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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롬 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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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롬 12:9-21)


우리나라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에도 그렇지만 영어를 우리나라말로 옮길 때에도 한 단어로 딱 맞게 옮기기가 어려운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pretender'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pretend(무엇 무엇인 체하다)'라는 동사에다 '사람'을 뜻하는 'er'이라는 접미사를 붙였으니 굳이 번역하자면 '무엇 무엇인 체하는 사람'이라는 긴 말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영어로는 그냥 'pretender'이라고 한 단어만 써도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만 그런 척하고 모양을 내는 사람'이라는 뜻을 함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겉으로만 이런 척 저런 척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참으로 특이한 악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밖으로 나타나는 표정이나 행동이 그 속에 있는 감정이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필요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진심과는 정반대로 '무엇 무엇인 체할 수 있는' 실로 교활하기 짝이 없는 재주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문장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는 말씀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하나니'라고 번역해야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여기 "거짓이 없어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위선이 없어야'라는 뜻입니다.
바로 기독신자들 중에 그저 '모양만 내어 사랑하는 척하는 것'을 두고 경계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구절을 'Don't just pretend that you love others. Really love them.'(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체하지만 말고 정말로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조금 길게 의역해 놓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기독신자의 윤리생활 강령의 제1조에 해당되지만, 바로 그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pretender'(사랑하는 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또한 기독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거짓 없는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성령께서 우리 기독신자의 '진실한 사랑'에 대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두 가지 실천원리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신자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으로써 거짓 없는 '형제사랑'을 해야 합니다.

우선 9절부터 11절에 "9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기록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우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즉 '악한 것은 반드시 미워하라.'는 명령과 '선한 쪽에 확실히 서 있으라.'는 명령부터 순종하는 것이 바로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첫 걸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랑이란 말로 시작된 구절에 '미워하라'는 말이 금세 따라오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아주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인들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잘 알면서도 '악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마치 성경에 없는 말씀인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한 것을 악하다'고 정죄하는 것이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위배되는 것인 줄로 생각하는 것이 특히 뻔질나게 '사랑'을 강조하는 신자나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빠져 있는 크나큰 오해인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을 미워할 줄 모르는 가운데 그저 사랑이란 말만 값싸게 남발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을 악하다고 책망하지 않고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사탕발림은 결코 참된 기독신자의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한 후에 자기 자신은 일단 선한 쪽에 확실히 서 있고 나서야, 비로소 아직도 악한 쪽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진실한 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0절과 11절은 9절에 종속되는 문장으로서, 그처럼 '자신이 먼저 선에 속하는 확실한 길'이 바로 참된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존경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할 줄 모르고 저희들끼리만 좋아하는 '속 좁은 사랑'이 결코 아니라, 진정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단계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먼저 거쳐야 할 필수기본과정인 것입니다. 
  
여기 "우애하고"라는 말은 '가족애'와 '우정'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성도들 간의 사랑은 마치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것과 같은 '우애'라는 뜻입니다.
정말 친 가족처럼 교우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제일 첫 단계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는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포함됩니다.
불신 사회에 있는 존경이란 주로 힘이나 돈 있는 사람을 떠받드는 것입니다. 
즉 그런 존경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계산하거나 혹은 자기에게 최소한 불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또 하나의 '거짓된 사랑'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서로 먼저 존경하는 것'이란, 이처럼 항상 아래에서 위로만 올라가는 일방적 존경이나 그냥 상대방을 높이 치켜 올려 주는 외식적인 존경과는 달리,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존경입니다.
이런 차원 높고도 진실한 '상호 존경'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실 정도로 고귀한 존재'로 인정할 때입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서로 가까운 친구 사이라 해도 서로 존경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무례히 대하다 보면 그 우정도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 것'은 성도 간의 사랑을 지켜주는 보호막과도 같은 것입니다.

11절의 말씀은 이런 성도 간의 사랑은 곧 주님을 잘 섬기는 것과도 직결됨을 보여 줍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란 문자 그대로 '몸으로 열심히 섬기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 다음에 "열심을 품고"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는 '영적으로 뜨거운 가운데'라는 뜻인데, 다시 번역하자면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는' 교통이 있을 때에 "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피곤해 하거나 낙심치 아니하고 그 열심과 열정이 더욱 강렬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절과 13절의 본문은 바로 그처럼 부지런하게 '형제사랑'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거기에 보면 "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했습니다.

