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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박윤선 목사님의 개혁신앙의 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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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목사님의 개혁신앙의 재평가

이 은선(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들어가는 말

 

정암 박 윤선(1905-1988) 목사는 한국교회에 개혁신앙이 뿌리내리는데 기여한 가장 대표적인 성경 주석가이다. 그는 일생 동안 신구약 성경 전체를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하여 주석하여 한국교회가 개혁주의 신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까지 박윤선 목사님의 개혁신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저술들이 나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책이 서영일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인 『박윤선의 개혁신학 연구』이다. 이 책은 서영일 박사가 1992년 웨스트민스 신학대학원에 제출한 논문을 장동민 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박윤선 목사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그가 형성한 개혁신학이 교육현장과 성경주석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과 목회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시대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출판된 『박윤선의 생애와 사상』이 나와 있다. 이 책은 여러 후학들에 의해 그의 생애가 조명되고 주로 성경 주석과 관련된 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정암은 성경학자로서 성경주석에 일생을 바쳤지만, 한국 신학교의 형편상 조직신학을 강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조직신학에 대한 강의록이 그가 소천한 후에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이 『개혁주의 교리학』이다. 이 책은 조직신학의 주제들에 대한 그의 개혁신앙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김 영재교수에 의해 박 윤선에 대한 평전이 나왔다. 이 책은 박윤선의 개혁신학을 경건과 교회 쇄신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연대기적인 서술에서 박윤선의 개혁신학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박윤선의 개혁신앙이 형성된 배경을 설명한 후에 그의 개혁신앙이 펼쳐진 주제들에 따라 그의 개혁신앙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맨 먼저 그가 일생을 바쳐서 서술한 성경 주석에 나타난 개혁신앙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가 제시하는 성경관과 해석원리가 그의 주석에서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어 나타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둘째로 조직신학의 주제들 가운데서 전통적인 개혁신앙과 차이가 나는 주제인 그의 성령론을 다루고자 한다. 셋째로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의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러한 이해가 그의 삶에서 어떻게 실천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정암의 개혁신앙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I. 박 윤선 목사의 개혁신앙의 형성

 

1. 평양신학교

박 윤선 목사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다녔다. 그가 평양신학교에 다닐 때, 마포삼열은 소요리문답을, 교장 라부열은 사복음 대조기술, 요한계시록을, 이눌서는 중국어에서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을, 어드만은 구약 주경신학을, 업아력은 교회사, 곽안련은 실천신학을, 왕길지는 신학원어를 가르쳤다. 한국인 교수로는 신약을 가르치던 남궁혁, 구약을 가르치던 이성휘, 변증학을 가르치던 박 형용이 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배웠던 학문에 대하여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신학교 재학중에 “칼빈주의”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당시에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의 지적인 수준도 높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교수들도 학문적 수준이 높았다기보다는 선교의 열정을 가진 복음주의적인 성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개혁주의 신앙이 교육되기를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적인 성경관을 교육하였다. 정암은 이 시기부터 영어와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하며, 영어성경 주석들을 읽고 있었다. 그가 뉴월(Newell)의 요한계시록 주석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라부열 교장이 빌려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평앙신학교를 다니면서 복음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성향의 신학의 기본소양을 쌓으면서 어학을 공부하고 영어성경주석을 읽으면서 장래의 주석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2.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1차 유학

그가 본격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만나게 된 것은 1934년부터 36년까지 유학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였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프린스톤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수용하여 자유주의화 되어가는 것에 반대하여 메이첸을 중심으로 1929년에 설립된 신학교이다. 정암이 이 학교에 도착했을 때 메이첸 박사가 학장이었고, 변증학에 밴틸(C. Van Til), 조직신학에 머레이(John Murray). 구약에 알리스(Oswald T. Allis)와 맥크레이(Allen A. MacRae), 실천신학에 카이퍼(Rienk B. Kuiper), 신약에 스톤하우스(Ned B. Stonehouse), 교회사에 울리(Paul Wooley) 등이 가르치고 있었다. 정암은 이곳에서 메이첸의 문하에서 신약학을 전공했는데, 특히 주경신학에서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메이첸에게서 배우면서 신학자들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도 깨달으면서 성경해석방법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방학 동안에는 기숙사에 남아 성경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2년간 배운 과목들은 히브리어 5과목, 아람어 3과목, 헬라어 1과목 등의 어학과 칼빈의 신학과 위기의 신학 같은 조직신학과 함께 신구약에 대한 12과목이었다. 그러므로 어학과 성경과목이 거의 전부이고, 조직신학에 관한 과목이 2과목이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성경주석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어학과 성경 신학 공부에 집중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면서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나는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내가 미래에 무엇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칼빈주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바로 그러한 전형이었다. 이 신학교는 예수 믿는 순수한 신앙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무릎 쓰고 세워진 학교였다. 그리고 그는 메이첸을 통해 학문과 경건을 겸비한 신학하는 태도와 함께 강해설교를 배워 한국에 이식하게 되었다. 칼빈주의는 “칼빈 자신의 생래적 사상 체계가 아니고 성경의 말씀을 바로 해석한 대로 그대로 믿어 나가는 사상체계이다.” 칼빈주의는 성경대로 믿되, 올바르게 해석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주요원리는 “하나님 주권을 중심하는 사색”이다. 또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주의”이다. 정암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메이첸에게 성경주석방법과 함께 그의 신앙하는 태도와 삶의 자세를 배웠고, 동시에 칼빈주의를 학문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화란어를 배워 화란신학을 접촉할 수 있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커다란 소득이었다. 그는 “카이퍼, 바빙크, 크로솨이데, 크레다너스, 스킬더 드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바빙크의 개혁교리학을 애독함으로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3.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2차 유학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던 박 윤선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하자, 원어학과 변증학을 더 공부할 목적으로 다시 1938년 8월에 웨스트민스터로 2차 유학을 떠났다. 그는 1년을 이곳에 머물면서 반틸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변증학을 공부하였다. 이곳에 머물던 3학기 동안 강의를 듣는 것보다 혼자 연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가을학기에 히브리어(4시간), 아람어(2), 성경 아람어(2)를 혼자 연구하고, 시리아어(2)를 듣고 데살로니카 전후서 논문을 썼으며, 봄학기에 히브리어(1) 아랍어(2), 시리아어(2), 골로새서(1)를 연구하고 변증학(위기신학)을 논문(8)으로 썼고, 다시 가을학기에 고급시리아어(1), 교회사(4), 교리적 설교(2)를 듣고 변증학 논문(4)을 썼다. 주로 어학은 스스로 연구하며 주석을 쓸 준비를 하였고, 반틸의 지도하에 변증학 공부에 집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반틸의 변증법을 공부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강조할 필요성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반틸의 변증학의 특징을 “하나님을 아는 길을 성경뿐이다 --- 불신자도 오직 성경으로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무조건 성경으로 하나님을 증거 할 때에 성령께서 그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그가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와 같이 박 윤선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칼빈주의 신학사상의 형성에는 메이첸과 반틸의 영향이 가장 큰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사상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유입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핫지와 워필드에게서 이어받은 구프린스톤 신학의 전통을 지키려는 변증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변증적인 성격이 강한 칼빈주의 신학을 배우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화란어를 습득하여 화란개혁주의자들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정암은 후에 고려신학교에서 교수하면서 칼빈주의라는 말보다는 개혁주의라는 말을 더 즐겨 쓰게 되었다.

