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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소설 <우리의 사랑은....> 제16회 ~ 제20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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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우리의 사랑은....>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29회까지 연재하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되었었는데....
지난 번의 게시판 실종사건으로 다 사라졌더군요.
그래서 30회를 연재하려고 하니까 처음 보시는 분들에게는
뜬금없이 여겨질 것 같아서 이렇게 5회씩 묶어서 다시 싣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간단한 평들도 적어주세요.




제16회 - 선후는 뭔가에 홀린....


남자가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 마침 삐리리릿 하는 소리와 함께 전동차가
곧 들어온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남자는 수진을 보며 다시 입
을 열었다.
<지하철이 왔네요. 타러 가시지요....>
<예?....예....>
키 큰 남자는 몸을 옆으로 틀고 왼손을 펴며 수진에게 먼저 가라는 몸짓
을 했다. 수진이 고개를 약간 끄덕하고는 발걸음을 옮기자 그 남자도 수
진의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왜 내가 이 여자와 이렇게 함께 걷고
있는 거지? 선후는 지금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냥 모른척 지나갔으
면 그만이었다. 설령 이렇게 마주쳐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손 치더라도
잘 가라고 하고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선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선후의 머리 속에는 내가 지금 왜 이리 허둥거리고 있지? 하는 생각이
가득했고 또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가득했지만, 선후의 행동과
말은 여전히 허둥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전동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오자 선후는 잠
시 멈춰서 상대가 먼저 탈수 있도록 했는데 그녀 역시 그 자리에서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먼저 들어가라고 말을 하면, 아니 손짓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것도 하기 싫으면 그냥 조금 더 기다리면 그만이었
다. 그런데 선후는 그러지 않았다. 또 다시 몸이 생각도 하기 전에 움직
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역시 그 여자도 움직였다. 둘은 입구에서 어깨가 살짝 부딪
쳤다가 다시 멈칫했고, 또 다시 둘 다 상대방이 먼저 들어가도록 서 있
었다. 선후는 더더욱 당황했다. 그리고 이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 한심함은 앞에선 여자가 살짝 웃으며 하는 말 때문에 더더
욱 커졌다.
<저....먼저 들어가시지요.>
<아, 예....미안합니다.>
선후는 자신의 손이 어느틈에 뒤통수에 올라가서 자신의 머리를 긁고 있
는 것을 알아챘다. 그 사실도 선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수진은 전동차에 타서 자동문이 스
르르 닫히는 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때 또 다시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그 남자는 또
다시 어쩔 줄 모르며 눈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
수진은 그 남자가 눈길을 돌리고 있는 틈을 타서 그 남자를 찬찬히 뜯어
볼 수가 있었다. 키가 정말 커보였다. 180센티미터는 충분히 되겠는걸..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어깨도 넓었다. 운동하는 사람일까? 하지만 왠지
운동하는 사람의 느낌은 아니었다.
짙은 눈썹, 네모난 턱, 일단 그 모습만 보면 시내에서 잠깐 봤을 때와
같은 분위기였다. 남자답게 생겼다고 수진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의 눈은 시내에서 봤을 때와 전혀 딴판이었다. 깊은 바다같이 잔잔하던
그 눈빛이 지금은 마치 돌멩이가 던져진 연못처럼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런데 그만큼 친근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시내에서 봤을 때는 정
말이지 거대한 벽이 이 사람의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것 같이 느껴졌었
는데....
수진의 눈길을 느꼈는지 남자는 다시 그녀를 보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수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시간이 많이 늦었지요?....>
<예, 그렇군요.>
수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수진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남자는 어깨에 맨 가방을 한번 추스르더니
다시 수진 쪽을 보며 말했다.
<아까 시내에서는 빨리 돌아갔던 것 같더니요?....그 피자집 앞에서 말
이에요.>
<예, 그러고 나서 전도사님 댁에 가서 저녁을 먹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
다보니....>
<아, 예....>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수진이먼저 말을 걸었다.
<저....아까 친구분 이름이 수철씨라고 했었지요?>
<예, 맞아요, 수철이....같은 과 친구지요.>
<그렇구나....그럼 그 옆에 있던 분도 역시 같은 과....>
<예, 맞아요. 그 녀석은 정민이라고 하지요. 아, 이제 기억이 나는군요.
그쪽 이름은 수진씨라고 했던가요?>
<예, 맞아요. 이수진이라고 해요. 저....그쪽 이름은....>
<예, 선후입니다. 권선후....>
<아, 예....>
선후....권선후....정말 그의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
았다. 수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또 다시 피식 웃었다. 그러자 선후의
