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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병을 고치시고 연약한 것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 8: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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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고치시고 연약한 것을 담당하신 예수님 (마 8:14-17)

주님의 공생애는 주로 이 땅의 왜곡된 질서를 치유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키는 사역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문둥병자를 치유하시고 백부장의 종을 말씀으로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으로부터 치료하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갖 귀신들린 자들과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이 우리의 슬픔과 질고를 대신 지시는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이라고 마태는 설명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키시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사람들, 자연 질서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은 언제든지 성도들에게 은혜가 됩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셔서 오늘도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는 소중한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심(14-15절) 

본문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한 사건은 이런 베드로의 가정에 대한 주님의 인정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가정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4절에 의하면 이 일은 예수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장모가 함께 살고 있었고 누가에 의하면 중한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아마 장티프스나 말라리아가 될 것입니다. 누가는 그 병세가 아주 심각해서 중한 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베드로의 장모를 보셨습니다. 눅4:38절에 의하면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베드로의 장모를 보자마자 열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나이가 많음에도 열병에서 회복되자마자 수종을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병으로 말미암는 후유증까지도 말끔히 치료해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때문에 발생된 기적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무책임한 가장이 되고 부모의 병도 나 몰라라 하는 냉혈한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베드로의 아내는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사실 베드로의 가정은 참으로 많은 값을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아내는 참으로 많은 값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자주 집에 들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일정한 거처가 없이 계속 여행을 다니셨기 때문에 가버나움 쪽에서는 베드로의 집에 자주 들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기 시작 후로 가정을 완전히 등지고 도외시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받아야할 섬김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남편을 잃은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포기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 베드로의 가정에 주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치유하심(16-17절) 

앞의 세 가지 사건은 모두 육신의 질병을 치유한 사건이었습니다. 문둥이를 손을 내밀어 대시며 치유하신 것은 예수께서 모든 부정한 것들을 물리치시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장모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열병에 대해서 의학적인 정리가 되어져 있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은 열병을 하나의 병증으로 보고 만지면 부정한 것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손을 대셨다는 것은 문둥병자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집에서 장모의 수종을 받으면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그랬습니다. 여기서 귀신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영혼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는 이 말이 마귀들을 뜻하는 '다이모니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세 가지 사건이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었다면 이 사건은 귀신들, 악한 영들을 제어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또 다시 병든 자를 다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인간의 영적인 문제, 육적인 문제들을 모두 치유하시기 위해서 오신, 또한 치유하실 수 있는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보게 됩니다. 

이 사실을 마태는 이사야 53:4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7절)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질고'는 '병'으로, 또 '슬픔'은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바꾸어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만연한 죄악들을 고난받는 종으로서 치유하셨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시지만 바로 우리의 연약한 것들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문둥병 자와 백부장의 종과 각색 병든 자들을 치료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믿음으로 의탁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막1:29-30과 눅4:38-39의 내용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신약에는 복음서가 넷이 있습니다. 각자가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같이 상고하면 더욱 깊은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 사역을 하시고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서 잠시 쉬시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집에 마침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기꺼이 그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1. 언제나 주님을 초청하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잠시 휴식을 하시려고 베드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을 받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은혜가 있고 치유가 있고 축복이 있게 마련입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배가 뒤집힐 정도의 파도가 몰아 닥쳤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침몰할 위기를 만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다가 제자들의 이 모습을 보시고 바다 위로 걸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위험을 만난 제자들의 곁을 지나가시려고 하실 때 제자들이 그분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그치게 하여 제자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초청하십시오. 

가장 작은 교회로는 가정이 있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억압된 것이 해방되고 포로된 것이 자유함을 받게 되며 질병이 떠나가고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구역교회가 있습니다. 구역예배는 구역식구들이 돌아가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자연스럽게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내 집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구역식구들이 내 집에서 평안을 빕니다. 그리고 축복을 빕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역예배를 피하고, 싫어하고,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는 분이 있습니다. 참으로 축복을 발로 차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내 가정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내 사업장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내 직장에 모시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람들이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막 1:30과 눅 4:38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녀를 위해 간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중보와 믿음이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역사는 대개 믿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간구하면 주님께서는 한 번도 거절하시거나 인색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구하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이 정도 가지고 기도할 것은 무엇인가?" 하고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혹은 주님께서 내가 아프니까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보시고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만지시면서 열병을 꾸짖어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난해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눅 4:39에 질병을 향해서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질병을 인격화, 의인화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질병 그 자체가 무슨 인격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는 병을 치유하는 많은 사역자들을 보아왔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어떤 이는 마귀를 물리치므로 질병을 고친다고 합니다. 무조건 마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단순한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치유사역은 간단치 않습니다. 무조건 마귀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질병만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사람이 실수로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마귀의 역사인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질병을 통해 악한 영이 역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심적으로 불안하든지 두려움이 가득차서 육적인 균형을 잃으므로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을 하는 사람은 먼저 영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단순한 질병인지, 아니면 마귀의 역사인지, 아니면 질병을 통해 마귀가 역사하므로 질병이 잘 낫지 않고 오래간다든지 등등. 

베드로의 장모가 고생하는 열병은 마귀가 붙들고 있어서 여러 날 낫지 않고 고생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병 배후에 역사하는 악한 영을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는 이 질병이 나을 수 없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열병을 꾸짖었지만 실은 악한 영을 결박한 것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의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치유사역을 하실 때는 유심히 관찰했을 것입니다. 아마 누가는 예수님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참으로 놀랐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도 단순히 질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을 결박함으로 치유하신 것을 보고 자세히 누가복음서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늘 은혜가 넘치고 평안이 충만하고 강건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강건하고 승리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말없이 담당해 주십니다. 그분은 이 땅의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이기십니다.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인 질병, 그리고 사탄으로 인한 귀신들림에 이르기까지 그분 앞에 능치 못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도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 상한 마음, 지친 영혼들을 싸매어 주십니다. 그분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지 말고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해 주시는 주님에게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일평생의 삶이 주님으로 인해서 자유하고, 감사가 있고 평안이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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