 

4. 화란 자유대학 유학

박 윤선 목사는 1953년 11월에 화란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떠난 목적에 대해 그 자신이 박사학위 취득이 목적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학 생활은 부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954년 3월에 갑자기 끝나게 되었다. 그런데 자유 대학 학적부에는 박 윤선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지 않고 스키퍼스(R. Schippers) 교수의 조교신분이었다는 것으로 보여, 그의 자유대학 유학 신분이 불분명하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일관성있게 주석을 하려면 칼빈주의 신학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유학을 지망하였다.” 이 짧은 화란 유학 기간 동안 그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48세의 나이 탓인지 향수병으로 고생하였으며, 화란개혁교회의 영적인 메마름에 실망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대해 “화란 유학이 아니었더라면 신구약 주석 저술에 진리를 깨닫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 유학 기간 동안에 화란어 독해력이 증진되었고 화란개혁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그의 신학사상은 개혁주의 바탕에 견고하게 기초를 두게 되었다.

 

II. 정암의 개혁주의 신앙의 전개

1. 개혁주의 성경 주석 작업의 진행

1) 해방 이전의 고린도후서 주석 저술과 바르트 성경관과 계시관 비판(1937)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박윤선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강사로 2년간 성경 원어를 가르쳤고, 평양 여자 고등성경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표준성경주석으로 고린도후서 주석을 저술하였다. 당시 장로교단에서는 표준성경주석의 저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지 50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한국인 목사들이 참고할만한 주석들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 50년이 되는 희년 기념으로 감리교의 유영기 목사의 주도로 고등비평을 수용한『아빙돈 단권주석』이 1534년에 출판되었다. 이 주석에 대해 장로교단에서는 길선주 장로의 제의로 장로교 교리에 위배되는 점이 많은 사실을 들어 구독하지 않기로 가결하고 집필에 참여한 채필근, 한경직, 송창근, 그리고 김재준에 대하여 기관지를 통해 사과하도록 하였다. 이 총회에서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설에 의심을 표하는 김영주목사와 여성의 교역 금지가 2000년 전 한 지방의 풍습이라는 김춘배 목사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 총회는 표준주석을 집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박윤선 목사는 귀국하자마자 이 집필 작업에 가담하여 고린도후서주석을 저술하였다. 이 주석 서문에서 마펫은 이 주석 집필자들은 “성경 전부가 萬書之中의 最大書요, 신의 참된 말씀임을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에 교시된 진리의 체계가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에 선히 개괄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저술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형용도 “금일 교회에 긴급히 需要되는 주석서는 무엇보다도 書中에 정통신학의 표준을 확실히 세움으로 그것이 성경해석에 표준이 되는 동시에, 교회 신앙의 표준이 됨을 초대 급무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표준주석은 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내용에 따른 개혁주의 주석이 될 것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박윤선 목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배웠던 방식에 따라 주석을 진행하였다. 그는 1936년 이전의 한국교회에서의 성경 주석 역사에 대해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정통주의를 지키는 데서는 성공하였으나,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개혁신앙의 성경 주석의 대원칙에는 충실하지 못하였다고 평한다. 한국교회 초기에 세대주의가 성행한 이유도 구역이 마태복음 5장 21절, 27절, 38절, 42절 등을 해석하면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칼빈주의보다 복음주의가 우세하여 체험과 예화중심 설교, 현실도피, 불건전한 신비주의 성향이 있고, 근본주의가 우세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구역성경이 오역되어 신구약을 단절하는 세대주의 성격이 있고 성경 해석 방법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박윤선은 고린도후서를 주석하면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칙에 따라 주석하고자 하였다.

박 윤선 목사는 1937년에 신학지남에 두 편의 논문을 기고하였다. 하나는 “바르트의 성경관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바르트의 계시관 비판”이다. 일본에서 바르트는 유일한 신학자로 알려져 그의 신학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는데, 1920년부터 일본에 유학했던 유학생들을 통하여 그의 신학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들과 정통신학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선교사들과 한국 신학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때, 박윤선의 이 논문들이 나왔다. 박윤선은 이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반틸 밑에서 위기신학을 공부했는데, 이것을 토대로 바르트의 성경관과 계시관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는 바르트가 성서와 “계시”를 분리시켜 취급하고, 피조물인 성서 저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도 저들이 감당치 못해 계시 기록에서 많은 착오를 포함한다고 하며, 성서는 옛날에 하나님을 안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던 흔적뿐이어서 종교생활의 일개 참고서이고 기독교 신앙생활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고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성경은 인간의 주관적 태도 여하함을 불문하고 고유적으로 神語서의 절대적 효용성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바르트의 성경관은 역사적 기독교와 관계없는 “이설”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바로 이어 바르트의 계시관을 비판한다. 정암은 바르트가 원역사세계(초시간세계)와 역사세계(시간세계)를 구분하고 양 세계는 서로 전타성(totaliter aliter)을 띠므로 시간 세계의 것은 무엇이든지 원역사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후자의 교섭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관이 ‘성서의 말슴과 틀닌다’고 일축한다. 인간은 타락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교제한다. 그러므로 양 세계의 전적 타자성만을 주장하는 바르트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 동정녀 탄생을 초역사적 사건으로 보는 바르트의 견해는 이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암은 바르트 신학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정통적인 성경관과 계시관을 확실하게 변호하였다.

2) 요한계시록 주석(1949)