의아해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수진이 얼른 말했다.
<아니에요....그냥....이름이 생김새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참, 아까 그분들이 과친구들이라고 하시던데 무슨 과에 다니시나
요?>
<예....사학과에 다닙니다.>
<어머나, 그럼 역사를 전공하신다는 말이네요?>
수진은 눈이 똥그래지며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후 쪽에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17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7회 -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왜요? 그렇게 역사와 제가 안 어울리나요? 맞죠? 그렇게 놀라시는 걸
보니 너무 의외의 과에 다닌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예, 맞아요. 저는 체격이 좋으시길래 운동
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아니, 운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활
동적인 것을 좋아할 것 같았었어요....그런데 사학과라니....>
<후후후, 사학과도 알고보면 활동적인 과랍니다. 유물발굴하러 한번씩
가면 거의 노가다가 되지요. 그리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제가 좀
좋아하거든요.>
<예....그렇게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럴 것도 같네요. 그럼 정말 여행을
많이 다니시겠네요?>
<예, 그래요. 주로 유적들을 보러 다니는 여행이지요. 그쪽....아니, 수
진씨도 여행 좋아하시나요?>
<예, 하지만 그렇게 많이 다니지는 못했어요. 제가 영문학과에 다니다
보니 방학때 어학연수 하러 호주에 다녀온 것 외에는, 참 교회에서 떠나
는 단기선교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이고....그다지 여행다운 여행은 해보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여행은 같
이 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야 갈 수 있잖아요.....>
<아, 아무래도 수진씨는 여자분이라서 그렇겠군요. 저같은 경우에는 혼
자하는 여행을 오히려 더 좋아하거든요. 물론 마음맞는 친구들과 가는
여행도 즐겁지만, 혼자하는 여행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요.>
<그런가요? 혼자가면 심심하지 않나요?>
<물론 고독하지요. 하지만 그 고독이 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저
는 생각해요. 어쩌면 그 고독이란 친구는 또 다른 나 자신일지도 모르지
요. 또 다른 나와 기차를 타고, 또는 버스를 타고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면서 그와 동시에 내 자신의 내면 깊숙이도 여행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맞아요. 혼자하는 여행이란 바로 그런 것이에요....>
<참 멋있는 말이네요....>
수진은 선후의 눈빛이 비로소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구나. 수진은 선후의 차분해지는 눈빛
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여행하면서 느끼는 고독, 그 고독은
또 다른 나일지 모른다....그 말에 수진은 공감이 갔다. 그리고 배낭을
맨 선후가 혼자서 여행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선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앞서서 이 땅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취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
는 것은 아무래도 여럿이 하는 왁자지껄한 여행보다는 혼자하는 여행이겠
지요.>
<그도 그렇겠군요. 아무래도 선후....씨는 경치를 보러가는 여행가가 아
니라 유적에 관심이 큰 사학생이니까....그러고보니 여행이라는 단어에
서 연상되는 것이 우리는 서로가 좀 틀린 것 같네요. 저....그러니까, 선
후씨와 제가 말이에요. 저는 아무래도 여행이란 경치가 좋은 자연으로 친
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떠나는....그런 것인데, 선후씨에게 있어
서 여행이란....그러니까....>
수진이 적절한 단어가 선뜻 떠오르지 않아서 잠깐 말을 끊는 사이에 선후
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어찌보면 제가 유별난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진씨처럼
생각 하니까요. 아니, 사실 저도 친구들과 떠나는 그런 여행을 좋아한답
니다. 제 말은 그런 여행도 좋아하지만 혼자 유적지를 돌아보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지요.>
<유적지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사실 지금까지 별로 그런 곳
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왠지 그런 곳은 궁상맞고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무너진 돌무더기들, 잡초들이 자란 옛날 집터, 낡
은 옛 기와집과 초가집들....기껏 경복궁이나 남대문같이 보기에 웅장하
고 아름다운 곳 외에는 사실....>
이런 수진의 말에 선후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맞아요. 그것이 문제에요. 문화재 관리가 그렇게 보기에 그럴 듯 한 곳
에는 많은 예산을 쓰지만 역사적인 가치가 아무리 많아도 보기에 수진씨
말대로 좀 궁상맞은 곳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아서, 지금 이시간에도 많
은 유적들이 엄청나게 훼손되고 있답니다. 그런데 수진씨, 유적이나 유물
은 지금의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답니다. 그것을 사용하고 썼
던 옛 사람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그 곳에서 터를 닦
고 건물을 세워서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의 모습과 그 당시의 주위 환경
들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그 가치가 살아난답니다.>
<예....>
수진은 선후의 말이 이해가 될 듯도 안 될 듯도 하였다.
선후의 말이 계속 되었다.
<예를 들어 작년 겨울에 군대를 제대하고 혼자 유적지를 돌아볼 때 제일
먼저 갔던....>

