수신앙을 가진 이들이었다. 남궁혁은 최초한국인 교수로 신약학, 이성휘는 구약학, 박형룡(1897-1978)은 변증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에서 교육이념과 지표가 된 청교도적 개혁신학 사상은 장차 성경학자로서 그리고 변증학자요 교의학자로서의 박윤선의 신학적 사유의 방법: 계시의존의 사색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 경건과 신학의 통합

 

박윤선은 숭실전문에서와 같이 평양신학교 시절에도 여름방학이 되면 전도대에 참가하였다. 그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느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농촌교회를 순방하여 설교할 때면 박윤선은 그 전날부터 하루종일 금식하곤 하였다. 사람을 회심하게 하는 일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임을 전도를 통하여 체험하였기 때문이었다. 평양신학교 시절 한 학기 혹은 한 해를 휴학하고 교회를 목회하고 섬기도록 한, 인턴십(internship)을 통해서 박윤선은 신학이 말씀전파와 목회와 연결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경건과 학문이 불가분적이라는 것을 터득하였다. 박윤선은 숭실전문학교 시절부터 봉사하였던 모란봉 너머에 있는 가현교회를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심방과 설교에 온 힘을 쏟았다.

 

박윤선의 생애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봉사한 학교가 그가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직한 수원에 위치한 합동신학교이다. 그는 교수요건으로 3년이상 목회경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오늘날 합동신학교는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78세 때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역에 관하여 “신학 교육, 주석 집필, 설교,” 즉 목회사역이라는 세가지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박윤선은 신학교 교수로서 가르치면서도 교회를 담임하였다. 신학교 교수가 목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고는 목회자를 양성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박윤선은 동산교회, 화평교회 등을 개척하여 신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도 동시에 목회를 겸임하였고 설교목사로서 봉사하였다.

 

박윤선의 신학은 평생동안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교육에 종사하면서 쉼없이 기도하고 설교하며, 목회한 그의 신학적 삶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성경 말씀을 늘 성령께서 살아 일하시는 말씀으로 체험하면서 산 신학자”였다.

 

3. 성경에 대한 유기적 영감설과 정통주의 주석과 해석

 

당시 1920년대 자유주의 신학이 이미 한국교회에 침투하기 시작하였고, 1920년대 중반부터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학이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박윤선은 당시 자유주의 신학이 성령의 불을 ”신자의 열심“으로 해석하고, 영생을 ”자자손손 대를 이어감“으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캐나다 선교사 월리암 스콧트(William Scott), 김관식, 조희염 등이 함경도 지역교역자 수양회에서 ”새로운 신학’을 소개함으로써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성경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오류이며,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성경 텍스트에는 문학적 오류, 역사적 오류, 과학적 오류가 있다고 보았다. 박윤선은 신(新)신학의 성경관에 대항하여 성경의 유기적 영감설과 정통주의 해석을 수용하였다.

 

박윤선의 성경관과 해석은 청교도적인 분위기의 숭실전문과 평양신학교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신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3년간 공부하는 동안 신구약 성경을 적어도 한번 통독하도록 하였다.

 

193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유학을 통하여 메이천에게서 지도받으므로 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에 대한 확신 사상을 학문적으로 다듬었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정통신학과 화란의 정통신학의 성경관을 수용하였다. 그는 구(舊) 프린스턴의 워필드(B. B. Warfield)의 완전영감설을 지지한다. 박윤선은 성경이 과학적 사실에 있어서까지 무오(inerrancy)하다는 바빙크의 성경관을 수용하고 있다. 박윤선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연약한 사람이시지만 죄는 없으신 것 처럼, 하나님 말씀이 인간의 말로 기록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신적이다...과학적 사실에 관계된 성경말씀도 언제나 참되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런 일에 있어서 학문의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 술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통사적 술어로써 영원한 진리를 말한다.”