박윤선 목사는 1941년부터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43년 7월에 사임하고 그 후에 요한계시록 주석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요한계시록이 출판된 것은 1949년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성경 주석으로는 첫 번째 작품이었는데, 1934년 요한계시록 암송에서부터 15년간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요한계시록은 주석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책이라는 것을 박윤선 목사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 책을 제일 먼저 주석하게 되었다. 한국의 초기 부흥사였던 길선주 목사가 요한계시록을 만독하고 그가 인도하던 사경회에서마다 계시록을 가지고 설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윤선 목사는 신성중학교 시절에 길선주 목사가 인도하는 사경회에서 요한계시록 강해를 들었는데, “왜 그런지 허전한 느낌이었고 요한계시록에는 무엇인가 깊고 좋은 내용이 있을 터인데 강사목사님께서 이 책의 깊은 뜻을 나타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길 목사님의 강해는 세대주의였는데, 그 때는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시절에 고배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면서 요한계시록을 암기하기 시작하여 18장까지 마치고, 학교에 도착하여 나머지를 암송하여 계시록 전체를 암송하였다. 그는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비전을 보면서 그 가운데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였다. 머리말에서 그는 1944년 겨울 만주 한촌에서 이 주석을 쓰고 있었는데, “그 때에 안산과 봉천을 공습하기 위하여 온 B29는 나의 가슴을 시원케 해주는 통쾌한 고공비행을 하였던 것이다”라고 하며, 신앙의 눈으로 보니 B29 폭격기들이 교회를 핍박하는 일제를 심판하는 천사들로, 그리고 대강림을 선도하는 선구자들로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시대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이 책의 주석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주석을 하면서 해석의 신학적 기초에 대하여 “해석에는, 칼빈주의 원리가 성경적인 줄 알고 일률적으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4가지 학파 가운데 요한계시록이 “예언이기 때문에” 동시대 학파가 잘못되었고, “계시록 내용이 교회사의 사건들로 다 성취되었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회사학파(역사주의적 견해)도 옳지 않으며, 계시록이 “신령한 이치보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건들을 계시하므로” 영해학파(이상주의적 견해)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계시록의 내용이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직후 하여 일어날 사건을 가리키므로” 말단파(미래학파)의 의견을 수용한다고 한다. 그는 이 학파의 지나친 여자적인 해석에 반대하면서도 9장 19절의 이만만을 이억명의 군대라고 해석하고 곡과 마곡도 러시아의 지명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가 유학하고 있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세대주의나 역사적 전천년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개혁주의 종말론으로 무천년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칼빈주의 원리를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계시록을 주석하면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그는 계시록 20장 4-6절에서 후천년설을 말세에 불신앙과 배교가 있을 것이라는 눅18:18, 살후2:3-12절을 근거로 들면서 성경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박윤선은 무천년설이 20:3-4절의 첫 번째 부활을 중간시대 천국에 있는 영혼들이라고 해석하나, 여기 아나스타시스(부활)는 몸의 부활을 의미하므로 잘못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책의 끝 부분에 있는 특주에서 워필드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무천년설을 비판한다. 그리고 최종판에서는 뵈트너박사의 후천년설도 비판한다. 그러면서 계시록 20장 4-6절의 기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을 가리키고 이때에 부활한 신자들과 죽음을 보지 않고 재림을 맞이한 신자들이 이 왕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박 윤선 목사가 종말론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은 한국초기 선교사들이 전천년설을 가르쳤고, 길선주목사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가르쳤으며, 평양신학교에서 레이놀즈도 전천년설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리에서 핫지와 벌코프를 따르는 박형용도 전천년설을 지지한다. 박윤선도 이러한 한국교회의 전통에 따라 전천년설을 주장하였다. 서영일은 박윤선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에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입장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따른 것은 그가 어릴 때 서당에서 9년간 배웠던 조선성리학의 정통에 대한 충성의 강조와 배타적인 자세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비관주의적인 세계관의 영향이라고 분석한다. 또한 그가 종말론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연관이 있는 점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에서 전천년설 내지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미국의 19세기 후반의 부흥운동과 연관되어 시대적인 위기 상황을 반영하면서 복음전파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복음적인 열정과 함께 전천년설을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복음을 전수받은 한국교회에서 박형용과 박윤선 모두 다 평양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복음전파 활동을 지속했던 것으로 볼 때 그러한 복음전파의 열정과 이러한 전천년설이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신구약 주석 작업

요한계시록의 주석을 낸 이후에 박윤선 목사는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에 공관복음(1953), 로마서(1954), 요한계시록 개정판과 바울서신(1955), 히브리서와 공동서신(1956), 시편(1957), 요한복음(1958) 등의 순서로 주석을 발간하여, 1979년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주석을 마지막으로 신구약 성경 전체에 대한 주석을 완성하였다. 1937년에 고린도후서 표준주석 저술로부터 계산하면 42년만이요, 1949년부터 계산해도 30년 만에 주석 작업이 끝난 셈이다. 그는 이 주석 작업을 위해 신문이나 TV도 거의 보지 않고 가족들과의 단란한 생활도 희생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주석 작업을 진행하기 위한 그의 성경관과 해석원리가 무엇인지를 먼저 검토해 보자.

(1) 박윤선 목사의 성경관

박윤선 목사는 일생동안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혁주의 성경관을 고수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을 비판하면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관을 통해 성경이 오류가 없음을 주장한다. 그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아니하였느나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10:34)에서 성경은 “그 성경”으로 번역되어야 하고, 그 성경은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예수님께서 시편82편 6절 한 구절을 옹호하기 위해 전체 성경을 폐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성경의 만전 영감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딤후3:16과 벧후1:21절을 인용하여 사도들도 성경 전체의 영감을 믿었다고 지적한다. 그 후에 그는 성경 영감의 교리는 교회의 교리라는 워필드(B. B. Warfield)의 말을 인용한 후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견해와 개혁파 신조들을 인용하여 성경 영감 교리를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설명을 통해 만전성경영감교리가 예수님부터 개혁파 신조들을 통하여 확립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는 화란 신학자인 리델보스의 성경관에 대해 전통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1) “그리스도의 신앙의 빛에 의해서만 성경의 지혜와 지식의 보고가 열린다”고 한 것, 2) “성경은 그 내용이 되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 권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나의 이 말은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그로 말미암아 영감된 사실에서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을 변동시킨 것은 아니다”라고 한 것 3)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점은 리델보스가 바로 깨달은 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1) “성경의 무오성은 성경의 목적에 치중하여 생각되어야 하고 축자적으로 정오를 살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 2)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성경은 영원하지도 못하고 완전하지도 못하다”고 한 것, 3) “우리는 성경이 영감된 문서라고 하여 거기 있는 내용이 무엇이든지 신적 계시이고 모두 동일한 권위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한 것, 4) “한 저자의 기록한 것에 대하여 다른 저자가 변동을 가져왔으니, 그것이 어떤 때에는 먼저 쓴 저자의 문구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리델보스에게 “찬성할 수 없는 점들”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리델보스의 주장들을 찬성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예수님시대부터 지금까지 전개되어온 성경의 만전영감설을 고수하면서 그러한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개혁주의 신약학자인 리델보스도 비판한다.

그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1)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고 믿음 2)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음 3) 성경의 유기적 통일을 믿음 4) 성경 무오의 진리를 믿음 5) 성경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믿음 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러한 개혁주의의 정통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19세기 독일 자유주의와 바르트의 성경관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박윤선의 성경관에 대해 권성수박사는 워필드의 성경관에 입각하여 개혁주의 성경관을 확립하여 성령의 내증에 대한 칼빈에 대한 견해를 발굴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지적한다.

