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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에게 생권(生權)을 보장하라!

롬8:18~30

                   *여기서 ‘생권(生權)’은 ‘인권(人權)’의 확장언어로 쓰였음



달걀을 얻으려고 닭을 기르거나, 고기를 얻으려고 닭을 기를 때 닭에 생기는 진드기나 기생충을 잡기 위해 살충제를 뿌림으로 결국은 그 닭의 고기나 달걀을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일을 두고 ‘달걀’파동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무자비한 소비의 시대에 이런 일이 어디 닭에게만 해당 되겠습니까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사람들은 그제 서야 닭들이 어떻게 살면서 몸집을 키우는지, 알을 낳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동물들을(닭이나 개나 소나, 사람이 먹는 어떤 동물이든)그렇게 사육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논들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때에 기독교는, 성서는, 성서의 인물인 바울은 뭐라고 하는지를 보려는데 오늘 설교의 요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에 있어서 특이한 구절입니다. 이 단락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생각할 때, 상상하기 어려운, 바울이 외부로 부터 어떤 다른 영향을 받았나 할 정도로, 다른 내용입니다. 서구 신학에서 규정하는 소위 범신론이라고 하는 그런 영역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개한 그리스도론이 루터를 통해서 이 사도적 복음의 핵심으로 간주된 이래로,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사람들은 죄인이지만 죄 없다고 인정함을 받는다는, 이 교리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공식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인론이라고 우리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범위에서 훨씬 벗어납니다. 죄진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걸 ‘사도적 복음’이라고 루터가 이름을 지었는데 그보다 훨씬 넓게, 훨씬 깊게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인간 밖에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까지 구원론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바울은 피조물이 고통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만물이 허무한 데 종속되기 때문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참 사람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기발한, 바울에게 보기 드문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기독교에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 안에서는 완전히 묵살이 되어 왔습니다. 대체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실은 이것은 서구적 사고입니다만, 자연과 사람을 엄격히 구별하고, 신도 엄격히 구별합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그 순환 원리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순환을 반복할 따름이고, 인간은 이 자연을 정복함에서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최대 과제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진통하는 것들이 이 지구가 깨지고 있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깨지는 지구를 방어하는 길도, 또 다시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는 방법으로, 즉 어떤 신기술에서 찾을 수 있으려니 하고 낙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양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동양은 자연 안에 사람을 포함시킵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협동의 대상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 것이 삶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인간이 숨을 쉬듯이 자연도 숨을 쉬고 인체에 맥이 있듯이 자연에도 맥이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이 병이 들면 인간도 병이 든다.’ 이런 생각입니다.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깊고, 크고 넓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에 순응해서 사는 지혜를 가질 때에만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동양의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인식입니다. 그래서 옛 부터 돌 나무 하나를 함부로 꺾거나 옮기거나 혹은 자르지 않았습니다. 대지의 형태를 함부로 바꾸려는 일을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어떤 산의 허리를 자르면 거기서 피가 난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기가 끊기면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재앙을 당하거나 기가 빠져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지형을 함부로 바꾸면 그 지형을 의지하고 살던 무수한 생물들이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그대로 옵니다. 서구에서는 이미 어떤 산등성이가 있으면 그곳에 절대로 집을 못 짓게 합니다. 지평선 너머 있는 곳에 바람이 불어서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고 해서 그곳에 못 짓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남산 같은 데 집을 짓고 아무데나 짓고 있습니다. 이른바 먹이사슬이라는 말이 생태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야 나무 하나 자르는 것, 자연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생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기독교도 기본적인 반성을 해야 될 때입니다.

 

전에는 동물계에서 사람과 동물이 사는 것이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식물도 사람과 사는 양식이 같습니다. 그중에 같은 것 하나는 자고 깨야한다는 것, 잠을 자되 낮에는 깨고 밤에는 잔다는 것, 자려면 불을 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을 끄지 않으니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내 주변에 사는 모든 식물이 조그마한 잡초 하나까지도 전부 우리같이 숨을 쉬고 불이 켜져 있으면 잠을 못 잔다고 생각을 하니 그것이 우리하고 같은 생물 아닙니까? 그것만 발견했지 다른 면은 아직 몰라서 그렇지 풀이나 소나무 등 전부가 우리와 비슷한 생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불교와는 상관이 없는,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단정한, 슈바이처도 아프리카에서 개간을 하면서 벌레를 죽이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풀을 뽑으면 그 풀을 다른 곳에 꼭 심었습니다. 생의 의지, 살려는 의지는 존중해야 합니다. 보통 성서를 근거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을 믿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과 함께, 지구의 피조물들과 다 같이 살아야지,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인권이란 말을 생존권 또는 생권이란 말로 바꿔 써야합니다. 인권이란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말 밑바닥에서는 생존권입니다. 생권 입니다. 생권이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권리입니다. 살 권리입니다. 살려고 하는 것을 살려줄 때 그때만 사람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권리만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서구적 발상입니다. 현실은 더불어 모든 생존권을 보호하고 지킬 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존권의 싸움은 전체가 해야 합니다. 생존권을 위한 싸움을 인간이 혼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삶의 바탕은 언제나 바닥에 있습니다.