어느틈엔가 선후는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작년 겨울에 돌아보았
던 그 모든 유적지들이 마치 필름을 돌리듯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 때의 의문과 감동과 생각과, 자신과의 문답과 대화가 하나
씩 하나씩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생생하게 되살아난 그 모든 것
들은 마치 무너진 둑같이 선후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왔다.
선후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이래서는 안 된다
는 경고가 깜박거렸지만, 이미 이야기에 빠져있는 선후를 꺼낼 수는 없
었다. 그것은 꼬박꼬박 선후의 말에 반응을 보이면서 재미있게 들어주는
수진 때문이기도 했다.
한참을 혼자 이야기하던 선후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수진이 자신에
게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수진씨, 뭐라고 하셨나요?>
<아니요. 저....>
수진은 잠시 난처한 얼굴을 잠깐 숙였다가 들더니 선후에게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이번 역에서 저는 내려야 하거든요....그래서....>
<아, 그렇군요....벌써 다 왔군요.>
자동문 위에 붙은 지하철 노선도에 눈길을 보내며 선후가 말했다.
<예....>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 수진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제18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8회 - 선후의 가슴이 덜컥....


갑자기 선후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하염없이 전동차 위의 노선도
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여기가 마지막 역이었다. 앞으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는 어떤 여자와 그냥 헤어지기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 잠시의 해
프닝일 뿐이다. 이 역만 지나면 다시 아무 일도 없는 듯 이 조금 전까지
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선후는 가슴 한 구석에서부
터 통증이 느껴져 왔다.