(2) 박윤선 목사의 성경 해석 원리

박윤선 목사는 성경이 정확무오하게 유기적으로 만전 영감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신구약성경을 주석하였다. 그는 신학지남에 발표한 “성경해석방법론”에서 앞부분인 해석방법역사는 그레이다누스(Greidanus)의 『성경 해석의 성경적 원리』를 소개하고 있는데, 초대교회로부터 19세기까지 성경 해석의 역사를 소개한 후에 마지막에 개혁주의적 성경해석과 예수님의 해석방법을 설명한다. 개혁주의적 해석방법은 성경을 자증과 성령의 내증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원어를 통해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을 해야 한다. 이 해석은 정당한 추론을 인정하고, 전통에 예종하지 않으나, 역사적 교리를 중시하며, 성경 해석의 최종 심판자는 성경이라고 한다. 뒷부분인 성경해석학은 크로솨이데(F. W. Grosheide)의 『허메뉴틱』(Hermeneutiek)을 발췌번역으로 소개한다. 해석학은 원래 ‘번역한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유래하여 해석의 법칙을 연구하여 체계화하는 과학이란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은 성경이 성령의 단일저작이므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구약을 해석하실 때, 성경의 단일성을 인정함으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근거를 얻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씀하셨다.(요5:39; 6:32; 눅24:25-27). 성경을 추론적으로 해석하여 마22:23-32절에서 부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려고 출애굽기 3장 16절에 있는 “여호와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이용하셨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육신적으로 죽었으나 영혼이 살아있음을 증명하신다. 마4장에서 시험받으실 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 마귀를 물리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셨으므로 우리도 성경의 통일성을 믿으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법에는 문법적, 역사적, 심리적 해석방법을 사용하면서 더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법적 해석방식은 성경본문의 문법적인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고, 역사적 해석은 본문과 관련된 시대나 환경을 요소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심리적 해석은 앞의 방법에 종속되어 사용되어야 하는데 본문에 나타나 있는 말씀이나 행위의 동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는 그 동기의 배후에 하나님의 계시 운동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해석자는 이러한 해석을 종합하여 성경의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생명있는 교통과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종합적 해석을 통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이 의도하신 참뜻을 찾아내게 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계시의존사색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에게 의존해야 바른 인식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타락해서 어두워졌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교회사에서 중세 스콜라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채용하여 자율주의로 기울어졌고, 종교개혁 때 루터교회는 신인협동설 교리를 채택하였으며, 알미니안주의는 인간 자율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반면에 사도들은 계시의존적인 타율주의였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계시 지식에 준거한 추론적인 인식론을 주장하였다. 정암은 이러한 계시의존사색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칼빈주의라고 지적한다. 칼빈과 바빙크가 주장한 바와 같이 칼빈주의는 성경의 사상뿐만 아니라 문자까지도 영감되었다는 유기적 영감설을 내세우며, 이렇게 영감된 성경 말씀에 주어진 계시에 의존하여 성경을 해석하며, 이렇게 계시의존사색을 할 때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계시의존 사색은 그의 성경해석 원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변증신학에서도 사용되는 원리이다. 이러한 계시의존 사색은 반틸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대해 정승원은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성경을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보고, 모든 진리의 궁극적인 참조점으로 삼는 면에서는 일치하나, 반틸은 일반은총을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나 정암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성경을 초월주의로 이해한다.

박윤선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서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던 알레고리를 피하고자 노력하였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대한 교훈과 함께, 좀 더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절을 가지고 덜 분명하고 난해한 구절을 해석하는 해석 방법을 사용하면서 박윤선 목사는 알레고리의 문제점을 인식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중심의 것이니 만큼 해석자는 그 본문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어떻게 관계된 것을 찾도록 힘써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諷諭濫用을 피하여야 한다. 갈4장에서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풍유로 해석한 일이 있으나 그것은 영감된 풍유적 해석이니 만큼 특수 취급되어야 한다. 해석자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원칙상 풍유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해석가는 깊은 뜻을 찾아보려고 풍유해석을 방법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그 현재에서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그냥 모를 것에 둠이 합당하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만 준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교회에 준 까닭이다. 그 자신이 그 때에 찾지 못하는 깊은 뜻을 후대에 찾게 될 것이다.

 

박윤선은 알레고리를 피하고자 하였지만, 자신도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서영일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도 자신의 주석 여러 곳에서 알레고리를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11절(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라 이 같은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에 대한 주석에서 알레고리의 사례가 드러난다. 그는 153이란 숫자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영적인 해석을 비판하고 이 153은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도 일종의 이적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심을 상징한다(Godet)"고 덧붙였다. 고기가 교회가 아니라면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것이 어떻게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해석은 요21:4절도 헹스텐베르그를 인용하여 영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박 윤선목사는 유명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보았는지 궁금하다.

그는 요한복음 2장 10절의 “가장 좋은 포도주”를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기쁨이라고 영해하며,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기름과 포도주가 “상한 심령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인 복음을 “비유로”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영해를 레위기 주석에서도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정암은 알레고리를 비판하고 피하고자 하였으나, 주석의 여러 곳에서 그러한 해석을 하고 있다.

박윤선 목사는 성경 주석을 하면서 비평적인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는데, 이것이 부족한 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는 이와 같이 비평적인 학자들의 견해를 비평하는 경우는 많지 않으나, 비평적인 학자들의 견해가 자신의 견해를 지지해 줄 때는 인용한다.

 

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할 때에 어떤 문구에서는 혹시 신학의 처지가 다른 주석가들에게서 인용한 바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 사상 체계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신학사상이 정통이 아닌 그들까지도 별 수 없이 그 문구 해석에서는 우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그들의 의견을 인용할 때에 그 신학 처지가 정통적이 아닌 사실을 지면 관계로 매번 비판하지 않았으니, 독자들은 이 점을 양해하기 바란다.

 

반면에 박윤선 목사는 로마서 주석에서는 바르트와 브루너의 주석을 비판하면서 주석하였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에서 공부할 때 반틸을 통해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그의 가르침의 위험을 알았던 것 같다. 박윤선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 올 때 가지고 온 것이 바로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로마서 주석을 쓰면서 자신의 주석 여러 곳에서 바르트 주석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주석에서는 별로 비평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하비 칸은 이미 1968년에 글을 쓰면서 이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는 충분히 훈련을 받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학적 지식이 박약한 목회자들을 우선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 때문에, 그의 주석들을 보면 고등비평의 문제들이나 서론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지면을 할애하지 않고 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여러 번 개정하면서도 이 책 자체에 대한 서론은 초판부터 마지막 개정판까지 거의 변화가 없이 간략한 내용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박 윤선 목사는 자신의 주석들을 쓰면서 칼빈주의자들을 주석을 참고하였다. 그의 주석에는 워필드(B. Warfield), 핫지(C. Hodge), 보스(G. Vos), 카이퍼(A. Kuyper), 크로솨이데, 바빙크(H. Bavinck), 리델보스, 스킬더(H. Skilder) 등의 이름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온다. 특히 그의 신약 주석에서 화란신학자들의 이름이 상당히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의 “신약주석 전질에서 학자 및 주석가들의 이름은 성경본문 해석과 관련하여 총 2888회 언급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인물을 칼빈으로 221회로 전체의 7.7%를 차지한다. 그리고 화란신학자들의 언급횟수는 총 834회로서 전체의 28.9%에 달한다. 칼빈을 제외한 다른 나라 학자들(1833회)과 화란 학자들(834회)의 언급 비율은1:0.45가 된다. 네덜란드 한 나라의 비율이 전체 인용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는 것은 박윤선 목사의 신학에 있어서 화란신학은 그만큼 비중이 크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전체의 인용의 47%, 히브리서 공동서신과 공관복음에서는 31%를 차지하여 화란신학자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인용횟수가 가장 적은 것은 로마서로 19%이고, 다음으로 고린도전후서는 21%를 차지한다. 그가 인용한 학자들 가운데 보스와 바빙크 스킬더가 많이 인용되고 있다. 결국은 그가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를 가장 많이 수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화란 학자들의 견해를 대부분 긍정적으로 인용하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리델보스의 경우에 성경관에서는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2. 박 윤선 목사의 성경신학과 언약신학에 대한 이해

박 윤선 목사는 성경 신학이 주경신학의 한 부분이므로, 주경학적으로 진행하면서 동시에 계시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계시사적 연구란 것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성경 전체에 비추어 해석하고, 그 역사적인 위치를 중대시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경신학을 보스(G. Vos)의 『성경신학』과 리델보스(H. Ridderbos)의 『바울과 예수』(Paulus en Jezus)와『천국의 옴』(De Komst Van Het Koninkrijk),『예수의 자기 은익과 자기 계시』(Zelfopenbaring En Zelfverbarung)을 많이 인용한 편저의 성격을 가진 책이라고 밝힌다.

