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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도행전에서의 마술에 대한 논평

첨부 1

  1. 기독신자와 마술.pdf (File Size: 160.7KB/Download: 12)

이것역시 스켄한 pdf자료입니다. 글이 아니라 이미지라는 이야기 입니다. 아크로벳9에서 문서인식을 한 결과가 아래에 내용들이고 스켄한 원본은 첨부파일로 올립니다.

 

=================

l 논핑 1
정연락 교수의 기독돼 마술 -사도행전의 경우
들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김희성 교수(서울신대)
정 교수의 연구는 크게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서론에
해당하는 연구의 경향, 둘째는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의 마술, 셋째는 세
개의 본문에 대한 문학적 연구, 넷째는 결론이다. 이 논문을 차례대로
논평해 보겠다.
l.첫째부분에대한논평
정 교수는 첫 부분인 연구의 경향에서 간략한 연구사와 함께 연구의
목적, 연구의 범위, 연구의 방법 둥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연구의 경향
은 오히려 연구 목적, 연구 범위, 연구 방법들과 항목을 나누어서 다루
는 것이 더 명쾌했을 것이다
정 교수는 연구 목적과 관련뼈 “선약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신약이
마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차별화를 꾀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
히려 마땅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 저자가 기독교와 마술을 어떻게 차
별화하는지를 검토하기로 한다 고 함으로써 그의 연구 목적을 피력한
다. 그러나 이 연구 목적에는 상황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해석
84 무속, 환생, 뉴 에이지 문화와 개혁신앙
학적 관점이 빠져있다. 그래서 정 교수가 마술의 문제를 해석학적 차원
으로 끌어올려 한국 교계의 현상황과 관계를 맺게 했어야만 했는데 그
렇게 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었다.
정 교수는 연구 범위와 관련뼈 신약에서 마술을 행하는 단어들을
열거하고 그중에서 행전에는 μ ayo5'과 πEplEpy05'가 마술사들의 행위
에 관계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그 용어가 나타나는 행전의 본문들(행 8:
4-25; 13: 4-12; 19: 8-20)을 다루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본문들을 주
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행전 안에서 마술과 관련된 연구에 세 본문을
주목하게 한 것은 그의 공적이다. 그런데 그는 이 과정에서 μ ayo5'의
의미는 다루었지만 7TEplEpy05'의 의미는 다루지 않았다. 후자의 의미
를 다루어 두 용어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언급되어야 마술에 대한
이해가 폭이 넓어질 것이다.
정 교수는 연구 방법을 연구 경향의 마지막에 그것도 각주에서 다루
고 있다. 연구 방법은 가능하면 본문에서 다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각
주 18) 에서 그는 마술에 대한 이해는 서사비평 방법을 사용하여 본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본분이 말하는 것의 청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술에 대한 이해를 포착하는 방법이 아니라
마술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포착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사
실적인 마술과 본문에서 평하된 마술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학문적인
예리한 구별을 하지 않고 있다. 마술에 대한 이해는 본문 외적인 종교사
적 연구,사회학 문화학적 연구 그리고 본문내적인 편집-전승 구분을
포함한 역사적 연구 퉁이 병행되어야 이루어칠 수 있고 또 행전의 저자
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히여
마술에 대한 윤곽을 그려고 그것과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어
떤 현상과 비교해서 관련성이 있게 될 때 현재의 그 어떤 것에 행전 저
자의 평가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85
2. 둘째 부분에 대한 논평
이 부분에서 정 교수는 행전에 나타나는 마술사들이 유대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서 마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정
당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주장한 바와 같이 단순하게 유대교와 관련하
여 그것을 정리한다. 그러나 여기 행전의 본문에서 나타나는 지역은 사
마리아 구브로, 에베소이기 때문에 유대인 사회도 디아스포라 유대 사
회와 팔레스틴 유대 사회로 그리고 가능하면 팔레스틴 유대 사회도 유
다와 사마리아로 좀 더 세분하여 다루는 것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정 교수가 주
장한대로 마술을 긍정적으로 인정했으나, 정 교수가 언급하지 않은 팔
레스틴의 랍비에게서는 그것이 완강하게 거부되었다는 사실 (TWNT
IV; EWNT 11 , μ ayo5' KT?.)도 아울러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 교수는 유대인 사회에서의 마술을 다루기 위하여 이
미 서론격인 연구의 경향 부분에서 “이 용어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의
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고 애드벌룬을 띄운다. 그러나 이 마슐 용어들
(μ ayo5‘ KT'\) 에 대한 통시적, 종교사적 일별을 했다면 그러면서 이 헬
라어의 용법을 살펴 보았다면, 그리고 유대교에서 “마술을 가르치는 자
는 죽음에 해당한다~'(TWNT IV, μ ayo5‘ K다. )는 금지 조항을 접했었
더라면, 그러한 일방적인 표현은 조심해서 사용했었을 것이다.
3. 셋째 부분에 대한 논평
정 교수의 논문에서는 여러 곳에서 철저한 주석적 작업이 이루어지
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행 8: 4-25 의 주해에서 믿고 세례받
