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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좋아함과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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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준 목사(동안교회) 

좋아함과 사랑함은 비슷해 보이지만 질적인 차이가 있다. 둘 다 좋은 말이지만 삶 속에 나타날 때에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치며 결과를 낳게 된다. 좋아함은 갈등을 일으키고 다툼을 만들어내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야 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결론이 난다. 물론 일정 기간 사람들과 자신을 속일 수는 있으나 끝까지 감출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좋아함은 그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기뻐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자신에게 만족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희생과 헌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밑바닥에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으로 항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결국 자기가 중심에 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즉 사명이 없다. 인내의 한계가 온다. 언제든 돌아설 수 있다.

반면에 사랑함의 기준은 상대방에게 있다. 상대방이 만족해야 한다. 상대방이 행복해야 하고, 성장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상대방의 생명이 살아야 한다. 사랑함에 있어서 자신은 희생되어도 좋다. 자신은 상대방이 세워질 수 있다면 무너지고 없어져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채워가는 과정이 사랑함이다.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변함이 없고 따스하다.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다. 무덤과 절망에서 생명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좋아함이 계약과 조건의 개념을 갖고 있다면, 사랑함은 언약의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다.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좋아함의 힘이 아닌 바로 사랑함의 힘이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사도 요한이 결정적으로 변화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죄인된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주신 그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없는 힘 그 자체였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

지금은 좋아함과 사랑함이 혼동되어 나타나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고 있다. 죽음과 비극의 소식이 들려지고 있다. 좋아함의 마지막은 죽음이다. 죽거나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사랑함의 마지막은 생명이다. 이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람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공동체를 찾고 있다. 선거철과 새로운 일꾼이 세워지는 계절에 세움받기를 원하는 분들의 삶 속에 내가 좋아서 희생하고 헌신하는지, 아니면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이 일을 감당하고자 하는지 정직하게 살펴보는 것이 사람들의 심판보다 더 우선순위가 아닐까 고민해본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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