그는 자신의 성경신학에서 신구약의 통일성의 문제를 계약론에서 다루고 있다. 그가 성경신학이 계시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했는데, 신구약의 통일성의 토대인 계약론을 계시사의 관점에서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계약론에서 눈에 띠는 것은 성경에서도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일반적으로 학자들도 언약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는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가 언약이란 용어 대신에 계약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바빙크를 인용하여 기독교가 계약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성적(理性的) 또는 도덕적 실존들 가운데 모든 고차원적 생활은 계약의 형태로 나아간다 --- 사랑과 우애와 혼인과 기타 모든 사회적 공동 관계와 산업과 예술은 결국 계약의 근거 위에 성립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서로 신뢰감과 여러 가지 도덕적인 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무관념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부유한 생활 곧 종교라는 것이 계약 성격을 가질 때에 놀랄 일이 아니다.

 

박윤선 목사가 베리트를 “계약”이라고 번역한 것은 베리트가 인간 차원의 계약과 같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말을 지키지 않음에 반하여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은 항상 지키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분명한 설명 없이 계약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 독자들의 약간의 혼란은 불가피한 것 같다.

박윤선 목사가 계약론을 구약신약에서 다루지 않고 신약신학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해 유 영기교수는 “물론 이것은 그가 구약학자가 아니고 신약학자인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미 1964년에 간행된 이사야 주석에서 55:3의 “영원한 언약”에 대해 은혜계약, 곧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하시는 계약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세우시고, 모세로 말미암아 확고히 하였고, 다윗에게 예언되었다고 하였다. 반면에 1968년에 발행된 창세기 출애굽기 주석에서는 언약을 언급한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주석이 없다. 이에 대해 유 교수는 “정암의 계약사상은 구약에 나타난 계약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느냐에 강조점이 있다기보다는 신약의 계약은 이미 구약에 나타난 계약들 안에 약속되어진 약속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하겠다”고 하고, “그의 계약사상의 출발은 구약에서가 아니라 신약에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그가 계약론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을 신약 신약의 시작부분에서 설명하고 있고, 바로 “마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마고 약속하신대로 이루어 주셨다는 의미이다”라고 하는 서술에서도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계약사상의 출발은 구약에서가 아니라 신약에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는 결론은 박 윤선 목사의 성경 신학을 검토해 보면 약간은 무리라고 여겨진다.

박 윤선 목사는 계시사를 연구하며 계시의존적인 사색을 한다는 의미에서, 구약성경신학을 기원론에서 창조에 대해 설명한 후에 원시 시대의 계시, 홍수 이전 시대의 계시와 노아 시대의 계시, 선민국가의 기본 계시, 선민국가의 조직과 관련된 계시, 예언시대의 계시를 다루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계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원시시대의 계시에서는 행위 계약과 은혜언약을 다루고 있다. 원시 시대의 계시에서 먼저 구속운동 이전 계시를 다룬 후에, 최초의 구속 계시를 다루는데, 이것이 바로 행위 계약이다. “행위계약(창2:17)에서 하나님은 그 때에 아담에게 단 한 가지 계명(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만을 주시고, 그가 그것을 어길 때에는 죽음에 이르도록 규정하셨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 참여한 행위언약(호6:7)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인류를 처우하심에서 언약의 원리로 일관하신다. 그런데 아담이 언약을 어기는 한 행위 계약에 의해서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창3:15절에 계시된 대로 다른 계약, 곧 은혜 계약에 의해서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죄를 벌 하시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것이다. 아담 하와에 대한 “구원 계약(창3:15)”은 사람에게 마귀를 이기심을 약속하심인데, 마귀를 이김이 바로 구원이다.(요12:31; 롬16:20). “여인의 후손”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택한 백성의 대표자 격인 메시아를 포함적으로 의미한다. 특히 “여인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죄와 마귀를 이김으로 구원얻을 것을 의미한다.”그는 최초의 구속계시를 설명하면서 율법에 순종하는 조건으로 맺어진 행위계약을 파괴함으로 주어진 은혜계약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박 윤선 목사는 창조에 이어 구속계시인 은혜언약을 설명하고 있다.

박 윤선 목사는 다음으로 “홍수 이전 계시와 노아 시대의 계시”의 “홍수 심판”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자연 계약”으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자연계를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으시리라는 자연 계약을 설정하셨다. 자연계약은 1) 은혜 계약의 진실성을 보장하고 2) 이 계약에 의해 은혜 계약의 대상이 준비되며 3) 은혜언약을 통해 완성되고 4) 은혜 언약의 모형이 된다.

그는 이렇게 자연 계약을 설명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계약의 필요성과 계약의 성격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계약의 제도는 1) 우리가 하나님의 진실성을 믿도록 하려는 것이므로 필요하고 2) 하나님이 인류를 취급하심에 있어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시므로 먼 장래와 관계된 일들도 약속하시게 되므로 필요하고 3) 사람들의 종교 윤리적 인격을 시험해 보는 제도로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계약의 성격은 1) 계약(혹은 언약)을 나타내는 베리트는 “쪼갠다”는 의미를 가진 빠라에서 유래하여, “이것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죽여서 쪼개어 양쪽으로 나누어 놓음을 생각한 말이다(창15;10). 이 풍속은 그 계약자들이 위반할 때는 짐승처럼 쪼갬이 된다는 의미였다.” 2) 계약은 하나님의 단독 역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말은 무인격한 존재와도 관련될 정도로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맺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계약하실 때 “독자적인 주권”으로 임하셨다.(창15:8-11) 하나님이 생명으로 이를 서약하신 것이다.(창22:16; 신32:40)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므로 베리트를 70인역에서 동등관계를 나타내는 쉰데케가 아닌 일방적 관계를 나타내는 디아데케로 번역하였다. 정암은 자연계약을 설명하면서 언약의 일반적인 특성과 성격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나타나 있는 본문들을 사용하고 있다.

박 윤선 목사는 바로 이어 “선민국가의 기본계시”의 계시내용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설명한다. 여기서는 그는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창12:2-3절에 있는데,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란 말씀과 “땅의 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큰 민족은 큰 나라를 의미하는데, 그 후에 이루어질 육적 이스라엘로 표현될 신정국가를 말하고,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중심한 영적 국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왕국에서 사람들이 받을 복은 속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축복으로 영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너로 인하여”라는 말은 창22:18에서 “네 씨로 말미암아”로 좀 더 자세히 밝혀지는데, 여기 “씨”란 말은 자손을 의미하면서 한 사람 곧 메시아를 가리켰다.(갈3:19)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언약은 메시아를 통한 구속언약이자 은혜 언약이다.