 

인간 생존권의 위협도 실상은 다른 생명체들의 생존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사실 인간 삶을 위한 바닥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닥이란 어느 누군가가 피를 흘린 자리, 억눌림을 당한 자의 자리, 승자가 아니라 패자, 양지가 아니라 음지, 배부른 자가 아니라 배고픈 자입니다. 밑바닥으로 갈수록 뭔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삶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살려는 몸부림이 팽창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겪는 ‘포비아’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 즉 바닥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저들의 ‘생명 권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려고 인권에 대응하는 다른 권리 즉, 만물의 살 권리,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하는 저 동식물들의 권리, 인간의 권리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들의 살 권리도 인권과 같다는 의미에서 [생권]이라는 조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저의 시선이 아닙니다.

 

바울의 이미 오늘 본문에서 그리 보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생권 운동은 사람을 뺀 피조물, 즉 자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되고 예속된 것을 인식하고 거기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그것은 지금의 사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허무한데 종속시키고 자연을 자연 못되게 하는, 즉 자연을 오염시켜 죽게하는 인간들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해서 공동전선을 펴기를 피조물이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철이 들어서 눈이 뜨인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고 나자 이런 광활한 시야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결국 새로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자연이 기다리는 새로운 사람이란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란 ‘너도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 둘만 보지 않습니다. 성령도 속으로 신음하며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이 표현에서 본문을 정했습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 성령을 통해서, 마침내 자연과 성령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이 일에 하나님도 가담해서 이 운동에 참여할 때에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사람, 자연이 하나가 되어서 한 목적을 향할 때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넓은 사고는 로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기독교는 협소한 교리로 창백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동학에서 말한 “인내천”이라는 말 정도까지도 직역을 합니다. 그래서 배타주의만 길렀지. 사람의 목숨만 조르는 것입니다. 같은 숨을 쉬고 있다는 현실을 계속 거부해 왔습니다. 신학에서 자연은 제목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피조물, 성령, 하느님 이 셋을 갈라놓았지만, 이 셋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애를 쓰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셋 모두가 말이 필요가 없거나 안하거나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말이라는 그릇 속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라는 말을 그리스도 속에 담으려고 하는 것이 교리이고 신학입니다. 교리나 신학은 신을 말로 표현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들어와서도 안 됩니다. 말은 인간만의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방과 교류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이란 종은 자기만이 가진 말로 온 우주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신마저도 말이란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거기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사람이 바벨탑을 지음으로써 하늘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신은 그것을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신을 말로 포착하려고 나온 것이 희랍에서 나온 버릇인데 그 전통을 그대로 받아온 것이 요한 문서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었다.’ 이로써 하나님을 얼마나 협소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말하는 세계만 존재하는 신이라면 그는 지구 위에서 오직 사람이라는 종족에게만 제한된 그런 신이 됩니다. 자연은 말 안하는 존재입니다. 신학적으로 피조물이라는 말을 쓰나 엄밀하게 말해서 ‘말 안하는 존재’이며 그걸 우리는 ‘자연’이라고 하는 거죠.

 

주자학에서 ‘리(理)’와 ‘기(氣)’라는 말로 구별을 하는데 만약 그대로 적용을 시킨다면 성령은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신음으로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말이 미치지 않는, 말이 무력한, 말로 그 현실을 밝혀 낼 수 없는, 그런 고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우주는 침묵 자체입니다. 소리가 없다는 말과 다릅니다. 사람의 말이 없는 것입니다. 말이 없는 것은 무섭습니다. 이 경지를 도덕경에서는 ‘현(玄)’이라고 합니다.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가물가물한 것, 말없이 존재하는 현실이 말하는 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고 무한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서구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서 무자비하게 그 말 하지 않는 경지의 존재들을 학대하며 탐욕의 제물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사람에게만 권리 즉 인권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에는 생권이 하늘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인권만이 있는 줄 오만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새 사람이 되고 보니 우주만물에 눈이 떠졌고, 그들의 생명성이 자신의 목숨과 동일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인간만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도 그들의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그들을 해방 시키는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도 그 일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간만이 아니라 베터리식 케이지에서 몸을 돌리지도, 눕히지도, 앉지도 못하고 죽을 때까지 서서 먹고 알 낳다 죽어가는 저 살충제 닭에게도 권리라는 게, 그걸 우리가 생권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생권을 위해,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고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건 이미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 그 아는 대로 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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