그랬다. 수진은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마땅히 인사할 말조차
없었다. 그냥 안녕히 가세요, 라고만 하면 될까?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인데....
<....>
<....>
어색한 침묵이 수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수진
으로서는 정말이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수진도 자동문 위의 노
선도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노선도의 이리 저리 얽
힌 여러 색깔의 선들과 그 선들 위에 수없이 있는 동그라미 위의 글자들
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또 다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
다. 선후는 정말이지 이 침묵이 견딜 수 없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었
다. 그 사이에도 전동차는 지하의 철길을 따라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
다. 머리 속은 아득해져 갔지만 가슴은 너무나 빨리 달려가는 전동차만
큼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아직도 선후의 눈은 노선도에서 떨어질 줄을 몰
랐다. 그 때 드디어 차창밖이 조금씩 환해지더니 이내 선후의 눈길이 닿
고 있는 자동문의 네모난 창에도 환한 빛이 들어닥쳤다. 역에 도착한 것
이었다.
수진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저....이제 내려야겠네요....>
<....>
선후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안녕히 가세요....>
<....>
그리고 선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깐만요....실례 좀 할께요....
<....예....>
힘겹게 떨어진 선후의 입에서 겨우 흘러나온 말이었다. 선후는 수진이
지나가도록 몸을 옆으로 틀었다. 수진의 팔이 선후의 팔을 살짝 스쳤다.
선후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자동문 앞에 서 있는 수진....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선후....
이윽고 자동문이 열렸다. 수진이 뒤를 돌아보며 선후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저....그럼 안녕히 가세요....>
<예....조심해서 가세요....>
선후도 역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잊어버린 말처럼 얼른 덧붙였다.
<저....밤길인데....>
<예?>
수진이 잘 알아듣지 못한 듯 되물었다.
선후는 당황하며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요....그냥 조심해서 가라구요....>
<예....>
수진이 대답하며 승강장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순간 선후의 몸이 움찔하
며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앞으로 내딛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냥 그뿐이
었다. 승강장에 내려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간 뒤 다시 뒤를 돌아보는 수
진의 모습이 닫히는 자동문 사이로 보였다. 살짝 손을 흔드는 수진의 모
습....선후는 어느새 자기의 손도 올라가 있는 것을 잠시 후 수진의 모습
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허전한 마음이 수진의 발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승강장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끝도 없이 보였다. 하지만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개
찰구가 보였다. 수진은 핸드백에서 표를 꺼내들고 개찰구로 향했다. 그
때 수진의 옆으로 한쌍의 커플이 지나가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
자 문득 수진은 낮에 시내에서 보았던 그 여자가 생각이 났다. 선후의
팔짱을 끼며 걷던 여자....아주.... 예뻤던 여자....그래, 그 여자와....
선후씨는 너무나.... 잘 어울렸었지....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수진의
가슴이 저려오면서 숨이 막혔다. 수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서 깊은
숨을 두어 번 들이마시면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런 생각이 들자 수진은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
졌다. 그냥 우연히 만난 사람과 3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잠깐 얘기 좀
한 것 가지고 혼자 이러고 있다니....수진은 혼자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올라
가는 계단이 다시 눈 앞에 다가섰다. 수진은 씩씩하게 걸으며 입으로 노
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낮에 불렀던 찬송 <주께 영광>이었다.
하지만 혼자 어깨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노래를 부르는 수진의 등이 한없
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 정거장을 더 가서 선후는 전동차에서 내려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
다. 늘 아침, 저녁으로 보았던 그 역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나 낯설어
보였다. 선후는 잠시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스르르 움
직이는 전동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동차는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전동차 뒤꽁무니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선후는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침내 전동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컴컴한 지하 통로만
이 역의 양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선후는 왼쪽 어깨에 맨 가방을 다시
오른쪽 어깨로 옮기며 걸음을 옮겼다.

<제19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19회 - 선후의 마음 속에 후회가....


계단도 낯설었다. 그리고 계단 좌우로 붙어있는 광고판들도 낯설었다. 그
리고....선후는 지금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까지 선후가
알고 있던 그 선후가 아닌 것 같았다.
선후의 마음 속에 불현 듯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마지막에 인사라도 제대
로 할 걸....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밤길인데....하지만 그렇다고 바래
다 준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니었던가....지하철 역으로 한 정거장
이면 꽤 가까운 거리인데....어디서 살고 있을까?....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선후는 어느새 개찰구를 지나 지상으로 나온 자신을 발견했다.
선후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위에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건물들,
도로, 자동차들....그런데 그 풍경도 역시 너무나 낯설었다. 선후는 문
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빛이 꽤 밝았다. 선후는 그 달을 보며 생각했
다. 저게 상현달일까, 하현달일까? 선후는 하늘의 달을 보자 마음이 가
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 달만큼은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
은 선후가 하늘의 달을 이렇게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너무나 오랜만에 선후는 하늘의 달과,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들이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
고 있었다.

