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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출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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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출 3:7-8)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Thrice Through the Valley)라는 책을 쓴 볼레터 스틸 크럼리(Valetta Steel Crumley)라는 부인이 계십니다. 나이 68세로서 OMS 국제 선교회에서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첫째 자녀는 4살 때 백혈병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답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고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둘째와 셋째가 함께 차를 타고 가다 그만 교통사고로 18, 16살에 천국에 가고 말았습니다. 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분의 고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목사이면서 선교사였는데 33세에 임파선 암의 일종인 호치킨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한 사람의 가족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의 강에 빠져 죽지 않았습니다. 대만에 가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크럼리 여사가 57세 되던 해에 선교를 하던 대만에서 살인범을 만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일반적인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망하며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소명을 더욱 불태웠습니다. 자신만이 당한 그 끔찍한 경험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분은 말합니다.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추어 가면서 솔직하게 이런 내용을 털어 놓는가?' 한 가지 평범한 진리, 즉 이러한 기가 막힌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진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생의 비극에서 면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품에 안고 몸부림치던 밤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을 갖고 자신에게 찾아 오셨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숨 한번 들이 마시기 위해 죽을 힘을 다 쓰던 그 밤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찾아와 말씀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나니 평소에 건강할 때 상투적인 성경말씀으로 들리던 말씀 하나하나도 절대 거짓이 아니고 진리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중의 이 부인이 경험한 숱한 고난 가운데 한 가지만 경험하게 되더라도 이 부인처럼 고백하기 쉽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부인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를 믿는 이유는 인생의 비극과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면제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는 지독히도 고통스럽고 쓰라리고 아픈 삶의 비극적인 환경속에서도 그 분이 이루실 놀라운 역사와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이루실 그 분의 위대한 뜻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요즘 존경하는 고 옥한흠 목사님이 남기신 말씀 가운데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생각나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이번 한 주간 아 사람들이 몽둥이로 얻어 맞은 듯이 쑤시고 아프다고 말하느게 이런거구나 하고 느낄 만큼 많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데 얼마나 오늘 본문의 말씀이 생각나는지..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는 것. 이 고통에도 분명 당신의 뜻이 있다는것..
그래서 침대에 누워 땀을 뻘뻘 흘리며 아 아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그 분의 뜻이 무엇일지 많이 묵상해보았습니다. 12년 동안의 사역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지나온 여정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아파서도 울고 감사해서도 울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주님을 향한 그 뜨거움과 열정이 내게 아직도 그렇게 뜨겁게 남아있는가 생각해보면서 또 회개의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한 주간 많이 아픈 만큼 저는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출애굽기 3장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5절에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출3:7-8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부르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것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던 수 많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사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 때문에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출3:7-8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이 수 천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요, 오늘 이 시대 동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심을 표현하고 계십니까?

7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하고 계십니까?
한번 따라해 봅시다. 고통을 보시는 하나님 
 