그는 계속해서 모세의 시내산 계약과 다윗 계약을 설명한다. 시내산 계약도 아브라함 계약의 내용을 포함하고, 그 계약의 연속임을 암시한다. 아브라함 계약도 왕국 계약인데, 시내산 계약도 국가를 성립시키는 율법을 통해 왕국과 관련되어 있고, 제물의 피로 속죄받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시내산 계약이 은혜계약(재래의 아브라함 계약)을 거스르지 않아서(갈3:16) 계약은 모두 단일 내용으로 내려온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윗 계약도 왕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삼하7:13-16; 시2:7; 시110편) 특히 왕국 시대 예언자들은 위의 계약에 포함된 메시아 왕국과 메시아로 말미암은 속죄제도에 대해 많이 예언했는데, 이사야 53장이 그러하다. 이와 같이 박 윤선 목사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으로 이어지는 계약은 근본적으로 동일하게 메시아 왕국 계약이자 메시아를 통한 속죄의 은혜 계약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국에 대한 약속은 예수의 초림과 그의 복음운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왕국 성취가 연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를 비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구약의 계약이 신약의 예수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점을 구약신약부분에서도 강조하나, 그의 계약신약은 이미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의 계시사의 흐름 속에서 분명하게 설명되면서 구약에서 분명한 시작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언약신학이 신약에서 시작된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그는 바로 계약신학을 중심으로 신구약의 통일성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3. 박 윤선 목사의 성령론

박 윤선 목사의 성령론에 대해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령론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 차 영배 교수가 주장하였고, 김 영한 교수가 수용한 입장이다. 박 윤선 목사가 처음에는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입장에 따라 성령은사중지론을 주장하였으나, 차영배 교수의 영향을 받아 은사중지론에 대한 입장을 완화시켜 은사지속론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차영배 교수는 『박윤선 신학과 한국신학』의 권두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해(1980년)의 초여름에 저의 연구실로 친히 오셔서 성령론 특히 오순절 성령 강림에 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주제는 사도행전 8장이었는데 오순절에 성령이 단회적으로 강림하였다면 사마리안인들에게 또다시 성령이 임했다는 표현이 의인간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실제로 임했다는 것, 이후부터는 성령론을 차교수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의 성령론이 전통적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김영한 교수는 이러한 증언을 근거로 신학적으로 차 영배교수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1980년 이래 박윤선 목사의 성령론이 확실히 바뀌게 되었다고 보았다. “심산이 피력한 성령의 현재적 역사에 대한 뜨거운 신학적 증언은 차츰 박윤선 박사의 입장을 은사지속론에 대하여 열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노년의 박윤선 박사는 성령론에 관해서만은 심산의 은사지속론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김명혁교수도 『한국교회의 쟁점 진단』 제5장에서 박윤선 목사님이 성령의 사역을 포괄적으로 인정하여 성령은사론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배본철교수는 차영배 교수가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암이 차교수의 영향을 받아 1978년부터는 그러한 입장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정암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을 가기 전에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에 서 있었으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하게 됨으로 워필드(Warfield)나 개핀(Gaffin) 등의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영향을 받게 되어,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귀국해서도 총신대학교에 교수 및 학장으로 있을 때 1977년까지는 이같은 입장에 서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윤선은 1978년부터 차영배와의 논의를 통해 성령세례론에 변화를 보이게 되어, 마침내 1980년에는 그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윤선은 자신이 저술한 주석의 특정 내용을 변화된 해석학적 입장에서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그후 박윤선이 총신을 떠나 합동신학교로 옮기고부터는 계속 자신의 변화된 입장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차영배 교수는 분명하게 중생과 성령세례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이화영 목사도 정암이 차영배의 영향을 받아 성령세례절충론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박윤선 박사는 초기에는 화란의 개혁파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성령세례단회론을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성령세례절충론으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박윤선은 처음에 카이퍼의 견해를 수용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주장하여 “"비유하자면 수도의 설비와 같은 것이니 이 설비에 있어서 중요한 원 파이프를 통해 물이 내려온 다음에는 그 내려온 물이 모든 부속 파이프를 통하여 고요히 공급되는 것과 같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신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오늘까지 역사하신다"고 주석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유작인 개혁주의 교리학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사도행전 주석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박윤선 목사는 자신의 주석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가? 먼저 성령세례와 중생의 관계를 살펴보자. 정암은 사도행전 1장 5절에 대한 주석에서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릴 성령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이 물세례의 직책을 수행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의 그의 직책상 불가결한 것임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성령을 주시는 그 역사를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주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1) 성령의 물붓듯 풍성히 부어주실 것을 의미하며(롬5:5) 2) 성령세례는 영적이어서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것을 가리키고(요3:5; 고전6:11; 딛3:5) 3)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가리킨다(고전12:3).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게 되는 관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립된다.(롬6:3-4)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할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정암은 머레이의 견해를 인용하여 “세례가 죄를 씻음(중생)과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령세례 받는 방법에 대해 1)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며(요3:7-8) 2) 신자로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므로 성령을 받게 되고(눅11:13) 3) 그리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은혜가 임한다(행5:32)고 설명한다. 정암은 2)번에서 성령세례는 영적이어서 인간의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이것이 바로 중생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중생할 때 그리스도와 연합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머레이의 견해를 인용하여 (물)세례가 죄를 씻음(중생)과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죄를 씻음인 중생과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나타내므로 정암은 성령세례가 중생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전 12장 13절에서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에 대해 ‘진정한 세례에는 성령의 역사가 동반하시나니,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요3:5)”고 하여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한다.

박윤선 목사는 사도행전 8장 17절에 대한 주석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고 있다. "성령을 받는지라"는 구절에서 대해 “이것은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중생한 자)가 또 성령의 특수한 은혜를 받음에 대하여 말한다”고 해석한다. “토레이(R. A. Torray)는 말하기를 "행 1:4의 "약속"이란 것이 그 다음 절의 "성령세례(성령의 특수은사)" 주실 것을 의미했는데, 행 2:39에는 그 약속을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신자들도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른 해석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려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 몇 가지를 말했다. 곧, 성령의 세례를 받으려면 (1)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사실 위에 신뢰하고 안식할 것, (2) 자기의 모든 알려진 죄를 버릴 것, (3) 죄에 대한 공고백을 할 것, (4) 하나님께 헌신할 것, (5) 성령받기를 기구할 것, (6) 신앙을 가질 것 등이다." 박윤선 목사는 이곳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사도행전 19장 1-7절 주석에서 예수님을 알고 있는 제자들이 성령세례로 인도받았다고 말여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한다.