수진은 열쇠로 조그만 쪽문을 열고 손바닥만한 시멘트 바닥의 마당에 들
어섰다. 이곳은 수진과 남동생 수현이 크자 부모님이 두 남매의 방을 마
련해주기 위해 따로 세를 얻은 곳이었다. 지금 수진이 열고 들어간 쪽문
의 반대편에는 조금 더 큰 대문과 조금 더 넓은 마당이 있었다. 부지의
거의 대부분을 2층 건물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마당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는 공간이었다. 지금 수진이 들어선 곳은 건물의 뒤쪽에 세
를 놓기 위해 따로 입구를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수현이 방문을 열고 나와서 수진을 맞았다.
<좀 늦었네?>
<응....>
수진은 힘없이 대답했다.
수현이 그런 수진을 보며 다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누나? 힘이 없어 보이는데?>
<아냐, 일은 무슨 일....뭐 하고 있었어?>
수진은 핸드백을 어깨에서 내려 손에 들면서 되 물었다.
<응....레포트 쓰고 있었어. 아무래도 오늘 좀 늦게 자야 될 것 같아.>
<응, 그래?>
수진은 신발을 벗고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너도 오늘 갔었으면 좋았을 걸. 참, 은총이가 네 안부 묻더라.>
<응,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은총이 한테 전화 왔었어. 우리 동기모임 때문
에....피곤해 보이네. 빨리 씻고 자.>
<그래, 너도 일찍 자 둬. 그래야 내일 예배 드릴 때 안 졸지. 레포트 많
이 남았어?>
<그렇게 분량이 많은 건 아닌데....교수님이 좀 까다로와서....나 들어간
다.>
<그래. 수고 해라.>
<응.>
수현의 방문이 닫혔다.
수진은 화장실로 가서 씻고 와서 책상 앞에 앉아 얼굴에 크림을 바르며
책상 위의 사진을 보았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 수현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조금 왜소해 보이는 아빠, 눈 주위에 이제 주름살이 꽤
늘은 엄마, 그리고 언제나 밝은 동생 수현....
수진의 부모님은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었다. 수진이 태어나기 전부터니
까 30년이 넘게 해 오신 것이다. 이제는 꽤 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서 그
렇게 먹고 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수진은 자신과 동생 수현 둘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지금 수진의 엄마와 아빠는 식당에 붙어있는 작은 방에서 주무시고
계실 것이다.
아빠....한때 수진은 아빠가 참 싫었던 적이 있었다. 늘 미안해 하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너무나 보기 싫었었다. 조금의 욕심도 없이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늘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사
람, 수진의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춘기의 수진에게
는 너무나 바보같이 사는 것으로 보였었다.
수진의 아빠는 수진이 다니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리고 수진의 동기들과
선, 후배들의 아버지 가운데도 장로님이 많았다. 그런데 그 분들과 자신
의 아빠는 왜 그렇게도 달라보였던지....잘 손질된 머리와 늘 말쑥한 정
장 차림의 다른 장로님들은 항상 자신감이 넘쳐보였었다. 하지만 아빠는
늘 똑같은 옷차림에 왜 그리 모든 것이 꾀죄죄해 보이던지....앞에 나서
는 법도 없었다. 늘 뒤에서 교회 바닥의 휴지나 줍고 맡고 있는 소년부
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었다.
명함도 달랐다. 사업가, 교수, 의사, 판사, 변호사, 방송사 간부, 시의
회 의원, 구의회 의원 등등이 즐비한 그 사이에 수진의 아빠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왠지 자격지심이 느껴졌던 수진은 다른
장로님 자녀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그들
이 자기를 따돌린다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참 한심한 생각들이었는지....
수진은 가만히 사진에 손을 대 보았다. 고마우신 분들, 싱싱한 재료들을
떼오기 위해 새벽부터 도매시장에 가시는 것으로 늘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들, 하루 종일 식당에서 서서 일하시면서도 찌푸린 얼굴 한번 짓지 않
으시는 분들, 수진과 수현 남매를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게 키우고 공부시
키기 위해 스스로의 행복을 포기하셨던 분들....
수진은 언젠가의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라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것은
장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느날 밤에 식당에 놀러온 엄마 친구와의 이
야기를 우연히 옆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날 그 엄마 친구는 소속된
여전도회가 당번이 된 교회에서의 점심 무료 급식 봉사를 마치고 그 여
전도회 회장 집에 모여서 저녁까지 얘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 수진의 식당에 온 참이었다.
그때 수진의 엄마는 너무나 부러운 눈빛으로 그 아줌마를 보며 이렇게 말
했었다.
<나도 정말 그렇게 살고 싶어. 원없이 교회 봉사하면서 교회 봉사 마치
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수다도 떨고....>
<이제 애들도 다 컸으니까 황권사도 그렇게 살아야지.>
<그래....그 녀석들이 그렇게 잘 커준 것만으로도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
어. 부모 속 한번 안 썩이고 대학에 척척 붙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하지만 아직 수현이 졸업해서 직장에 다닐 때까지는 좀더
일해야겠지?>