현재 당하는 환난 중에도 내세에 대한 "소망" 때문에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는 것이 모든 참된 성도들이 공유하는 신기한 성품입니다.
물론 이런 영적 기쁨은 "기도"에 항상 힘쓸 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 심령의 밝고 명랑한 것들이 성도들을 위하여 "공급하며... 대접하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들"이란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극히 제한된 무리를 지칭하는 말로서 아까 나왔던 "형제"라는 단어보다도 그 사랑의 대상을 훨씬 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공급"이란 필요한 것을 실제적으로 나누어 쓰는 것을 말합니다.
"손 대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그냥 '대접'이라는 단어로서, 지나가는 행인을 대접한다는 광범위한 뜻도 되겠지만 본문의 문맥에서는 바로 '성도들을 대접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이 가득해야 대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이요 물질적인 대접입니다.
반면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대접이 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항상 품고 바로 그 기쁜 마음과 그 밝은 얼굴로 성도를 부지런히 돕고 나누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진수성찬도 전혀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대접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교인을 대할 때에 어찌하든지 말을 점잖게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등 상식적인 예의를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물론 필요한 자세지만, 그것만 신경을 쓰다 보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사랑하는 척'하는 데에만 숙달되기가 참 쉽습니다.
  
신자의 형제사랑이란 그런 '겉치레의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에 속한 마음'을 가지고 곁에 있는 성도부터 서로 존경하고 먼저 대접하는 '진짜 사랑'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말씨나 자세로만 사랑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정성과 최고의 노력이 동원되는 '거짓 없는 사랑'으로써 성도와 서로 교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는 것'은 '선에 속한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을 사랑하면서 형제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인 체하는 사랑' 즉 그야말로 '외식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같이 예수님만을 구주로 믿는 성도, 함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눈 형제들의 공동체 안에서 피차 몸과 마음을 다 동원하여 주님을 섬기듯이 서로 존경하고 대접하는 이 진짜 '형제사랑'을 꼭 주고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신자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거짓 없는 '원수사랑'을 해야 합니다.

14절 이하 16절에서 "14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형제사랑'에서 '원수사랑'으로 그 주제를 바꾸고 있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축복하라'는 명령이 다시 한 번 반복되고 계속 그 뒤를 이어 "저주하지 말라"고 강조되었습니다.
원수에 대하여 신자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그 원수를 '저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쁜 말로 욕을 함으로써 그 원수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신 사회에서는 흔하고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처럼 저주라도 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은 마음까지도 억제하고 오히려 '축복'할 수 있어야만 진정 '거짓이 없는 원수사랑'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의 말씀은 꼭 원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인데, 요약하자면 '상대방과 마음을 같이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은 누가 제일 처음에 한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참 좋은 말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말씀대로 상대방과 희로애락을 같이 나눌 때에 그 즐거움은 배가되고 그 슬픔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거짓 없는 사랑으로 상대방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은 거기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는" 데까지 이릅니다.
여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란 말은 쉽게 말하자면 '내가 너보다 뭐가 나아도 좀 더 낫다.'라고 속으로 상대방을 멸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에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즉 그런 교만을 버리고 특히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과 똑같은 자리에 자신을 겸손히 내려놓고 그들과 사귈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는 말씀 역시 제발 저 잘난 척, 혼자 똑똑한 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단에서 '원수사랑'의 주제로 시작한 후에 이런 말씀을 첨부하고 있는 것은, '내가 상대방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남을 업신여기고 미워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은 나란히 앉아 있어도 마음은 상대방보다 훨씬 위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거짓된 사랑'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 후에 17절 이하 21절까지의 말씀은 본격적으로 원수 사랑의 방법을 가르칩니다.
"17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은 그 어느 누구가 보아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처신을 하라는 뜻입니다.
원수를 저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해야 하며, 말로만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일"로써 그 당한 악을 대신 갚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고 번역된 말은 '만약에 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여 행하라.'는 뜻입니다.