 

박윤선의 개혁사상은 정통신학적 성경관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주석 책마다 서두에 책의 저자와 연대문제 등에 관하여 역사비판적인 문서설을 비판하면서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고 변증하고 있다. 모세의 오경저작설을 변증하고 문서설과 궁켈(H. Gunkel)에서 디벨리우스(M. Dibelius)와 불트만(R. Bultmann)에 이르는 종교사학파의 고등비평을 비판한다. 따라서 종교사학파의 영향을 받은 신약비평가들이 복음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모두 후대 초대교회에 의하여 고백되고 삽입되었다는 주장하는 케리그마론을 비판한다.

 

4. 바르트의 변증법적 사색 비판

 

박윤선은 숭실전문 동문이요 평양신학교 스승이요 그보다 8년 년상인 젊은 박형룡의 신학적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정통개혁신학을 보수하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주경신학자로서 1920년대 유럽신학계에 새로운 신학운동을 가져다 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비판에서 나타나고 있다.

 

박윤선은 미국유학에서 귀국하자 바로 1937년 『신학지남』에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박윤선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메이천으로부터 신약학을 배우면서 그리고 반틸에게서 변증학을 배우면서 바르트를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었다. 신약학자로서 박윤선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1954년에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서 박윤선은 1장에서 13장에 이르기까지 평주(平柱)에서 바르트의 『로마서주석』의 사상을 비판하였다. 바르트 로마서주석과 신학에 있어서 박윤선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원역사” 개념과 “변증법적 사색”이었다.

 

1) 원역사 개념 비판

 

바르트는 역사 이해에서 "원역사(Urgeschichte) 만을 실재 그것"으로 봄으로써 말씀의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한다. 박윤선은 다음같이 바르트의 개념을 해석한다: “칼 바르트는 세계를 이분하여 하나는 원역사 세계, 초시간적 세계라 하고, 다른 하나는 역사 세계, 곧 시간 세계라고 한다. ..이 양 세계는 전적으로 다르다(totaliter aliter). 이 둘은 질적으로 다르다... 원역사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요, 역사 세계는 인간 세계인바 인간과 하나님은 서로 질적으로 다르다. 그 서로 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인 까닭이라 함이 바르트의 견해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원계사적 계시관이다, 곧 계시는 시간과 공간에 들어오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과 함께 초역사 세계에 머문다는 것이다.“

원역사 개념이란 역사비판학자들의 역사 개념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뛰어 넘어 성경의 역사를 의미있는 역사로 이해하고자 하는 초절적인 역사 개념이다. 바르트는 역사주의의 성경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원(原)역사라는 항구로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사실로서의 역사(Historie)와 의미로서의 역사(Geschichte)를 구분하였다. 의미로서의 역사는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다 함축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실재의 역사는 아니라고 하드라도 의미로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원역사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원역사의 차원은 역사주의의 비판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이러한 박윤선의 바르트 원(原)역사 개념 해석은 정당하다. 바르트가 역사의 차원을 두가지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플라톤적 이분법적 이해이며 이것은 성경에 합치하지 않은 사고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역사이해는 성경의 계시를 사실적 사건의 역사차원에서 실존적 해석의 차원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이다. 박윤선은 바르트의 초절주의적 계시관을 반박하는 바빙크의 명제를 인용한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은 온 인류와 세계에 깊이 역사하신다.” 그리고 박윤선은 다음같이 정통주의적 계시관을 천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초월(초절이 아님)하신 분으로서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그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역사계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만나 주시고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만물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물은 피조물이고 그는 창조주이신 구분이 성경에서 명확히 알려진다.” 박윤선은 하나님과 만물을 구분하는 점에서 범신론을 배격하면서도 역사 속에 초월적으로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2) 일반계시 부정

 

