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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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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51:9-16                                                                                        

2018. 6. 20(수)


한 때 온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정복자 나폴레옹은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체구는 작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권위와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에 관한 많은 일화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점령하기 위해 진군했을 때의 일입니다. 나폴레옹은 정탐꾼을 먼저 보내 알프스 산맥을 넘을 수 있는지를 점검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녀온 정탐꾼은 나폴레옹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 실은 그 다음에 "가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 도무지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나폴레옹과 같은 독재자에게 보고할 때 처음부터 갈 수 없다고 말하면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을 하려고 하더라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다가는 큰일 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그러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만 말해라" 하고는 알프스 산을 넘었다는 일화입니다.


또 한 번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의 5만 군대가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만 같이 낡은 다리였습니다. 참모들은 도무지 5만이나 되는 군대가 이 다리로 건너갈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칼을 휘두르며 다리 한복판에 서서 지나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5만 군대가 다리를 다 건너갈 때가지 나폴레옹은 움직이지 않고 다리 한 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생명을 걸고 그의 군대를 지휘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탁월한 지도력은 이처럼 생명을 건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나폴레옹을 본받아서는 안되겠지만 그의 용기만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아무리 살기 힘들다고 하여도 오히려 더욱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싸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유랑민족이 되어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망국의 서러움을 안고 유랑민의 삶을 사는 그들은 이제 본국 귀환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채 두려움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처참한 고통의 질곡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절망적인 것은 그들의 최후의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마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형태를 달리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500년 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있을 때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영적으로 대각성해야 합니다. (9-11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는 마르둑 신전의 위용과 바벨론의 부강함에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이제까지 자기들이 믿어왔던 여호와 하나님은 여기에 비하면 너무나 연약한 신처럼 여겨졌습니다. 특별히 고대인들은 전쟁을 민족간의 전쟁 이전에 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마르둑 신보다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성전은 바벨론에게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에 자신들이 자자손손 섬겨온 여호와 하나님은 바벨론의 마르둑 신에게는 참패를 당하는 신이라고 자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성전의 파괴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 온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두가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9절)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치 자는 사람을 깨우기라도 하듯 하나님에게 "깨소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아니하시는 완전하신 분이신데 이사야는 마치 하나님이 주무시기라도 하듯이 "깨소서 깨소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정말 하나님이 주무시고 계시는 줄로 알고 이렇게 기도했습니까? 분명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사야가 이렇게 외쳤던 까닭은 자기들이 이제까지 살아서 역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는데 이제 깨어 하나님께 부르짖겠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또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큰 구원을 베푸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며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9절)하고 기도합니다.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바로의 절대 권력에서 건지시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던 하나님,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며 헤매고 있을 때,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것으로 너무나 교만해져 순수한 신앙과 양심을 다 잃어버리고 허위와 거짓으로 우리의 영혼이 더럽혀졌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어렵고 힘이 든 일을 꺼려하고 위험한 일은 손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근면하다던 우리의 민족성은 다 사라져버리고 이제 손과 발에 땀을 흘리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룬 경제 성장은 이처럼 열심히 일하며 땀을 흘린 결과인데 언제부터인가 고급으로만 살려는 몹쓸 망국병에 들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일하러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무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많은 근로자들이 중동으로 또한 많은 간호사들이 독일로 나아가서 일을 했던 기억을 까마득히 잊은 채 외국인 근로자들을 홀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민족은 대오각성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대각성 운동을 펼쳐 나가야 합니다. 전교회적으로 이 민족의 문제를 가슴에 품고 깊이 통회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영적인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출애굽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를 둘러싼 슬픔과 탄식은 달아나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12-13절)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도무지 빠져 나올 가능성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 권력은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강력한 중동의 패자로 있는 바벨론으로부터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간을 두려워하느냐"(12절)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이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며 그의 강하신 오른 팔로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걷기가 참 두려운 일입니다. 만일 그 골목길에 큼지막한 개라도 한 마리 있으면 그 골목길을 지난다는 것이 보통 담력을 가지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조마조마하게 마음을 졸이며 골목길을 지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에 퇴근하고 오시는 아버지를 만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붙잡는 순간 어린 아이의 맘속에 있었던 두려움은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립니다. 어둠도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렇게 무섭던 큼지막한 개도 하룻강아지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세고 위대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의 강하신 오른팔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에 결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고 약속해 주셨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워 할 것이 없었습니다. 바벨론도, 마르둑 신도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이 마르둑 신에게 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어려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우리 안에서 시작할 때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었지만 다윗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던 용기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고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고 외치며 물맷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우리들도 어떠한 어려움이 우리를 에워싼다고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참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성도들 가운데 가족을 잃고 절규하는 성도들을 찾아가서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이처럼 어려운 일을 당한 성도들에게 '내가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을까?'하며 힘든 한계를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로의 말 이상 그 어떤 것도 그 성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 이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의 운행과 질서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구원할 능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몹쓸 간질병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아이의 아비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이윽고 그 아이의 아비는 예수님께 “하실 수 있거든 이 아이를 고쳐주옵소서.”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이 있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그 아이 아비가 “주여 믿나이다. 고쳐 주옵소서.”라고 믿음의 고백을 주께 드렸을 때에 그 아이의 병은 그 시간으로 고쳐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12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니 하나님의 뜻을 그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는 결코 그 무엇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 앞에 두 개의 손잡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손잡이는 두려움의 손잡이요, 나머지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선택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의 골방에서 절망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의 손잡이를 열고 승리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의심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에 올랐으며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으며 모세는 믿음으로 홍해를 갈랐고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성경의 많은 위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서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닥친 위기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제 우리는 한 맘으로 하나님께 영적으로 대각성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어려운 난국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 세계 선교의 제사장 국가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럭저럭 믿는 신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의 강물 속에 깊이 잠기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우리 민족과 우리 가정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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