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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과 땅의 소통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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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소통 (행 1:6-11)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 떠나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 승천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주님의 승천주일입니다. 탄생, 활동, 수난, 죽음, 부활로 이어진 예수님의 삶은 아버지께로 돌아감인 승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예루살렘의 동쪽에 아담하게 솟아있는 올리브 산 정상에는 아주 소박한 예배당이 하나 서있습니다. 승천교회(Chapel of Ascension)입니다. 

팔각형 구조의 이 예배당은 십자군의 건축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결합된 기묘한 형태입니다. 이 예배당 한복판에 있는 돌에는 사람의 발자국 비슷한 것이 찍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승천하신 주님의 발자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것은 흔치 않은 일인지라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화가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모티프(motif)로 삼아 많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아도 초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2천 년 전에도 지금처럼 광학 기술이 발달했었더라면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는 것도 가능했을까요? 불경한 상상인가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전하는 승천 이야기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승천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제각각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라 주님이 부활하신지 40일 동안 지상에 머물다 올라가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복음서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곧 승천하신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경우 그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입니다. 성경의 보도가 이처럼 서로 어긋나는 것은 승천이 날조된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주님의 승천에 대한 보도가 사실 보도보다 더 깊은 뜻을 전달하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 올리우심

오늘은 사도행전의 보도에 집중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대화를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잠시 후 구름이 그 모습을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다는 말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늘’ 하면 즉시 창공蒼空을 생각합니다. 그곳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일까요? 외경인 도마복음서에는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너희를 가르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왕국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갈 것이다. 만일 그들이 너희에게 ‘왕국은 바다 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갈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인간이 임의로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을 상징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디모데서의 저자는 그 거룩한 영역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존귀와 영원한 주권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딤전6:16)

‘들려 올라가셨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위/아래의 방향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세계로 들어가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이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공기 중의 수분이 상승하여 팽창한 결과 이슬점 이하로 되어 응결한 작은 물방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낼 때면 거의 예외 없이 구름이나 연기 혹은 번개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올라간 시내산 위에 구름이 자욱하게 드리운 것이 그렇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렇고, 이사야가 비전을 통해 하나님의 어전회의를 엿볼 때 성전에 가득 차 있던 연기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다는 말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영원의 세계 속에 들어가셨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스스로 길이 되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셨습니다. 그 길이 하늘과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사는 동안 그 길을 잘 걸어야 하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가 거부한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도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입은 예수를 믿는데 손발은 세상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산 가려면 부산 가는 차를 타야 하고, 목포에 가려면 목포에 가는 차를 타야 하듯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라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가 걸은 길, 그것은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길이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하지만, 그 때문에 빈곤하거나 누추해지거나 피곤해지지 않는 길 말입니다. 예수는 그 길을 걷다가 마침내 영원한 세계에 당도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승천의 참 뜻입니다.

• 현실을 직시하라

이제 순서를 바꾸어 이야기의 앞부분으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궁금히 여기던 것을 여쭈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6)

제자들의 질문에는 아픔과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면서도 나라 잃은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고통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일제가 지배하던 엄혹한 시절을 겪으며 시인 이상화는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다고 탄식했습니다. 만해 한용운은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시에서 먹을 양식이 없어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다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노래했습니다. 처절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이 하도 컸던지라 사도들은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스승은 나쁜 질문에도 좋은 대답을 하심으로써 제자들을 깨우쳐줍니다. 우문현답愚問賢答 말입니다. 예수님은 뭔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제자들의 바람에는 아랑곳없이 그들이 마땅히 들어야 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7-8)

이 대답의 의미를 가늠하기 위해서 제자들의 질문과 주님의 답변을 셋으로 나누어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바로 지금’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지쳤습니다. 로마가 자행하고 있는 공포 정치에 그들의 의식은 가위눌려 있었습니다. 로마는 가혹한 형벌로 식민지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되었던 과중한 세금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억눌린 이들은 역사의 흐름을 싹 뒤집어엎는 천지개벽을 바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지고, 삶의 희망이 가물거릴 때면 민중들 사이에 미륵신앙이 빠르게 퍼지곤 했습니다. 미래의 부처가 세상에 와서 중생을 구할 것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실망스럽습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매정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섣부른 낙관론이 오히려 사람들을 얼마나 절망 속에 빠뜨리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 잘 될 거야’,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도 않고, 삶은 늘 불확실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값싼 위안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삶은 힘겹지만, 결국 하나님이 역사를 새롭게 하실 것임을 믿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무임승차는 안 된다

둘째, 제자들은 이스라엘 회복의 주체가 ‘주님’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물음이라기보다는 전제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라의 회복은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신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일쑤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뜻밖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저는 이 말을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품부된 생명의 몫을 온전히 누리고, 폭력과 부패가 사라진 세상에 무임승차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듣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은 누군가의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한 덕분에 지금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역사 변혁의 주체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생명을 깨우기도 하고, 태풍처럼 휘몰아쳐 낡은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성령은 은은한 빛처럼 찾아와 우리 어둔 마음에 등불을 밝혀주기고 하고, 불꽃처럼 타올라 세상을 사르게 하기도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내리시면 우리는 능력을 받습니다. ‘능력’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뒤나미스δύναμις'에서 나온 단어가 바로 다이나마이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무기력의 자리를 딛고 일어서게 하고, 일하게 합니다. 성령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증인이 되게 합니다. 예수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증인, 부활의 증인 말입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세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세상을 가리켜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증인들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증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투로스μάρτυρος’에서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rtyr'가 나왔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땅에 하늘을 모셔 들이기 위해 분투하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비는 동시에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땀흘리는 것입니다. 

• 우리 몸을 빌어 오시는 주님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것도 질문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이 전제한 것이라 해야 옳겠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온 나라 위에 우뚝 세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성령이 내리면 사도들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들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도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와 국경, 인종과 피부색이 문제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빈부귀천이 문제 되어서도 안 되고, 문화와 종교조차 문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마치 조각보를 만드는 사람처럼 조각난 세상과 조각난 사람들의 마음을 깁고 또 누비셨습니다. 저는 요즘 갈등을 중재하고 화해를 주선하는 일이 참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도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 깊이 숨어 있는 상처를 가리켜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버림 받거나, 거절당하거나, 상처 받은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를 사랑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지도 못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덥석 부둥켜안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 받아들임이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며칠 전 시를 읽다가 ‘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는 구절과 만났습니다(오세영, <그릇 1>.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어떤 힘에 의해 깨질 때 우리 마음에는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는 칼날이 되어 자신도 찌르고 남도 찌르게 됩니다. 시인은 ‘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고 노래합니다. 깨진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은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사랑이십니다. 

불화의 담이 높아지고, 산하의 피울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오고, 불의한 이들이 공모하여 약한 자들을 유린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이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주님은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주님은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빌어 이 세상에 오십니다. 주님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새 세상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고 계십니다. 오시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몸과 마음을 내어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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