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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아가페)보다 우정(필레오)

요15:10-14

 

미국의 대형교회인 새들백 교회의 담임인 릭 웨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마 대한민국 교인들의 7할은 읽었거나 들어 봤음직한 이 책은, 이미 대단한 양적 성공을 거둔 교회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 성공의 동력으로 제시한 이론은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대적 합리성에 근거한 신앙성장 논리와 이를 따르는 교인들의 헌신, 그리고 현대 경영학적 전략과 전술을 잘 버무린 릭 워렌의 연작들은 계속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급기야 <목적이 이끄는 삶>에 와서는 마치 그 모든 성공의 비밀이 밝혀진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켰습니다. ‘거룩한 목적’, 이것만큼 사람들의 욕망과 신앙을 불편하지 않게 조화시킨 말이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목적으로 방향지우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이겠어요. 삶의 우선순위, 일상의 계획, 경제적 삶의 유지, 시간사용, 재정관리, 사람들과의 만남 등 그 모든 기저에는 ‘목적’이라는 엔진이 항상 구동되고 있고,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지구는 둥글다’는 말처럼 의심되지 않는 명제였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항상 권력을 생산한다는 점을 우리는 종종 간과합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해 ‘전진'해야 하고, 그러자면 의사결정 권한을 지닌 리더십이 필수적입니다. 계급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데, 그것은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는 그들 간의 계약이 이미 성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욕망에 의해 충동된 탈 목적적 권력이 생겨나고 그 부산물들이 계급간의 억압을 생산해 내기 마련이죠. 목적에 의해 도구적 권력이 정당화되는 대표적인 집단이 군대인데, 여기서는 합목적적 권력체계도 문제지만, 목적에서 벗어난 권력 남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권력의 작동이 억압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목적을 벗어난 지배가 생산되는 지점입니다. 억압과 차별은 필수적으로 피억압자의 분노, 슬픔, 한, 울분을 낳게 되는데 그 대부분은 적정한 방법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자기멸시와 자기 파괴로 흘러가기 마련이고요. 목적이 이끄는 사회에서는 억압되는 소수가 필수적으로 양산되고, 그들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예가 북한이고, 중국입니다. 효율성이 있기는 하지만 억압과 통제가 작동되어야 가능한 것이 목적을 향한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 중에서 목적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국가나 기업은 명확한 목표를 가집니다. 국민의 보호, 시민의 정상적 삶의 영위,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 것이 국가의 목표라면, 기업은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업 내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웬만하면 참아냅니다. 회사가 존립하고 이윤을 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교회나 가정도 마치 군대나 국가 같은 목적 지향적인 조직과 활동이 필요하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교회나 가정 같은 공동체는 (‘존재’가 아닌 ‘소유’의 의미에서) 목적을 갖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공동체들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만약 이런 공동체들이 목적을 가지게 되면 위에서 언급한 권력과 계급의 생산이 다시 벌어지고 구성원들은 참된 안식의 공간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약컨대 가정이 과거와 달리 화석화 되는 것도 가정이 ‘목적지향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복음전도=하나님의 명령=우리의 삶의 이유'이라는 등식이 목표로 주어지면서, 총동원체제를 통한 권력구조의 공고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것은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의미상 모순입니다. 가정도 ‘자녀의 사회적 성공’, ‘경제적 풍요’라는 목적이 부여되면, 아버지의 경제자본과 어머니의 정보자본이 권력으로 작동하면서 가부장제가 공고히 자리 잡을 수밖에 없고, 자녀는 고유한 정체성을 상실한 채 목적을 위해 훈련되는 기계로 전락합니다.

 