박윤선은 바르트가 그리스도 계시만이 유일한 계시이며, 일반계시를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계시가 유일회의 계시라고 하면서 ‘자연계시’라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다.”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줄 정도이므로 그런 지식은 하나님의 성품의 단일성을 분열시키며, 따라서 그것이 참 지식은 아니라고 한다”. 박윤선은 그리하여 바르트가 “창조된 만물(자연계)의 계시성격을 부인한다,” 말하자면, “창조에 대한 역사적 계시, 곧 시간 공간계의 계시(피조물로 나타난 신지식)는 자명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하여 박윤선은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자연계시를 일반계시로 인정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피조물들 자체를 가리켜 ‘일반계시’ 또는 ‘자연계시’라고 부른다. 칼빈주의자 바빙크는 일반계시나 특수계시는 자명하게 하나님을 보여주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 증거를 받아야 된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3) 바르트의 변증법적 해석 비판

 

박윤선은 『로마서주석』(Der R?merbrief)에서 바르트가 수행한, - 각절의 말씀을 긍정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오가는 -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적 해석을 비판한다: "신학자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전(적) 타자라고 강조되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원역사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면, 하나님의 계시 개념은 부정과 긍정으로 오가는 항구적 활동주의(ewiger Actualismus)에 빠지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적 이해에서 벗어나게 된다.

 

박윤선은 역사비판학과 더불어 팽배한 자유주의 신학의 홍수 속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신자들에게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는데 기여한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신학이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풍성하게 전할 수 있게 해준 것인지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박윤선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그대로를 인간이 파악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어떤 차례로 조직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 가지는 모든 분별의 고정성을 바르트는 반대한다. 바르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마디 마디가 고정성 있게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을 부인한다...칼 바르트의 신학 사상을 가지고 참된 부흥사는 되지 못할 것이다.”

 

박윤선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에서 부정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인 진리로 파악할 수 없도록 하며, 주관적이고 실존적인 이해 안으로 해소시킨다고 보는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박윤선의 바르트 비판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성경말씀을 시종일관 변증법적인 사색으로 해석하는 신학으로는 말씀을 바울사도가 말한 것 처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충분히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화란 개혁 정통신학을 계승

 

박윤선의 신학사상은 미국 구(舊)프린스턴의 정통 개혁신학과 화란 카이퍼의 정통신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1934년 박윤선은 평양신학교 3년을 마치고 나부열 교장의 추천으로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 가서 1936년까지 2년간 신약학 석사과정을 이수하면서 유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신약학자 메이천(G. Machen) 지도 아래서 성경원어와 변증학을 연구한다. 그는 메이천에게서 칼빈주의와 성경해석방법을 배운다.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보수적이고 복음적이긴 했으나 “선명한 칼빈주의”를 전하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가 미래에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박윤선은 귀국하여 평양신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가르치면서 박형룡을 도와 『표준성경주석』 집필에 참여하게 되었다. 『표준성경주석』은 당시 한국교회에서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으로 쓰여진 아빙돈 성경주석을 대체하는 작업으로서 박형룡이 편집책임을 맡았다. 그리하여 1938년 6월에는 그의 첫 저작인『표준성경주석 고린도후서』가 간행되었다.

 

1938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하자 박윤선은 두번째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1년간 유학하여 별세한 메이천의 후임으로 변증학을 가르친 반틸(Cornelius van Til)의 지도 아래 변증학을 연구하면서 화란 개혁신학에 접하게 되었다. 프린스턴의 구학파에서 연구한 박형룡에 이어 박윤선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함으로써 메이천을 통해서 프린스턴의 구학파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박윤선은 40대 후반 1953년 10월에서 1954년 3월까지 반년 동안 화란 암스테르담 대학교에 유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카이퍼와 바빙크, 스킬더의 저서에 접하게 되었고, 더욱이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애독함으로써 성경을 개혁주의 신학의 바탕에서 해석하는 틀을 마련한다. 그의 화란 유학은 한국 보수주의 신학이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나 유럽 개혁신학 본산지에 접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윤선의 화란 정통개혁신학 소개로 인하여 이근삼, 차영배, 허순길 등이 화란신학을 전공하기에 이르고 화란의 정통개혁신학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박윤선은 미국의 정통개혁신학을 통하여 이것이 유래한 화란의 정통개혁신학을 수용함으로써 한국 장로교신학의 방향은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 워필드를 이어가는 정통개혁주의의 계열에 서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철하, 차영배, 김의환, 이근삼, 박아론, 신복윤, 김영재, 김명혁, 서철원, 김영한 등 한국 장로교 신학의 계통이 설립된 것이다.