고 보고 놀랐다는 본문에도 불구하고 정 교수는 마술사 시몬의 눈에 하
나님의 말씀의 사역이 마술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였다고 언급한
86 무속, 환생, 뉴 에이지 문화와 개혁신앙
점 ; 본문에서 도출하기 어려운 것인데 시몬이 유대인 사회에서 하나님
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빙자하여 마술을 행하였다고 한 점 ; 그가
세례받은 후 돈으로 성령을 부여하는 권능을 사려고 했을 때 베드로가
책망하며 회개하라고 권고하고 그리고 .:I7} 대신 용서를 벌어달라고 한
것이 교회 외부를 겨냥한 것인지 교회 내부의 인사들을 겨냥한 것인지
에 대한언급이 없는점.
행 13: 4-12의 주해에서 바울이 유대인 거짓 선지자를 만난 곳은 유
대인 회당일 것이라는 추론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장소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또 바로 다음의 문맥은 마술사 바예수가 총독과 함께 있었다
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의 이름 엘루마를 해석하지 않은 점 : 아
랍어로 ‘알리마 는 ‘어떤 것에 통찰을 얻는다’ 는 의미이고, 아람어로
‘할로마는 ‘꿈 해석가란 의미이다{참조. G. L?demann, Das .fr?he
Christentum, G?ttingen, 1986.S.157). 이 의미로부터 그가 총독의 무엇
을 위해서 있었는가가 도출되며 거기서 마술사 내지는 거짓 선지자로
서 그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 유대인으로서 회당에서 선지자 노릇
도 하면서 동시에 마술을 행하였다는 언급은 본문에서 도출하기 어려운
자의적인 부분처럼 보인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하는 자인 엘루마가 하
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진 마술사 시몬과 같은 통속이라고 한
것은 너무 비약이다. 바예수는 그 정도가 아니라 궤계와 악독이 가득한
자 마귀의 지-식, 의의 원수이다 그는 아직 예수와 신앙적인 관계를 갖
지 못한 반면, 마술사 시몬은 믿고 세례까지 받은 사람이다; 주의 길을
굽게하는 것은 누가복음 3: 4-5 의 이사야 예언을 따라{맞음) 사역하는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돌이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행전 저자의 사상에 대한 오해이다. 행전 저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
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찾아 오시는 길은 세례 요한이 준비하고 예수
님께서 가시고 사도들과 바울이 계승하는 길이다. 주의 길을 굽게하는
것은 이 구원 사역의 길을 방해하는 것이대참조. 김희성, “누가의 역사
화된 구속사적 종말론", <.신학과 선교> 19, 서울신학대학교, 1994.73
논평 1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마술 87
106쪽; 특히 2) 주의 길, 89-95 쪽) : 해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마술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 것도 명확하지 않다. 본문의 용어들(말씀 청
취를 방해; 해를 보지 못하게 된 것; 손잡고 길을 안내할 자를 찾는 것
등)은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눈멸어 사
람들의 손에 이끌리었던 것을 유비적으로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행 19: 8-20의 주해에서 정 교수는 “유대의 대제사장”을 “대제사장
가문”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
나 대제사장의 일곱 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지에 대해 본문은 침묵하
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대제사장 이라는 말은 유대적 제사장 귀족의
가문에 속함을 표시하기 (A. Weiser, Die Apostelgeschichte 11. S.529)
때문에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섭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심하
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정 교수는 예수의 이름 사용에 대한 서술에
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도 역사하는 “희한한 능”을 마술로 인정
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그리고 결론에서 예수의
이름이 마술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론에서
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는다. 본론을 전개할 때 “희한한
능” 만이 아니라 예수의 이 름도 마술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없고, 그것
은 그리스도인의 이름에서만 작용한다는 저자의 의도도 분명하게 밝혔
으면 더욱 명쾌했을 것이다.
결론적평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논문은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 할 수
없는 방법론, 마술에 대한 종교사적 관찰의 결핍, 철저하지 못한 주석,
해석학적 관심의 결여 등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
전의 저자가 이해한 마술과 그것에 대한 평가를 드러낸 것은 이 논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 당시에 횡행하던 마술이
88 무속, 환생, 뉴 에이지 문화와 개혁신앙
사실적으로 무엇인지를 즈드러내는데는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행
전의 보도를 역사적 사실로만 보는 관점의 문제점을 간과한 데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논문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현대 한국의 교회
적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어떤 것이 이 마술과 관련이 있고 그래서 우
리의 상황에 행전 저자의 평가가 의미 있게 되도록 하는 일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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