역사적으로 남성성은 '공간의 확장'이라는 ‘목표'를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윤의 극대화, 무한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남성성의 산물입니다.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총과 칼을 들고 가든, 상품을 들고 가든) 다른 사회, 국가를 침범하고, 그 경계에서 분쟁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경계의 충돌은 항상 전쟁의 양상을 띄게 되는데, 그 결과 '삶은 곧 전쟁'이 되고, 경계 내부의 사회는 ‘생존’이라는 분명한 목적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다른 사회와의 충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체주의, 가부장제, 소수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성의 언어체계가 상징계를 장악하고, 젠더의 모순이 일상의 기저에 편재하게 된 것은 다분히 사회진화론 또는 구조결정론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가정에서 남녀의 가사 분담을 주장하는 여성들도 남편이 다니는 직장에서 여성이 동등한 기회를 얻는 것은 반대합니다. 기업에서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남편을 그 회사로 보내는 전업주부들에게는 위험요인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내부의 체제는 구조의 영향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 구조라는 것이 바로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남성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협박범’이 됩니다.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이렇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젠더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됩니다. 이런 거대한 구조에 대한 반성은 전 지구적 혁명과 같은 변혁을 겪지 않고는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결국 유럽은 두 번의 큰 전쟁을 겪고 나서야 다른 관점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다른 관점이란 바로 공간 확장과 권력체계에 대한 의존성에 회의를 품는 것이었습니다. 서구에서 젠더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입니다. 외부의 커다란 위협이 최소화되는 시점에서는 국가 전체를 지켜야 하는 목표가 보다 작은 단위로 분절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논리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성성의 특징과 달리, 여성성은 제한된 '장소의 의미화'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합니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1971)은, 아내가 없는 아파트에 덩그러니 남겨진 한 사내가 자신의 집과 어떻게 불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아내가 없이는 밥을 할 줄도, 세탁기를 돌릴 줄도,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주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남성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정'이라는 ‘장소'에서는 소외되는 현상을 경험하는 거죠. 소설의 주인공은 책상이 움직이고, 시계가 말을 걸고, 우호적이지 않은 사물이 자신을 공격하는 환상을 경험합니다. 목적이 지배하는 외부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공간을 확장해가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이를 잘 수행하는 이들이, 가정이나 교회 같이 뚜렷한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에 대한 반발로 가정이나 교회도 목적이 지배하는 남성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가 ‘자녀에 대한 과잉 기대’, ‘사교육 시장’, ‘전도열풍’, ‘교회 건물 짓기’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남성은 목적이 없는 공간에서 소외를 느끼고, 자신이 역 차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러면 교회나 가정은 어떻게 되어 할까요? 그것은 ‘장소의 의미화’, ‘탈목적적 공동체’라는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가정은 그렇게 목적을 향해 치밀하고, 치열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나 가정은 단순해야 합니다. 단순성은 자연의 원리입니다. 생떽쥐베리가 말했듯이 완벽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정도로 단순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가정이나 교회가 단순한 프레임을 갖는다고 하면, 그 구성원을 하나로 연결하는 촉매는 뭐가 되어야 할까요? 사랑, 믿음, 배려, 격려, 협력 이런 것들이 작동해야 겠지요.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우정]입니다. 흔한 생각으로 우정은 친구사이에나 있는 친밀한 감정인데 그게 교회나 가족이라는 구성원 간에 필요하다는 말은 처음 들으실 겁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각각의 사람은 오직 기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적, 그리고 심지어 죄인조차도...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실제로 사랑받는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그 자체이다" 모든 인류,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정작 한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소질이 없다는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여럿을 대상으로 하고 개개인에게는 적용 불가한 이 ‘사랑’ 즉 아가페 말고 필레오(우정)가 개개인의 연대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리젠트 칼리지의 설립자인 제임스 휴스턴은 기도를 정의하길,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했습니다. 즉 증여나 환대가 여전히 증여자와 수혜자라는 계급성, 부채의식을 제거할 수 없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정의 가치야말로 현대사회가 회복해야할 가장 의미 있는 돌파구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우정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고, 우리 역시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수많은 타자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전혀 불편함이 없는 동질집단 내에서 발현되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라 자기확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것을 위협하는 경계를 만날 때 흔들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우정을 통해 다시 진화합니다. 놀랍게도 내 경험으로는 이런 방식의 우정이 생존하기 힘든 가장 어려운 환경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회보다 더 많은 가면과 위장을 갖추어야 하는 공간이고, 자신을 드러내기 힘든 장소가 아닙니까? 특히 목사와 교사들(리더들)이 가지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아무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설교와 교육의 방식을 통해 종교담론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을 열어 보임으로써 다름을 드러내고 인정하면서 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대부분 배제됩니다. 나는 은퇴한 후 적정한 우정의 자리를 찾지 못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목사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제자들', '양떼'라고 부르는 이들은 많이 있으나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희귀해진 것입니다. 공동체를 인생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자'도 좋고 '성직'도 좋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친구'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요한복음15:14). 친구란 계급관계가 상정되지 않는 유일한 관계입니. 스승-제자, 상사-부하, 부모-자식, 선배-후배 관계 조차도 서열과 계급의 지배를 받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언제 만나도 친구고 동등합니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관계는 그저 서로의 존재로 만족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소중합니다. 부모도 가정에서 목적을 제거하고 자식의 친구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회는 목적을 가지더라도 교회와 가정은 탈목적론적인 방향성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는 주고받는 사랑, 주는 어머니가 있고 받는 아들이 있는 그런 증여와 환대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우정(필레오)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목적 없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가정이 어떤 목적을 세우지 않고 유지 된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실현하기 어려운, 실행하기 쉽지 않은 일들을 쉽게 포기하고 삽니다.

 

이번 추석에 가족들이 모였을 때 한 번 서로의 가슴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그 속에 휑한 구멍이 뚫려 있나 말입니다. 말은 부모님 사랑 어쩌고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모두들 목적을 따라 허두허둥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가까이 사는 친구와의 우정만큼의 연대도 되어 있지 않은 현실 아닙니까? 오늘날 가정과 교회가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닙니까? 단순하고 단순한 교회와 가정, 그것을 유지하는 우정(필레오)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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