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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의 길 (마 21:1-11)

첨부 1


사명의 길 (마 21:1-11)

주후 4세기에 텔레마쿠스라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사막의 개혁자입니다. 그는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텔레마쿠스에게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로마로 가야 한다. 그곳은 바로 너의 일터이며 그곳은 너를 부른다.” 
레마쿠스는 즉시 로마로 발걸음을 옮기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그런 잔인한 경기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도 로마의 원형경기장 안에는 8만이 넘는 관중들이 모여 검투사 놀이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경기장은 이미 피로 얼룩져 있었으며 피를 본 관중들은 흥분할 대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그는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인 줄 알고서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가 검투사들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으려고 할 때,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그 순간 경기장은 숙연해졌습니다. 
황제 호노리우스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 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습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사명에 아무 관심이 없이 살아가지만 또 누군가는 그 사명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오늘 본문 마21장 말씀에 보니 당신에게 주신 사명 곧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명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며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지를 생각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한번 따라해봅시다. 사명의 길
오늘 본문 마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을 때 멋지고 화려한 백마를 타고 입성한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나귀 새끼 한 마리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멋진 백마가 아니라 평범한 나귀 새끼 아니 어쩌면 초라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까요? 

예수님은 백마를 구하실수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백마를 못 구하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폼나는 백마가 아닌 멋진 군마가 아닌 한낱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4절과 5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나요? 
스가랴 9:9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위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승천하는 순간까지 당신에게 예언되어 있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나사렛에서 자라고 평생 말씀을 이루며 사시다가 결국 이렇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 그것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 이 모든 것은 결코 우연히 어쩌다가 어떻게 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연히 어쩌다가 어떻게 이 땅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연히 어쩌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까지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예언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마10:29절에 보니 참새 한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30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고 계시다 말씀하시고 31절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우연은 결코 없습니다. 나귀가 태어나고 그 나귀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고 참새 한 마리가 태어나 팔리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 계획과 목적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롬8:28절의 바울의 고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위에 보내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그 하나님이 반드시 앞으로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니까? 4영리의 첫 번째 원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그 계획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그 계획과 정반대의 계획처럼 보여질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우리를 향한 아름다운 계획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십자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순간 모든 사람은 절망했습니다. 이제는 끝이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 끝난지 알았지만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셨고 결국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끝이다 생각되는 순간을 만나거든 이제 거기서부터 당신의 계획을 다시 시작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끝내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야 할 사명의 길은 첫째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가는 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야 할 사명의 길은 무엇입니까?
순종의 길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반드시 순종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그 놀라운 계획을 반드시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며 그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그 계획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 스가랴에 예언되어 있는 그 말씀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가는 일이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너무나 지기 힘든 십자가를 지기 위한 예루살렘 입성이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에 지금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예루살렘을 올라가면 어떤 일을 만나게 될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고통 어떤 어려움 어떤 고난을 만나게 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셨습니다. 
왜요? 그 어려움을 통해 그 고난을 통해 그 십자가의 아픔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실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고난이 있어도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갈 때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아픔과 고난이 있어도 그 계획을 따라 묵묵히 나귀새끼를 타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기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올라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길은 죽는 길 같아도 사는 길이요, 망하는 길 같아도 흥하는 길이요, 안되는 길 같아도 잘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온전히 순종하는 사명의 길로 나아가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사명의 길은 무엇입니까?
따라해볼까요? 겸손의 길 
여러분,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5절을 다시 한번 봉독할까요?
그는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탔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왕과 다른 겸손의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왕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왕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사람입니다. 공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왕 앞에 절하지 왕이 신하들 앞에 절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세상의 왕은 자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죽일 수까지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부분 마20:2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세배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말하였을 때 26절과 27절을 통해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어느 왕도 섬기지 않고 세상 어떤 왕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가차없이 죽이지만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고 때때로 교만하고 불순종하며 늘 주님의 실망시키는 우리들을 위해 오히려 대신 죽으시기 위해 오신 왕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왕의 예루살렘 입성은 백마를 타고 삐가 번쩍 화려하게 등장하는 세상왕의 입성식과는 달랐습니다. 
그 왕의 입성식은 사람이 한번도 타 본적없는 연약하고 볼품없는 나귀새끼 한 마리를 타시고 겸손히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한 채 묵묵히 올라가는 하늘나라 왕의 입성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일까요? 너희도 이 세상 가운데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이 아닐까요? 섬김 받기만을 원하고 높임받기만을 원하는 세상에서 그렇게 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세상 가운데 확연히 보여주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기쁜 마음으로 나귀 새끼를 타셨듯이 나귀 새끼를 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귀 새끼라니 세상에 나를 뭘로 보고?라고 말하면서 낮은 자리, 섬기는 자리에 서려고 하지 않고 높은 자리, 섬김을 받는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접하기보다는 대접받고 싶어합니다. 주기보다는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먼저 받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먼저 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빼앗기고 없어지고 잃어버리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받고 누리고 높아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아까 읽었던 10장26-27절을 다시 볼까요?
섬기는 자는 큰 자가 되는 것이고 종이 되면 으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나귀새끼를 선택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남들이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일, 꺼려하는 것,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 이것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꺼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달갑지 않게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귀새끼를 탄 예수님이 가장 높으신 왕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선택한 낮은 자리 나귀 새끼가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님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통해 반드시 증명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 데 신앙이 훌륭한 사단장님이 사단에 새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에 부임하자마자 군목 목사님을 만나 제가 무슨 일을 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목사님은 예 사단장님 주보를 좀 나눠주시죠? 라고 말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결국 그 다음주일부터 이 사단장님은 일찍와서 주보를 나누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일 이른 아침 두두두두 헬기 소리가 들리더니 사단 교회에 별 두 개를 단 사단장이 주보 나눠준다더라 소문이 돌면서 사단 내 전 병사가 사단장한테 인사 한번 받아보겠다고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단장은 병사 하나 하나에게 정성스레 인사하면서 주보를 나누어주기 시작하였고 그 사단내 수 많은 병사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등병이 사단장에게 경례할 때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단장이 이등병에게 경례하면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일은 반드시 또 다시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그 이등병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사람들이 놀랄만큼 섬기십시오. 놀랄만큼 낮아지십시오. 놀랄만큼 대접하십시오. 그럴 때 저와 여러분의 삶에 놀랄만한 일들이 계속해셔 펼쳐지게 될줄로 믿습니다. 겸손의 길로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 오늘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 사명의 길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한 길 
예수님께서 이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었을 때 7절에 보니 제자들은 겉옷을 그 위에 깔았고 8-9절에 보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펴고 나뭇가지 즉 종려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소리를 높여 환영하고 찬송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야임을 알았지만 그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지금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면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고 해방시켜주실거라 믿고 호산나 노래하며 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지금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고 호산나 노래하면서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행해주실 그 일을 생각하며 기대하며 노래하며 찬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지 않고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체포되자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 뿔뿔히 흩어지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나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는게 낫겠다고 27장에서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요일로 언제였을까요? 네 일요일 즉 주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것은 금요일 잡히신 것은 목요일.. 결국 3-4일의 시간동안 자기들이 원하는 해방과 기적이 없게 되자 이들은 하루 아침에 예수님을 떠나고 돌아섰습니다. 왜? 채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가기도전에 이들의 찬양은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이들의 노래는 절망으로 이들의 노래는 배신으로 이들의 노래는 분노로 바뀌게 된 것일까요?