 

박윤선의 정통개혁신학은 고신대, 총신대, 합신대의 신학적 이념으로 오늘날에도 자리잡고 있다. 그가 창립하고 14년간(1946-1960) 이끌었던 고려신학교의 제자인 이근삼은 다음같이 박윤선의 개혁사상을 논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초기 고려신학교를 보라. 당시는 신학들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 한 사람이 구약과 신약, 조직신학과 변증학을 모두 가르쳤다. 우리들은 거의 한 분 교수 밑에서 5년간 공부했다. 그래서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참으로 개혁주의 신학, 계시의존 사색, 하나님 말씀중심,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영광 등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을 철두철미하게 훈련을 받았다.” 신학은 지식보다도 정신이 중요한 데 박윤선은 계시의존 사색은 차영배, 이근삼, 김의환 등 고신대, 총신대, 합신대 등의 후진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6. 계시의존 사색: 변증학적 사고의 특색

 

박윤선이 자주 사용한 “계시의존 사색” 착상은 그가 이미 숭실전문, 평양신학교를 거치면서 베어드와 마펫을 통하여 영국 청교도 사상과 미국 보수주의 신학을 배우고 실천적으로 터특한 신학적인 삶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1934년 8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여, 1936년 5월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화란계 반틸교수로부터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방법론을 배운 것”에 기인한다. 그것은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며 성령의 감동에 의존하는 신학적 사색을 말하는 것이다. 계시의존 사색이란 “평생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했으며, 설교할 때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여시고, 말씀하시도록 간구하며 기도하는 일에 힘을 쏟는” 그의 경건과 학문이 연결된 신학적 목회적 삶에서 나온 것이다.

 

"계시의존 사색"이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의존하는 신학적 사색을 말한다. 이것은 성경의 계시에 의존하는 사색으로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 성경적 사색

 

“계시의존 사색”이란 박윤선 변증학의 핵심개념이다.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으로부터 변증학을 배운 차영배 역시 “계시의존 사색”을 말하는데 그는 이것을 박윤선에게서 배운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색으로 그는 성경계시를 유일의 접근 방법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오직 "계시 의존사색"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용어의 뜻은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사고를 사색하는 것“(Thinking God's thought after Him)이다. 이것은 바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한 사색이다. 그래서 그는 계시의존 사색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인식론적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이 개념은 주경신학자인 박윤선의 신학적 사색의 원리를 잘 나타내준다.

 

2) 반틸의 변증학에서 영향받음

 

박윤선은 이 개념을 미국 웨스트민스터대 유학시절 반틸에게서 배웠음을 피력한다: “그의 (필자 주:반틸의) 형이상학과 변증학은 나에게 진정한 기독교 유신론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성경주석을 쓰고 있는데, 이 작업에서 반틸에게서 빚진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박윤선은 반틸에게서 ‘성경으로부터 도출된 진정한 기독교 철학“을 배웠다. 그가 늘 사용하던 ”계시의존 사색“, ”타율주의“란 용어도 반틸의 기독교 유신론적 인식론을 자기 방식대로 공식화 한 것이다.

 

박윤선은 이 개념을 반틸보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박윤선은 계시 의존 사색이 성경에 따르는 사색임을 강조하는 나머지 일반계시의 가치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박윤선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연이나 하나님 지식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를 통하여만 자신을 알리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나 자연계시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에 반하여 반틸은 자연계시가 사람이 인식하든 않든 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 안에 하나님 지식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 지식을 통해서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소통이 가능하다고 본다. 반틸은 불신자에게 있는 하나님 지식이 복음적 소통의 전제라고 본다. 이에 반하여 박윤선은 복음적 소통이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고 본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으므로 제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직접 알게 해주셔야 된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인간에게 자연계시로 소리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주건만(시19: 1-7, 롬1;19),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만물들의 증거를 밟아 누른다.” 이러한 박윤선의 일반계시 평가절하는 그의 신학적 삶을 신령주의 내지 근본주의 경향으로 몰아간다.