첫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분명히 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바뀌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시선입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시작점 그것은 우리의 고통을 눈여겨보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키울 때 우리 부모는 자녀에게서 결코 시선을 떼는 일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바라보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부모는 무엇을 하든 그 자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지 못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훨씬 더 많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가운데 허덕이고 아파하고 있을 때 저기 멀리 뒤돌아서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의 고통을 분명히 바라보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 천주교회의 신부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듣고 예수를 믿는 두 농부가 잡혀서 죽음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에 태워 져 바다로 나가서 바닷물에 띠운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조금 후에 밀물이 되어 거센 파도는 두 사람의 농부를 집어삼키고 말았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농부는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언덕 위에서 숨어 보고 있던 신부는 이런 만행에도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는 것 때문에 탄식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신다면 이렇게 침묵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신부가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신부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으로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고통 가운데 죽어갈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신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있었을 뿐이다.”   
신부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 가운데 우리를 외면하고 모른 척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 가운데 더 가끼이 오시사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지켜보시며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밤 어떤 고통으로 쓰라리며 아파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오늘 이 밤 여러분들의 모든 고통을 분명히 지켜보시고 아픈 만큼 더 가까이 함께 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습니까?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가운데 어려워하고 힘들어 울부짖고 눈물 흘리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고통가운데 부르짖는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시 50:15절 말씀을 찾아볼까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오래 전에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그들의 보금자리가 물에 잠기고 말았는데 갑자기 물 가운데 떠오른 그의 가족들은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 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물이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다. 
물은 점점 차 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 올랐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참으로 절박하기 이를데 없는 생사기로의 순간  찰스는 다시 허탈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틀렸어 여보, "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들과 같은 죽음의 고비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결국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찬 432장)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솟구치는 소망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과 같이 바로 그 순간 그들은 호숫가에 올려져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그들을 향해서 떠내려오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배를 타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 얘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도 부르면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를 때 모른 척 하시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 멀리 갈 필요없이 이 출애굽기 말씀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고 역사하셨는지 우리는 너무나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먹을 것을 위해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마실 물을 위해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반석을 쳐 물을 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에도 분명히 응답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을 경험하지 못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이. 목사님 기도하지 않기는요. 지금 이 문제를 위해 몇 년째 기도하고 있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부르짖음과 기도는 언제까지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정답은 응답받는 그 순간까지입니다. 내 기준대로 1년 혹은 2년 기도하고 응답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날 사랑하지 않나봐. 하나님은 기도해도 응답해주시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바른 기도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씀이 있죠? 그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받을 때 중요한 것은 받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받고 싶어도 주는 사람이 주지 않으면 그건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응답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결단코 모른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단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 기도의 응답을 미루거나 거절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즉시로 응답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딸 다은이가 요즘 감기에 걸려 있습니다. 저희 딸은 저를 닮아서인지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하면서도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할 때 저는 참 마음이 아픕니다. 못 사줘서가 아닙니다. 안 사주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사주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딸의 요구에 부응하고 싶은 것이 아빠의 인지상정일진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걸 주면 그 딸에게 안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좀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롬8:32절 말씀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은 못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안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미루고 계시고 거절하고 계시는 것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응답받는 그 날 ,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간구해야 할 이유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응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따라해 봅시다.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근심이 무엇이고 우리의 아픔이 무엇이고 우리의 소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녀보다 항상 먼저 필요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녀가 요구하기에 앞서 부모는 먼저 자녀를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합니다. 
우리 딸 다은이가 이제 2학년 4년후 중학교에 가는데 벌써부터 중학교에 가면 학비가 얼마가 드는데 준비되셨나요 묻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은이가 염려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부모인 제가 염려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항상 자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관심 즉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요, 백성인 우리들의 근심이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행여 부모는 사춘기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 헤아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헤아리지 못할 마음이 없으십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길 물속보다 더 모를 그 사람의 한 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은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영국의 유명한 침례교 목사였던 스펄존 목사님이 지방에 복음을 증거하고 난 다음에 런던으로 돌아오려고 기차를 탔는데 기차를 타자 마자 포켓을 뒤져보니 기차표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기차에 올라타서 기차가 출발했는데 조끼에 넣어보니 기차표가 없습니다. 분명히 간수를 했는데 없으니 당황을 하니까 그 앞자리에 앉았던 신사 한 분이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기차표를 여기 분명히 넣었는데 기차표가 없어졌어요. 그러나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 어떤 어려움에도 하나님은 미리 알고 준비해 놓았으니 더 좋은 것 주실 것입니다 .” 그러니까 그 앞에 있는 신사가 싱긋 웃더랍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 있지 아니해서 검표원이 검표를 하고 옵니다. 검표원이 오더니 앞에 있는 신사를 보더니 경례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신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스폴존 목사님 자리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경례를 다시 한번 하더니 지나갑니다. 그런 후에 그분이 일어나면서 하는 말이 “스폴 존 목사님 내가 이 철도회사 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내가 이 기차를 탈 이유가 없는데 자꾸 타고 가라고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았는데 하나님은  스펄 존 목사님을 알고 저를 예비해 주셨네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오늘 이 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염려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에 문제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 염려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가장 잘 알고 계셔서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그 해답과 해결책을 알게 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 하나님은 어떻게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십니까?
8절입니다. 내려가서 건져내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근심을 알고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며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근심을 알고 계시기에 어떻게 하십니까? 친히 내려오십니다. 고통과 환란과 어려움과 문제로부터 건져주십니다. 해결해주십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해가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오늘 이 시간 내려오시고 우리를 모든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건져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가장 아름다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오늘 이 밤 내려오시고 건져주시고 가장 좋은 그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길로 가는 과정이 때로는 너무 멀게 느껴지고 너무 험하게 느껴진다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변함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하심을 따라 담대히 걸어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당장 가나안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게 가나안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은 수 천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생각이었습니다. 이 광야에서 그대로 죽는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가나안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아직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여 주십니다.    

미국 사람 하나가 불란서 여행을 하다가 불란서 시골 가게에서 목걸이 하나를 봤습니다. 그는 그 목걸이가 너무나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목걸이를 파는 사람은 그리 비싸지 않은 저렴한 가격으로 그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공항에서 세관 통과를 할 때 목걸이에 대한 의외의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거 비싸지도 않은 물건인데 그렇게 높은 세금을 매기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세관이 하는 말이 이것은 손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고가의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세금을 지불하고 나와 그는 보석상에 가서 보석 감정사에게 그 목걸이의 값어치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런데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동안 그 목걸이를 보던 이 감정사가 놀래기 시작합니다. 
“손님이 가지고 오신 이 목걸이는 보통 목걸이가 아니네요. 좀 보시지요.” 
그래서 확대경으로 가만히 보니까 거기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죠세핀에게 ...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그 목걸이에는 나폴레옹의 사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메마르고 험난한 인생의 광야 한 복판을 걸으면서도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이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백성이라 새겨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장에 당신의 자녀라 새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우리의 염려와 근심, 우리의 고통과 아픔이 너무 커서 그 글귀가 보이지 않을만큼 작게 보여도 우리의 가슴과 심장에 하나님께서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백성이다. 새겨 놓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의 글씨는 결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글씨를 보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 글씨를 보는 대신 다른 것을 보는데 있습니다. 오늘 이 밤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 그 사랑의 글씨, 그 은혜의 글씨를 다시 한번 믿음의 눈을 크게 열어 볼 수 있길 그리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영광돌릴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 천년전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그들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가장 아름답고 광대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이 시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섬기는 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밤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고통을 보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우리의 근심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끝내 당신이 약속하신 그 아름답고 광대한 땅 가나안으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밤도 변함없이 이 사랑의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부르짖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며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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