이들은 주님의 주님되심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주님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의 노래와 찬송의 목적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으면 속도가 빠를수록 훨씬 더 위험하고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분당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신갈쪽으로 속도를 내서 열심히 달리면 달릴수록 돌아오기가 점점 더 힘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목적입니다. 방향입니다. 왜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 가? 내가 지금 왜 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가?
내가 왜 지금 이 봉사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바르고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으면 자칫하면 그 찬송이 그 봉사가 오히려 주님과의 거리를 더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열심을 내면 낼수록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찬양, 나를 위한 봉사, 나를 위한 섬김은 오히려 하지 않은만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 한 마디의 찬양, 단 한번의 예배, 단 한 사람을 향한 봉사라도 주님이 받으실만한 찬양, 기도, 봉사, 예배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방향으로 주님의 주님되심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찬양, 기도, 봉사, 예배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대한 선교사 리빙스턴은 사명이 있는자는 죽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이 땅에 호흡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길이 무엇인지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 사명의 길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위대한 계획을 나를 통해 펼쳐간다는 것을 믿는 믿음의 길입니다. 
둘째, 그 구약의 예언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셨던 예수님처럼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셋째, 나귀새끼를 타고 올라가심으로 세상의 왕들과 다름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넷째, 호산나 찬양하고 겉옷을 펴고 나뭇가지를 펼쳤지만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노래하고 있었던 그들처럼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노래하는 사람하는 사람, 주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와 봉사를 드릴 수 있는 방향과 목적이 주님께로 맞추어진 주님을 위한 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걸어가신 이 사명의 길을 우리도 걸어감으로 주께서 부활의 영광을 누렸던 것처럼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놀라운 축복과 은혜의 주인공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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