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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까? (엡 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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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까? (엡 4:13-16)  

간혹 뉴스를 보면 황당한 일들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잊을만 하면 한번씩 일어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크라이나의 한 동물원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이 현대판 다니엘이 되기 원해서 사자 우리에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들이 보는 앞에서 사자에게 접근하며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제가 사자 앞에 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를 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닫으시고 무사히 우리에서 나왔을까요?

안타깝게도 사자가 그에게 달려들면서 물려 죽을뻔 하다가 겨우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이 사람이 사자에게 물렸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처럼 신앙의 참 의미를 모르고 이상주의에 빠져 성경의 참된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 의 의미를 알고 믿음생활을 하는 것보다, 이상주의를 믿는 것이 더 쉽고 화려해 보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삶이란 조금전 말씀드린 사람처럼 사자 우리에 들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삶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어리석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는 보자!’ 라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 말씀과 반대로 살면서 마지막 죽기 전에 회개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신학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티켓 신앙’ 이라고 합니다. 
티켓 신앙은 구원과 천국 티켓을 얻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행하여야 할 ‘성도의 삶’ 은 무시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만 중시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얻은 구원은 정말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구원만 강조한 신앙의 문제는 구원 받는 것만을 강조하다보니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천국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구원 받았다 하면서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천국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구원 받으면 되었지 구원받은 백성으로 그 이상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으니 교회와 믿는자들이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만 강조하지 않고,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알기를 힘쓰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다시말해 ‘믿음’ 과 더불어 ‘삶과 행위’ 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는 조화가 필요합니다. 균형과 밸런스가 중요합니다. 
조화의 반대는 부조화이고 갈등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건강하다’ 는 말은 몸의 밸런스가 잘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몸이 병들었다’ 는 말은 밸런스가 이루어지지 않고 조화가 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몸의 어느 부분이 병들고 아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서 조화와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행함이 균형을 잘 이루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영적 균형이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의 영입니다. 균형의 영입니다. 
조화를 이루시는 영이시며 회복시키시는 영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을 잘 의지할 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균형 잡힌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가장 기본이 되는 예배에 대한 충실은 그 사람이 영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에 충실해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울왕은 예배를 가볍게 여기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주일날 바쁘고 아무리 먼 거리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영성이 그만큼 건강해서 그렇습니다. 

다시말해 삶의 우선순위에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두는 삶이며 영적 질서가 잘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균형 잡힌 영적생활입니다. 

이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면 내적 자신감이 충만해지고 믿음과 소망이 솟아납니다. 
그러면 영적 반응이 고조됩니다. ‘아멘’ 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은 반응입니다.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전적 동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남편에 대한 불만이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말로 표현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멘’ 은 그런 것입니다. 

아멘은 내적인 나의 신앙 고백이자 외적 표현입니다.
각 교회마다 예배의 분위기가 있는데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아멘’ 하는 것에 아주 인색한 편이지 않습니까? 

아멘을 속으로 하는 것도 은혜가 되지만 입으로 힘 있게 고백하는 것이 더 은혜가 되며 영적인 자신감을 가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를 데리고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게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얹고 간절히 안수기도를 하는데 며느리는 도무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하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자 시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에 옆에서 ‘아멘, 믿습니다, 주시옵소서,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대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얼마 후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누가 임신을 했겠습니까. 바로 시어머니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백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13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이란 단순히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천국 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것’ 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삶을 희생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이 말씀은 신앙이 구원과 천국을 얻는 일회적인 것만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말해줍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티켓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구원과 천국이라는 결과만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참된 신앙은 사랑 안에서 참된 일을 하며 주님의 형상이 되기까지 자라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대개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불평하고 원하는 것만 얻으려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하는 것’ 보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성숙해지는 것’ 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의 형상이 나오기까지 끊임없이 주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술을 끊지 못한 한 집사님이 저녁에 호프집에 전화한다는 것이 그만 자기 교회로 전화를 했습니다. 

마침 그 전화를 담임목사님이 받으셨는데 그분은 받자마자 목사님을 주인으로 착각하고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저 아무개인데요. 치킨하고 호프 1000cc 만 빨리 배달해 주세요.” 

목사님은 누구인지를 알고 이분이 무안해 할까봐 모른 척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분이 목사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호프집에는 웬일이세요?” 

