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 11:11-12)

첨부 1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전 11:11-12)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가장 우아하고 품위 있게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그 중에 여자가 가장 아름답게 창조되었다고 어떤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만든 재료가 보잘 것없는 흙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겠습니까?

① 인간이 스스로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흙을 하찮은 것으로(창 18:27), 또는 죽음(전 3:20)등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dust from the ground)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가장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흙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②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보잘 것 없는 흙으로 나를 조성하시고 생명을 주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이 땅의 금은보화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개발하는 이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까지 받았습니다. 

③ 인간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흙으로 된 인간의 코에 하나님이 친히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이상의 인간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령을 받음으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성품을 부여받은 영혼을 가진 인격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떠나면 동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떠난 인간은 동물적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간을 가리켜 죽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각각 나름대로의 삶의 터전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약초로 쓰이는 더부살이라는 식물은 다른 나무에 붙어 기생하도록 했습니다. 

인간의 삶의 터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흙으로 만든 사람이 흙 이상의 존재로 동물 이상의 생명체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아담)을 만드시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 2:18).
마침내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곳을 살로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하와)를 만드셨습니다(창 2:21-22).
그리고 하나님은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Ⅰ. 교부 교회시대에 여성의 위치입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12사도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교부들이 보는 남자에 대한 여성의 위치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역할과 기능면에서 말한 표현이라는데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① 어거스틴(Augustine)은 여성은 자녀를 낳기 위해 남성의 조력자로 창조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식을 번식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력자로 남성과 함께 한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결혼에 있어서 남성종속주의를 주장했습니다. 

②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여성의 남성종속을 의미했습니다. 
"인간의 존재 형태(form)는 하나님의 존재 형태(form)가 아닙니다. 바울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그러므로 머리에 써야만 한다(고전 11:7-10).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면서 여자는 아니라고 하는가?" 왜냐하면 바울은 형상이란 말은 존재 형태(form)에 관계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형상은 권위에 관계된 것인데 이것은 남자만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여자는 권위를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자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3장 16절에 말한 것처럼,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③ 터툴리안(Tertullian)은 비록 여성의 교육적인 자질이나 능력이 탁월해서 그들이 교육은 받을 수 있지만 공적인 사제직으로서의 사역은 금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성의 사제직의 활동은 이단들과 이교도들의 사회에서나 가능하지만 정통기독교교회(orthodox christian church)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성경해석인 동시에 이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 했습니다. 
고대 사회는 여성비하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도록 방치한 것이 사실입니다. 
교부 제롬(Jerome)은 자신을 도와 베들레헴에서 수도원 생활을 한 폴라(Paula)의 업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어머니인 안두사(Anthusa)의 삶에 대한 보고에서 그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 모니카(Monica)에 대해 말할 때 고백록에서 칭찬과 위대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표적인 교부들은 친인척이나 특정한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특정인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일반적으로 여성에 대한 칭찬과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부들이 여성의 공적인 위치나 남성과의 비교적 관계에서는 여성폄하의 개념을 소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크리소스톰, 히폴리투스(Hypolytus), 제롬, 터툴리안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Ⅱ. 남자와 여자는 상호보완적 존재입니다. 

본문 11장 11절에 『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고전 11:9). 이 말은 여자에 대한 남성우위론을 시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혼자서 하나님이 부여하는 주권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창 1:28).
그 주권은 남자와 여자가 목숨을 건 사랑과 절대 순종의 관계에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성의 하나님 앞에서 평등의 지위를 변호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교회에는 남녀 간의 불평등이 문제거리로 대두되었습니다. 워낙 유대사람들 사이에는 여자들을 비천하게 여기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습이 복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조차도 서로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개체적인 존재이기 전에 서로의 배필로서 지음을 받은 상호보완적인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실 적에 남자를 위주로 혹은 여자를 위주로 차등성을 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 나라의 운용을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보완이 되어 보다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로 평등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등성과 불평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통하여, 그리고 또 여자를 통하여 동등하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들 각자에게 동등한 인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남녀가 평등한 관계에서의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Ⅲ. 남자와 여자는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난 존재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12절에 『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상호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다는 말은 사물의 기원과 근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헬라어 액크( , 밖으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는 말은 일반적인 출생의 과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헬라어 디아( , 통하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존재가 아님을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동등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지음 받았습니다. 따라서 남자는 우등하게, 여자는 열등하게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한 가지 구분이 있다면 그 일의 기능상,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의 역할이 부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100편 3절에 『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의 소유인 양일뿐입니다. 
둘째, 남자든 여자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아무런 차등이 없는 평등한 존재임을 본질적으로 보증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마저 없이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을 넘어 평등케 하시는 능력으로 인간 삶속에 역사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 앞에서는 남녀노유,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죄사함을 받고 거듭나야 할 동등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의 강조는 차라리 남녀의 상호의존에 있지 않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Ⅳ. 남녀관계를 통하여 주와 교회관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고 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엡 5:22).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종속관계, 더 나아가 주종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기준을 주께 하듯 하라고 한 것입니다(엡 5:22). 이것은 자율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됨에 비유하며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다(엡 5:23)고 한 것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말합니다. 
『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고 한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가 결혼예식에서 남편에게 서약할 때 "신랑 아무개 군은 아내된 아무개 양을 신부로 맞아 목숨을 걸고, 보호하고, 사랑하겠느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온 것입니다. 
남자가 이와 같이 죽음으로 여자를 보호했으니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처럼 남편은 자기 아내를 무조건 사랑해야합니다.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본질적인 평등을 선포하는 단체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인간 평등의 기초는 남녀평등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명예, 지위, 부, 체력이 평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남녀평등을 명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5-7절에 『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는 교부들의 여자 폄하주장을 극복했습니다. 칼빈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을 주장했습니다(Gender Equality in Calvin"s Theology).
바울은 여성들이 그들의 가족을 훈계할 권한이 없다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공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이 같은 칼빈 해석의 정당성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빅토리아 여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은 교회에서 여성의 침묵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성의 역할을 사장(死藏)시켜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칼빈은 교부들의 생각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루터와도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칼빈은 바울의 신학을 해석하고 설명함에 탁월했습니다. 이것이 신학논쟁으로 말미암은 신학의 발달입니다. 
결국 신학의 발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에 모든 공적 경쟁에서 여성이 뛰어나고 있습니다. 매년 여성법관이 전체 숫자에 절반이 훌쩍 넘게 배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며느리 시대를 지나 딸의 시대가 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아들만 있는 부모는 속옷 갈아입을 장소가 없다는 말이 웬말입니까?

5월 18일자 국민일보에 게재된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가혜(오탁번 1943∼ )
죔죔 아빠의 눈은 
고사리 손 은하수 물결 
눈부신 가혜 눈은 
웨딩드레스 별빛 

옛날에는 딸을 결혼시킬 때 신부집은 초상집 같았습니다. 옛날에는 아들이 있는 집을 뱃사돈, 딸이 있는 집을 굽사돈이라 했습니다. 아들 집에 가면 앉아서 밥상을 받고 딸집에 가면 서서 밥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과거 농경시대는 아내는 아무런 생산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아내의 육아나 가사 노동은 철저히 무시되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식 때 신부들이 우는 것은 그때의 DNA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혼하는 날 모두가 즐겁기를 바랍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누가 우등하고 누가 열등하다는 말입니까? 야고보서 1장 17절에 [모든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 』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