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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아오지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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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지마 전투


인류사에 다시 있어서는 안될 지옥같은 전쟁은 ‘이오지마 전투’(유황도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2차 세계 대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대 4,5사단의 이오지마상륙작전으로 시작됩니다. 이오지마는 백령도 절반 정도(폭 4km, 길이 8km)의 작은 화산섬입니다. ‘유황도’(硫黃島)라는 이름 그대로 유황 때문에 계란 썩는 냄새가 진동하며 물과 나무가 거의 없는 불모지로, 이른바 생존을 거부한 버림받은 땅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일본 본토와 사이판 중간 지점에 위치해서, 이 섬을 장악하게 되면 서부 태평양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어 일본 본토와 전초기지를 폭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당시 이곳 지휘관은 구리바야시 중장이었는데 그 수하에 2만 1천명의 일본군이 있었습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지하 동굴진지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10m만 파도 열기가 올라와 5분 이상 작업을 계속할 수 없는 곳인데 이러한 곳에 한국인 강제 징용 노무자 수백명을 동원해 지상과 동굴에 800개의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미 해병대는 상륙 전 3일간 함정에서 총 3만 8천 550발의 맹렬한 포격을 가해 섬 전체를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함재기 200대가 융단 폭격을 가해 풀 한 포기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어 상륙 작전이 감행되어 2월 23일 마침내 이오지마 섬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수리바치’산이 점령되고 미 해병대의 성조기가 세워졌습니다. 

이 전쟁으로 미 해병대 6,821명이 전사하고 20,865명이 부상당했습니다. 1m당 4명의 희생자를 냈고 한 개의 동굴 앞으로 전진하는데 94명이 전사했습니다. 유황도에서 미 해병대 168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약 1천명 정도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 끝에 산 정상에 6명의 해병대원이 성조기를 꽂을 때, 당시 종군 기자였던 죠 로젠탈이 그 장면을 촬영해서 미국 전역 200여개 신문을 통해 일제히 보도되었습니다. 

이 이오지마 전투를 계기로 태평양 전쟁의 성패가 갈렸으며 일본 제국주의는 완전히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가 나부끼는 사진 한 장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사진은 전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승리의 상징’이 된 이 한 장의 사진이 2차 세계 대전으로 지치고 냉소적이었던 미국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고, 그로인해 존 로젠탈 기자는 퓰리처 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 잔혹한 이오지마 전투가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배경입니다. 이 영화에서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은 6명의 해병대원 중 3명은 전사하고 살아남은 3명은 ‘영웅’이 되어서 본토로 돌아오는 것으로 그 사실을 전하고 있지만, 이들 생존자들은 끝없이 이오지마의 참혹한 기억과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죽을 때까지 그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성조기에 대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존해서 돌아온 병사들은 영웅대접을 받지만 진정한 영웅들은 거기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라며 몹시 괴로워합니다. 더욱 더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신문에 보도된 ‘수리바치 산’ 정상의 성조기 사진은 본래 처음 세워졌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오지마 섬을 완전히 점령한 후 어느 몰지각한 장관 하나가 찾아와 그 성조기를 자기 집에 달겠다며 요구합니다. 이에 지휘관은 그 정치가가의 요구에 역겨워하며 처음 세워졌던 성조기를 해병대 몫으로 따로 보관하고 다른 성조기를 세우도록 지시합니다. 

사진 기자가 촬영한 성조기와 그 성조기를 꽂은 6명의 사진은 이오지마 섬 점령 직후 감격적으로 세워진 처음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른 성조기를 세울 때 촬영되었던 해병대원들이 자신들의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어 영웅으로 대접받게 되자 몹시 괴로워하게 된 것입니다. 

이오지마의 전투는 피아(彼我)간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성조기 깃발을 세웠지만 참혹한 기억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불행한 삶을 보여줄 뿐입니다. 승리의 깃발을 세웠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참혹하고 불행한 것이어서 ‘깃발’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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