<제20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제20회 -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수진은 그때 그 아줌마를 부러워하는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엄마....수진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매달려 있는 눈물방울을 손등으
로 털어내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그만 부엌으로 가서 동생 수현에게 줄
간식거리를 장만했다. 수진은 동생 수현이 왜 전자공학과에 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기 위
해서였다. 사실 글쓰기를 좋아했던 수현은 국문학과를 가고 싶어 했었다.
그것은 수진도 마찬가지였다. 수진도 동생 수현이와 같은 이유로 영문학
과에 갔던 것이었다. 수진이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은 작곡과였었다. 하지
만 그런 예능방면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돈이 들었다. 악
기 레슨비만 해도 엄청났던 것이었다.
수진은 수현의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
진은 손에 든 쟁반의 균형을 잡으면서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
어갔다. 수현은 한창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왜, 누나?>
수진이 쟁반을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응....이거 먹고 하라고.>
<이야, 고마워라....안 그래도 배가 출출해서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먹을
가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야, 라면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밤에 자기 전에 라면 먹는 게 얼마나
안 좋은데....>
<알았어, 알았어. 또 잔소리....아무튼 잘 먹을게.>
<그래....>
수진은 동생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한번 짓고는 다시 몸을 돌려 동생
의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피곤했다. 그 피곤함 속에서 수진은 뭔가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수진
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바로 지하철에서 만난 선후와 관계된 감정임을 직
감했다. 그래서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하면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고 했
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진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
다.



3



<오늘 성경 본문은 룻기 1장입니다....룻기 1장 1절에서 22절, 끝절까지
....다 찾았지요?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학부 예배 시간이었다. 찬양 시간이
마치고 이제 설교가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수진은 펼쳐진 성경을 바라보며 읽어내려갔다. 거기에는 세 여자가 등장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룻과 오르바라는 두 며느리였다. 그런
데 이 세 여인은 과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방지역인 모압 땅에 와서
남편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나오미는 그곳을 떠나려
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교독을 마치자 짧은 기도를 하신 전도사님은 기침을 두어 번 하시
더니 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씀을 시작하셨다.
<음....먼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가지 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여러분, 이 본문에는 나오미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나오미에 대해 느낀 점이 있다면 누가 한 번 말해 줬
으면 좋겠는데....>
전도사님은 대학부실을 둘러보며 잠시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누군가가 손을 든 모양이었다.
전도사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래, 민호가 한번 얘기해 볼까?>
수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동기인 민호가 일어나 있었다.
<예, 저....제가 생각하기에는 음....나오미가 좀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왜냐하면 두 며느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도 지금 나오미는 두 며느리보고 이방에 그냥 머물러 살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말을 끝낸 민호는 자리에 앉았고 대학부실에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잠깐
스쳐지나가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전도사님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
덕이시더니 다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또 다른 사람?>
조용해진 대학부실....수진은 혼자 나오미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작은 몸집에 수수한 옷차림을 한 중년을 넘어선 온화한 여
인....이제 눈가에 주름살이 제법 보이기 시작한 그런 평범한 아줌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흔히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어머니들의 모
습이....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어요. 여기 보면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가 나오는데, 대개 여러분이 알기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어
떻지요?>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사이가 좋기는 어렵지, 수진은 혼자 마음 속
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자 전도사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주관식이라서 어렵나? 그럼 객관식으로 하겠어요. 1번, 대개 좋다. 2번
대개 안 좋다. 자 몇 번이지, 인철아?>
그때 마침 눈이 마주쳐 이름이 불려진 3학년의 인철은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글세요,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해서 잘 모르겠는데요.>
웃음소리들....인철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대개 안 좋은 것 같더라구요. 고부간의 갈등이란 말도 있잖아요.>

<제21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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