 

3) 전제주의적 변증

 

박윤선은 전제주의 변증을 제안함에 있어서 여러 변증의 한계를 지적한다. 경험주의적 변증(experimentalistic defense)은 감정 내지 체험을 표준으로 함으로써 종교적 경험을 해석된 성경에 대치시키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체험 밖에서는 이해되거나 정당화 되지 못한다. 실용주의적 변증(pragmatic defense)은 신학적 진리를 아는데 실제적 유익을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주관주의적이며, 우연주의적이다. 증거(험)주의적 변증(evidentialistic defense)은 신앙상 유익을 주지만 불신자에게 믿음을 주지는 못한다. 증거주의적 변증은 자연인의 무지를 무시하고, 인간 이성주의와 무모한 타협을 하고 있다. 박윤선은 반틸을 따라서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성공회의 버틀러(Butler) 감독이 제안한 “종교의 유비”(analogy of religion)에 대하여 불신자와의 접촉점이란 극히 형식적이고 내용은 없다고 비판한다. 박윤선은 피력한다: “자연인의 신의식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안전한 다리가 놓여있지 않다. 이 접촉점의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만 효과를 낸다.”

 

그러므로 박윤선은 전제주의적 변증을 제안한다. 이것은 천주교와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시도하는 이층집(two stories house) 변증이 아니라 한덩이 집(block house)의 변증이다. 이것은 “초자연주의(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에 의하여 하향식으로 한꺼번에 해석한다.” 전제주의 변증은 불신자의 처지에 서서 공통점만 찾는 작업을 하지 않고, “사실의 기준이 하나님이라고 처음부터 주장한다.” 박윤선은 반틸을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영적으로도 공동지식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박윤선은 이성적 논증으로 불신자를 설득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들 속에 억눌러 있는 신의식이라는 접촉점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계시의존 사색이다: “성령께서는 진리에 대해서만 증거하신다. 진리는 신자가 불신자로 더불어 타협하여 기독교 유신론을 약체화함이 아니다. 신자는 불신자에게 대하여 처음부터 회개의 필요를 말해야 한다...그들은 자율주의를 버리고 처음부터 계시의존 사색을 가져야 한다.”

 

박윤선은 계시의존 사색의 논리를 네가지로 특징지운다.

첫째, 그것은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 이성이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말씀이 스스로 계시에 의하여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이므로 어 이상의 권위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둘째, 윤리적 인식론(ethical epistemology)의 논리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삶 전부를 그에게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복종이라는 윤리와 실천이 중요하다. 박윤선은 개혁신학자 존 프레임(John Frame)을 인용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지식으로 인도한다.”

 

세째, 한덩어리(block house) 논리이다.

하나님 지식에는 개별 장이 아니라 성경 진리 전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성경은 한 덩어리로 주조(鑄造)된 집이다. 기독교 인식론은 어떻게 아는가(how to know)가 아니라 무엇이 진리(what to know)인지를 다룬다. 기독교 인식론은 “성경이 진리인가?”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세계가 어떻게 있는가?”에 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관하여 다룬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속성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그의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존재와 속성은 분리될 수 없으므로 한 덩어리 논리이다.

네째, 내적 정합성(inner-coherency)의 논리이다.

전제주의적 진리는 증거주의적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귀납법적으로도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증거주의적 논리가 전혀 무시되지 않는다.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내적인 적합성을 이른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유비(analogy of faith)요 논리(faith logic)이다. 그러므로 박윤선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순수한 중립적인 사실-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는 것이란 찬성 천하에 없다”는 명제를 수용하고 있다.