"너희로서는"이라는 말 역시 '상대방이 어떻게 나온다 해도 너희 쪽에서는 어디까지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는" 자세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즉 원수 쪽에서 아무리 나를 미워하고 내게 악하게 군다 해도 그것이 신자 쪽에서도 그를 적대해도 괜찮은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욕을 당하더라도 신자 쪽에서는 그저 '누가 보아도 옳다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선한 말과 행동으로 원수를 대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마태 헨리(Mattew Henry)라는 주석가는 이것을 두고 "원수의 모욕을 유순함으로 받으면 그것은 마치 던져진 돌이 솜 무더기에 떨어짐과 같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선으로 악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그 악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충격흡수 장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19절의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사랑을 입은 자들아'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 된 것을 기억하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미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계산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빚을 탕감받은 자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친히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 그것을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한 것입니다.
반복하여 강조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 일만큼은 너희들이 절대로 직접 손대지 말라.'(It is none of your business.)라는 금지명령인 것입니다.

'악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행해져야 하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일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이라는 것은 아예 주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악인에게 복수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전담 사역일 뿐입니다.
그처럼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전부 맡길 때에 비로소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이 끝없는 미움과 살인의 사이클이 끊어질 수 있는 것이며, 신자의 '거짓 없는 사랑'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용서하는 것조차도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요령이 바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는" 것입니다.
즉 마음으로 용서하기 힘들면 먼저 몸으로 용서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원수에게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정말 절대로 주고 싶지 않은 사람, 가장 받을 자격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바로 그처럼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사랑'(undeserved favor)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전혀 예상 밖의, 아니 상상도 못했던 사랑을 받게 될 때에 그 원수는 마치 "숯불을 그 머리에 
즉 그런 사랑은 원수에게 아주 큰 부끄러움을 지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원수가 끝까지 원수로 남지 않고 오히려 회개하고 변화될 수 있는 가망성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음으로 안 될 때 몸으로라도 먼저 용서해 보려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놀라운 연쇄 반응입니다.
혹 그렇게 해도 원수가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단 그런 사랑을 베풀어야만 신자 자신이 먼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복수란 원수를 해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해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저주하고 악으로 갚는 것은 자기 자신이 먼저 악에게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어 격언에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The best revenge is living well.)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 자기를 괴롭히고 때리던 친구가 있으면 나중에 그 친구보다도 훨씬 잘 살게 되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통쾌한 복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복수는 같이 약을 올리거나 무슨 꾀를 써서 상대방을 괴롭힘으로써 갚는 것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복수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의 복수는 거기에서도 한층 더 나아갑니다.
우리는 '용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고 잘 대접해 주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라고 아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이 당한 악에 대하여 복수하고자 할 때, 오직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진정 '거짓 없는 원수사랑'을 베풀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3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신자들이 교회생활 중에 발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은사는 그 받은 바가 각자 다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가르치는 달란트가 없어서 주일학교 교사가 못되는 것이나 노래를 잘 못 불러서 찬양대 봉사를 못하는 것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따지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모든 기독신자들이 필수적으로 소유하고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기본 은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것은 우리 각자에게 분명히 따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모든 참된 신자들의 공통적 자질이요 필수적 의무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이 소유하고 발휘하는 본성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지만,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이것마저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람 사이에서도 '사랑하는 체하지만 사실은 사랑하지 않는' 거짓 사랑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눈물을 가져다줍니까?
오늘도 그런 '거짓 사랑'에 속은 낙심과 절망감 때문에 스스로 목을 매거나 투신자살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랑이야말로 절대로 '거짓이 없어야 할', 정말 '진실하게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을 미워할 줄 모르고' 오히려 옹호해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식적 사랑'이며 사실상 '형제를 미워하는' 일이 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 하지 않고' 속에 개인적인 원한이 남아 있으면 아무리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도 오직 '위선적 사랑'으로 끝날 뿐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을 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함께 선에 속한 형제'들을 '주님을 대하듯이' 존경하고 대접하며, '아직 악에 속한 원수'들까지도 오히려 '먹이고 마시게' 해 줌으로써 '사랑이 없어 냉랭한 세상'에 진정 따뜻한 사랑을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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