그때부터 목사님과 교회 중보기도대원들이 이분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 하였는데 “하나님! 아무개 집사님이 빨리 술을 끊게 해주세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그 집사님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술 먹으면 구원받지 못합니까?” 라고 묻자 목사님은 “집사님! 술 먹어도 천국에는 갈 수 있지만 신앙이 자라지 않으니까 끊는 것이 좋겠습니다.” 

얼마 후 그 집사님은 술을 완전히 끊고 교회의 기둥집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천국이라는 결과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천국 가는 과정에서도 승리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술 마신다고 담배 피운다고 천국을 못 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것이 발목을 잡고 천국 가는 과정을 어렵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끊어야 할 것이 있다면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함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그러면 먼저는 자신도 자신을 좋아하게 되며 가까운 가족이 좋아합니다. 목사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좋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신앙도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구원이란 단순히 죄로부터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업그레이드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배와 기도생활, 헌금생활, 전도와 봉사생활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원하기는 그러한 자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숙함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첫째로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울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 고 말합니다. 

또한 15절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고 말합니다. 즉 삶의 목표를 주님께 두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살고, 주님처럼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믿고 천국 간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천국 삶을 산다는 더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는 잘 속습니다. 작은 유혹에도 잘 넘어 갑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목적한 곳을 끝까지 가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성숙한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기 위해 면접이 있었습니다. 면접관이 한 청년을 지목해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번이 몇 번째 시험입니까?” 그러자 이 청년은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10번째 시험입니다.”

일반적인 생각으론 그렇게 많이 면접을 보아도 떨어졌다면 분명 이 청년이 무슨 하자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떨어뜨릴 텐데 의외로 면접에 합격해서 마침내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의 말에 의하면 두 가지가 마음에 들었는데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그렇게 많이 실패해도 당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에도 우리는 기도와 감사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욱 성숙하게 될 것이며 때가 되면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합격’ 이라는 판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15-16절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가지려면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특별히 내 중심적인 태도에서 남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주로 일방적인 사랑을 받다가 철이 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성숙의 증거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것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 화를 냈습니다. 
사랑이 낭비라는 의미를 알면 마리아처럼 되겠지만 그 의미를 모르면 가룟 유다처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고후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사랑엔 낭비가 있고 손해가 따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논리와 손익계산을 초월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이고, 빼앗기는 것이고, 바치는 것입니다. 
손해보고도 행복한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뭔가를 잃어버리고 빼앗겨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신앙의 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위해 눈물과 물질과 젊음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 본 체험이 있는 사람이 진정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그렇습니다.
초신자일 때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나를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가 성숙해지면 그냥 예배 시간에 하나님 품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좋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서 좋고,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낭비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마리아처럼 계산이 없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낭비할수록 행복이 넘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나의 생명까지 쏟아 부어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바쁜 상황에서 힘써 주일성수하고, 심지어 새벽기도까지 하는 모습은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의 일을 하다보면 사랑이 상처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조용히 주님 앞에 나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도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너무 큰 시련을 당했지만 그래도 ‘내가 침체한 모습을 보이면 교우들도 같이 힘들어하겠지’ 라는 생각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예전과 같이 변함없이 밝은 얼굴과 목소리고 주위를 즐겁게 해줍니다.

왜 그 고통을 모르겠습니까? 얼마나 고통이 크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뜨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같이 우리가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고, 주님을 위해 전부를 낭비하고도 행복해 할 때 우리 교회는 반드시 놀랍게 부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사랑과 헌신엔 감동과 향기가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상식을 초월해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그 향기가 교회에 진동해서 서로가 힘을 얻게 되고,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도 흠향하시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가끔 주변에서 주일성수를 잘해서 축복 받았다는 분들의 간증을 듣습니다. 
그런 간증들을 보면 대부분 믿음으로 가게를 닫고 주일성수를 했더니 물질적으로 손해가 없었고 오히려 돈을 벌었다는 간증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주일성수로 인해 손해를 보았는지 이익을 보았는지에 대한 의식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목적이 예수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고도 행복한 사랑을 하고, 특별히 주님을 사랑해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대가를 치르는 신앙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숙한 모습을 대견하게 보시고, 손해를 본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보기 좋은 것보다 성숙한 것이 더 예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숙함의 가장 중요한 표시는 ‘내 것을 얼마나 주님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느냐’ 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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