 

7. 비판적 성찰: 이론적 개혁주의, 실천적 근본주의

 

박윤선은 이론적으로는 개혁신학 전통에 충실하고 가르쳤으나 실천적으로는 그의 선배인 박형룡과 같이 문화적 사명에 무관심 하거나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즐겨 읽었고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개혁주의 교리학』이라는 책까지 그의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박윤선은 일반은총이나 문화적 사명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거나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필자는 이것을 이론적 개혁주의, 실천적인 근본주의 경향이라고 부르고 싶다.

 

1) 일반계시 경시

 

박윤선은 개혁신학이 말하는 일반은총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의 『개혁주의 교리학』에서도 ‘일반 은총“에 관한 글이 없을 뿐 아니라 이에 관한 언급이 없다. 박윤선은 성경본문 주석에서는 ’칼빈주의,” “칼빈주의 정치,” “근본주의 약점” 등의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는 이 세상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나 혼인잔치에 대한 주석에서는 예수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라고 본다. 잠언 주석에서는 이생을 긍정하고, 이생에서의 삶의 지혜를 불교의 도피주의와 대조하여 설명한다. 여기서는 근본주의 약점이 일반은총에 대한 몰이해하고 지적하면서 개혁주의자들이 이 세상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할 문화적 사명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박윤선은 설교에서 이생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삭개오의 신앙‘이란 설교에서 그는 이 세상을 묘사하면서 존 번연의 “장망성,” 불교의 “고해” 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난파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 같다고 표사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은총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그의 몸에 베어든 도교나 유교 등의 신령주의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부흥주의적이고 세대주의적 근본주의 풍토에서 그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박윤선이 주석적으로는 이론적으로는 개혁주의 세계관에 충실하려고 했으나 설교 등 실제 삶에서는 근본주의적이고 도피적인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일제의 압제, 남북 분단, 6. 25 전쟁, 공산정권에서의 피난 등 고난 속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그 시대적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참여나 사회변혁 같은 문화적 의식이 결핍되어 있다. 이러한 성향은 박형룡에게서도 나타난다.

 

박윤선은 바빙크는 잘 인용하면서 사회참여를 강조한 일반은총을 강조하면서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치와 문화에 적극적인 참여하였던 카이퍼에 관해서는 별로 인용하지 아니 하였다. 이것도 이러한 그의 근본주의적 현실이해에 기인한다.

 

1960년대 군부독재와 유신정권 시절 진보주의 신학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인 사회참여를 통하여 민중신학을 제시하면서 민중의 인권과 사회의 민주화와 인간화에 관심을 표명할 무렵 박윤선이나 박형룡 등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정치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별세하기 2년전인 1986년 박윤선에게 미정통장로교회 소속 복음주의 사회참여 신학자인 간하배(Harvie Conn) 선교사가 교회의 사회와 정치 참여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대답하면서 박윤선은 교회의 정치참여와 사회참여를 다음같이 거부하였다: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정부의 도덕적 위치가 어떠하든지,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개인 시민의 자격으로는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바 정치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입장은 기도와 복음전파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지 반정부 운동에 직접 나가서 데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박윤선의 입장은 정부의 도덕적 잘못에 대하여도 비판적 표명을 삼가는 근본주의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세례자 요한은 위정자의 도덕적 윤리적 죄에 관하여는 비판을 자제하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 이것 때문에 투옥되었고 순교에 까지 이르렀다.