“어떤 제자들”은 기독신자들이면서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고 말한 것은 성령의 은사들(카리스마타)이 신약적으로 특수하게 임하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이 유대인이니 성령을 몰랐을 리는 없다(Calvin). --- 여기서 바울이 세례를 문제로 그들을 접촉한 이유는 그들을 성령세례로 인도하려는 까닭이다. --- 성령이 임하여 방언을 하게 되었다 --- 오늘날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방언을 주실 수 있다." 박윤선 목사님은 어떤 곳에서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어떤 곳에서는 양자는 구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대하여 정암은 사도행전 2장에서 단회성의 측면과 연속성의 측면이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영구한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 성취의 문을 여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사건은 단회의 사건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적용으로 교회의 출발이란 계시사의 측면에서는 단회적이다. 그러나 “성령 역사의 놀라운 성격이 오순절의 사건에 국한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성령이시니 지금도 놀라운 성격(이) 있는 초자연적 역사를 하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단회성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그 때에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의 권위가 후대인에게 계승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정암은 “방언에 대하여”라는 특주에서 계시시대와 교회시대를 구분하여, 계시시대에는 표준적인 이적과 계시가 있었던데 반해, 교회시대에는 사도적 증표를 보여주는 이적은 없지만, 특별섭리는 있다고 한다. 신유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늘날도 그러한 의사가 있지만 사도시대의 표준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 섭리에 의한 것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정암은 은사중지론보다는 은사의 역할을 인정하는 입장에 서 있다. 정암은 사도행전 19장 6절 주석에서 “오늘날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면 어떤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대한 주석에서도 성령은사의 지속성을 인정한다. 박윤선 목사는 차영배 교수의 영향을 받아서 성령론에 대한 그의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구속사적인 단회성과 함께 사역의 지속성을 인정하고 있고,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며, 성령은사의 지속성을 인정하고 있다.

4. 박 윤선 목사의 칼빈주의 이해

1) 일반은총론

박윤선은 1952년에 파수꾼에 두 번에 걸쳐 칼빈주의에 대하여 기고하였다. 그는 여기서 칼빈주의에 대하여 논하면서 주로 칼빈, 아브라함 카이퍼, 헨리 미터 등의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칼빈주의의 주요 원리는 예정교리나 하나님의 영광 혹은 인간의 책임 역설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것들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하는 사색”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자가 어디서나 무엇에서나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와 의지의 활동을 생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기신학은 시간과 공간 세계에서 하나님의 적극성있는 계시나 섭리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정암은 칼빈주의가 “칼빈 자신의 생래적 사상 체계가 아니고 성경 말씀을 바로 해석한 대로 믿어 나가는 사상체계”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에서는 성경 말씀이 “전폭적으로 성신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어서 절대무오류한 것으로 믿어” 성경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해석한다.

칼빈주의의 중요한 특색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일반은총을 인정하는 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구원과 관련된 특수 은혜와 함께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누리는 보통 은총을 주장하였다. 보통 은총은 죄성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가운데 어느 정도의 질서와 정의를 보존하는 것이다. 카이퍼는 보통 은혜의 적극적 측면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있는 재능을 어느 정도 발휘하도록 보존하시는 것이라 보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 2장 16절 이하에서 보통은총을 설명한다. “성신께서 신자들에게 교통하시는 은혜는 그들을 성화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또 다른 방면에 있어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시키는 성신의 역사도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2권 3장 3절에 불신자에게 나타나는 선이나 덕행은 성품의 부패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재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정암은 이와 같이 일반은총을 인정하여 칼빈주의 국가들에서 과학이 발전한 사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은총의 영역에 정치도 포함시킨다.

정암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입장에서 이러한 일반은총의 영역을 인정하지만, 서영일의 분석에 따르면 세상과 사회에 대한 그의 입장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그는 이 세상을 “장망성, 마취국”이라 부르는 번연의 입장에 동조하기도 하고, 불교에서 빌어온 “고해”라는 용어도 자주 사용한다. 그래서 서영일은 “그의 주석을 읽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칼빈주의적 자세가 그의 머리 속에서만 맴돌았을 뿐 가슴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평가한다.

 

2) 교회와 국가의 문제

박윤선은 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하여 1950년대에 여러 편의 글을 파수꾼에 썼다. “칼빈주의 (1),”(1952.4), “칼빈주의 (2),”(1952.5), “칼빈주의에서 본 기독교인과 국가,”(1952.11), “신자와 문화건설,”(1953.8), “칼빈주의와 정치,”(1953,10) 등을 기고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6.25전쟁이 진행되던 무렵이나 휴전 협정 직후에 서술된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는 김진홍 목사와 함께 헨리 미터(Henry Meeter)의 『칼빈주의』(Basic Ideas of Calvinism)(1959년 제4판)를 번역하였다. 이러한 글들을 통하여 정암은 기본적으로 칼빈의 정치사상을 수용하였다. 정암은 국가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므로, 반드시 기독교적일 필요는 없다는 없고, 불신자들이 다스리는 국가도 가능하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바람직하지만 왕정이나 귀족정치도 반대할 이유가 없으므로, 특정한 정치 형태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정암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교회와 국가를 혼동하지 말고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하고 교회는 특별은총의 영역에 속하므로 성별이란 경계선으로 구별되어 있다. 정치가 종교를 간섭할 때 독일과 일본같이 나라가 망하고 종교가 정치에 간섭할 때 여러 폐단이 생기는데, 칼빈은 신앙의 부패가 온다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구별된 영역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국민들은 로마서 13장의 말씀에 따라 통치자들을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에 통치자들이 독재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암은 다스리는 자들이 크게 잘못할 때에 사설단체나 군중의 불법한 음모와 반란에 반대한다. 칼빈주의는 지배자가 크게 잘못하는 때에 재하자들은 명랑하게 또는 합법적으로 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저항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패할 때에는 칼빈주의는 반항보다는 오히려 참는 것을 좋게 여길 것이라는 미터의 견해에 정암도 동조한다. 그는 “무슨 제도를 변혁하기는 쉬우나 개량되기는 어렵다”는 루터의 말을 인용하면서 “현재의 고난은 지은 죄 때문에 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정암은 독재자에 대해서 무력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저항을 인정하지 않고 하급관리에 의한 합법적인 저항만을 인정한다. 이러한 정암의 입장은 칼빈의 입장과 거의 동일하며, 베자나 낙스같은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무력저항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암의 입장은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치 박정희와 전두환 대통령의 독재 정권 하에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독재정권의 합법화 작업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권위를 합법화시켜주는 조찬기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입장을 유지하여 국가의 독재적인 통치에 대하여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하비 칸의 transformation지 사건이다. 하비 칸은 1986년 여름에 광주 사태 1주년을 기념하는 기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기도 모임에 참석 여부를 복음주의자들에게 묻는 형식의 질문지를 돌려서 그에 대한 답변을 이 잡지에 기고하려고 하였으나 정암은 하비 칸에게 그러한 설문지를 돌리지 말도록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요청에 대한 답변으로 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역시 “사회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를 구분해야 하며, 기독교 공동체로서 우리는 정부의 도덕적 위치가 어떠하든지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대해 하비 칸은 편지를 보내 “제가 보기에 당신의 칼빈 이해에 균형이 좀 더 필요하리라 믿습니다”라고 하였다. 칸은 칼빈이 단지 기도만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후원자로서의 우리가 항거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오덕교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합동신학교 설교시간에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를 했다고 하며, 김영재 교수는 이 서신 교환 이후에 “자신의 종래에 견지했던 그 견해나 자세를 반성해서 그랬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설사 그런 발언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학교 내에서 한 발언으로 끝났을 뿐 공식적인 의사표명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암의 독재적인 정권에 대한 저항의 문제는 정교분리의 입장에 치중하여 소극적인 입장에서 침묵하는 입장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5. 박윤선 목사의 교회관 - 교회의 분리 문제