 

2) 세대주의적 영향을 받은 역사적 전천년설

 

이러한 박윤선의 근본주의적 현실관은 그의 전천년설에 근거한 종말론 사상과 연관된다. 박윤선은 그의 지도교수인 메이쳔과 반틸 등 웨스트민스터의 대다수의 교수들이 무천년설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millennialism)을 지지하였다. 박형룡도 같은 입장에 서 있다. 박형룡도 그의 신학의 골격을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3)의 조직신학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적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의 종말론 역시 역사적 전천년설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선교초기부터 무디(D. L. Moody)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신앙의 영향을 받았고, 1920년-30년에 활동한 부흥사들, 특히 성결교회 부흥사를 통해서 세대주의가 농후한 전천년설 신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혁신학자로서 의당히 개혁전통이 주장하는 무천년설 내지 후천년설을 주장해야 하나 이들은 현실참여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에서도 개혁주의 전통보다는 한국적 신앙의 정서를 따랐다. 일제 암흑기를 거친 한국교회는 종말론을 선호했으며, 종말론 가운데도 역사적 전천년설을 믿었다. 길선주 목사가 강해했던 바같이 일제시대에 현실도피적인 종말신앙이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천년왕국 전에 재림한다는 역사적 전천년설 신앙은 일제시대, 남북분단, 6.25 전쟁, 고난을 당한 한국신자들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지상천년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바로 종말로 들어가는 것을 주장하는 무천년설 신앙은 보수적인 한국 장로교회 안에 용납되지 않았다.

 

3) 과격-칼빈주의적 경향: 타율주의

 

박윤선은 그의 변증학 사고에 있어서 반틸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반틸이 지닌 과격칼빈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시의존 사색”을 “타율주의”라고 표현한 것은 반틸의 과격-칼빈주의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틸은 계시의존 사색을 “타율주의”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사색이란 마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주체적인 것인 능동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시나 객체처럼 수동성을 지닌 것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반틸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회개할 노력조차 필요 없는 것 처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을 무능화하는 위험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것은 칼빈주의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이 상대방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상대방의 신의식(senus divinitatis)에 호소한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반틸은 불신자의 이성을 전적으로 무능화시키는 위험에 빠지고 있다. 이성의 작용 없이 성령의 역사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타율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 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이러한 견해는 결단코 알미니안주의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논증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성과 감정과 의지에 호소하며 신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신앙을 일으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나 이성은 여기에 성령의 역사가 영향을 주는 영역이다. 따라서 반틸이 이성의 전적 무능을 말하는 것에 과격 칼빈주의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반틸이 특히 성공회 감독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의 방식을 알미니안 내지 천주교식의 자력구원의 방법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 인간성이라는 공유지역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과격-칼빈주의라고 필자는 말하는 것이다. 반틸이 “덜 철저한 칼빈주의 입장”이라고 비판한 프린스턴 구학파 개혁신학자들 핫지와 워필드의 견해는 필자의 입장을 뒷받침해준다. 핫지(Charles Hodge)는 이성을 계시를 수용하고, 판단하고, 계시의 증거들의 판단자로 보았다. 워필드(B. B. Warfield) 역시 먼저 우리는 변증으로 모든 이들이 동의할 것을 세워놓은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신학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계시의존 사색은 틸리케가 말하는 바 같이 성령론적 사유이며, 그것은 타율주의가 아니라 신율주의이다. 자율주의가 인본주의라면 타율주의는 율법주의이다. 이에 대하여 영자를 종합하는 것이 신율성(Theonomy)이다.

 

맺음말

 

박윤선은 박형룡을 따라서 한국신학에 정통 개혁신학을 기초석으로 놓는데 기여한 신학자이다. 그를 통하여 화란의 개혁정통신학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는 박형룡을 통해 도입된 미국 구프린스톤신학의 원류인 화란의 정통 개혁신학을 전수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변증학적 사유의 특징인 “계시의존 사색”은 성경적 사색과 정통 개혁신학적 사색을 우리에게 물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선은 일반계시를 평가절하함으로써 이론적 개혁주의, 실천적 근본주의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윤선이 의존하고 있는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 역시 인간의 부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이성의 무능을 말함으로써 타율주의에 빠지고 있다.

 

<주제어>: 계시의존 사색, 보수주의, 정통 개혁주의, 전제주의 변증, 과격-칼빈주의

<Key-Words>: revelation-relied thinking, conservatism, orthodox reformed thought, presuppositonal apologetics, hyper-calv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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