교회의 분리 문제에 대해 결국 그는 1980년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세우는데 동참하고 그 학교 설립에 따라 개혁교단을 세움으로써 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러한 분열은 교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설득력이 가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가 분열할 때에는 적어도 분명한 교리적인 차이가 있어야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설립될 때, 그들은 적어도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반대한다는 교리적인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정암도 자신의 주석에서 교리문제만이 교회 분열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임을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참됨과 거짓됨은 그 교회의 공동고백과 권징 실시 여부로써 구별되고, 그 교회의 성원인 개인 신자들의 사회 생활의 완전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다. 만일 누가 교회의 개인 신자들의 결점으로 인하여 교회적 생활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그것은 혹시 “분리”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만일 누가 교회의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으로 축출을 당한다면 그는 “분리”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을 뿐이다.

그는 1979년 비주류측이 분리해 나갔을 때에도 정암은 1980년 신학지남에 “분파의식에 대한 소고”를 기고하여 교회가 분열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로 1) 칼빈이 로마 가톨릭에서 나온 것 같이 주요한 교리에서 오류를 범할 때 2)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갈등과 같이 교회가 옳은 교리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신실하게 지키지 않을 때, 3) 부당한 이유로써 치리가 정의롭게 행해지지 않을 때라고 말하고 분열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로 지방주의와 독선주의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김영재 교수도 교리적이며 신학적인 오류와 그것으로 인한 부패의 경우에 분립의 명분을 인정하나, 도덕적 부패의 경우는 정화의 대상이지 분립의 명분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합신 교수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교회의 분립을 도모할 의사가 없었으나 교회를 쇄신하고 교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바람직한 교육을 시행하기 원했던 것이 진행되면서 분립의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한국장로교회들 가운데 분립에서 자유로운 교회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분열한 소수그룹은 자신들이 겪은 통상적인 의미의 “분립”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분립’을 인정하는 것은 분열한 다른 그룹과 역사를 같이하고 있음을 표명함과 동시에 분열의 충분한 이유와 함께 분열한 그룹과 연합을 지향하는 교회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박윤선이 ‘개혁신학교’라는 명분있는 이름을 마다하고 ‘합동신학교’라는 명칭을 선택한 것은 바로 분열을 솔직히 시인하고 연합을 지향한다는 그의 교회관 때문이었다.

정암이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를 세울 때에 도덕적인 명분은 있었을지 모르나 교리적인 명분은 없었다. 그러므로 박윤선의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의 설립은 현실교회 정치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저항의 성격은 있을지 모르나, 개혁주의 입장에서 교리적인 타당성을 인정받기는 어려운 것같다.

 

나가는 말

박윤선의 개혁신앙에 대한 재평가를 해 보는 것은 앞으로 좀 더 많은 연구가 진척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 본인이 살펴본 것은 이미 그의 개혁신앙에서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몇 가지 점을 살펴본 것에 불과하다. 첫째로 그의 성경관과 종말론은 평양신학교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보수주의 내지는 경건주의적인 복음주의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은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굳게 견지했던 것으로 프린스턴 구파의 성경관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정암의 성경관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종말론 사상에서는 개혁주의의 주류인 무천년설과는 거리가 있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의 남북전쟁 이후의 염세적인 분위기와 함께 세계 선교에 대한 열망 속에서 발전했던 세대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진영의 세대주의 전천년설 내지는 역사적 전천년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반대하나 박형용과 동일하게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하며, 이 점에서는 오히려 워필드의 무천년설을 비판하고 후에는 뵈트너의 후천년설도 비판하여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것이 선교사들의 영향과 함께 한국교회의 강력한 역사적 전천년설의 전통, 그리고 계시록 20장 4-6절에 대한 문자적 해석의 집착의 산물로 보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대한 2차의 유학과 화란에 대한 유학을 통하여 꾸준하게 성경주석에 몰두하였다. 그는 메이첸과 반틸, 그리고 구프린스톤 신학의 핫지와 보스, 워필드 등의 영향과 함께,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리델보스, 스킬더 등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그는 개혁주의의 근원에 해당하는 칼빈의 주석과 기독교강요도 많이 인용하며 성경을 주석하고 다른 책들을 저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주석, 성경신학, 개혁파 교리학 등에 나타나 있는 그의 개혁신학의 특성은 구프린스톤 신학과 화란 개혁신학의 영향을 통해 칼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정암은 칼빈 연구를 통하여 개혁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프린스톤 신학자들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들과 화란 개혁신학자들을 통해 칼빈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관에서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강조하면서 워필드의 영감론을 중심으로 따르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성경의 자증성을 강조하지만, 성령의 내증에 대한 강조는 약하다. 물론 그는 3대 칼빈주의자들인 아브라함 카이퍼, 바빙크, 그리고 워필드 3명의 신학을 골고루 소개하고 있다.

정암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개혁주의 신학을 성경 신학에 접목시킨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데서 반틸의 계시의존사색의 원리와 함께 성경무오성 교리, 그리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리를 묶어서 실질적으로 신구약 성경 전권을 주석한 것은 놀라운 공헌이다.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배워도 그것을 성경 본문에 적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성경 전체에 걸쳐서 그러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엄청난 작업이다. 그런데 정암은 신구약 성경 전권에 걸쳐 개혁주의 신앙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주석작업을 한 것은 한국교회의 수준을 상당히 성장시킨 것이다. 물론 그의 주석에 약간의 알레고리를 적용한 면이 있고, 서양의 비평주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단점이 있다 해도, 그가 이룬 공적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주석 작업에 화란 개혁주의자들의 주석을 인용하여 미국 일변도를 벗어나 화란 개혁 신학을 소화할 수 있게 한 것도 중요한 공헌이다. 그는 화란의 리델보스의 연구업적들을 수용하면서, 그의 성경관에서 정통주의 노선에서 벗어난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자신의 개혁주의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정암의 성령론은 차영배 교수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순절 성령강림단회성을 구원사적인 측면에서는 인정하지만, 그 이후에 성령의 사역의 지속성의 측면에서는 반복적인 면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고 있으며, 성령의 은사중지론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현재에도 특별은총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주의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입장과 함께 칼빈의 입장에서 일반은총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여 과학발전에 기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비관적인 면도 강하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칼빈의 입장에서 정리하여 독재정권에 대한 합법적인 저항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1970년대 이후의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였다. 합동신학교 설립은 신학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명분없는 교회분열을 가져온 측면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이 정암의 개혁주의에는 미국의 찰스 핫지와 워필드로 이어지는 구프린스턴 신학과 메이첸과 반틸의 웨스트민스터 신학, 그리고 카이퍼와 바빙크를 중심으로 한 화란 개혁신학이 종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선교사들을 통한 한국교회 복음주의 전통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수용하고 차영배 교수를 통해 성령론에서 오순절교파의 일부 입장 등이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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