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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사랑은 남는 것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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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은 남는 것 (요 13:34-35)
  

<김중령의 아내 사랑>

지난 6월 6일, 현충일 저녁에 저는 참 감동적인 다큐 한 편을 보았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리모컨을 돌리다가 한 방송국에서 현충일 특집으로 8년 전에 방영했던 ‘인간 극장’을 다시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8년 전이니까 2003년도에 방영된 프로였지요. 한미연합사에 근무하는 김봉춘이라는 육군 중령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어 아내에게 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중령의 아내 유복남씨는 만성신부전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혈액투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는데 점점 상태가 나빠져 신장 기능이 정상인의 11%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아내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신장 이식 수술뿐입니다. 장기를 이식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친 부모나 형제자매로부터 이식을 받는 것입니다. 유복남씨에게는 친 형제 자매가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피붙이라고 할지라도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요. 결국 남편인 김봉춘 중령이 자신의 신장을 하나 떼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김중령은 27년간 군에 투신해왔는데 자신의 신장을 떼어 줘 체력에 이상이 올 경우 전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부부 사이라는 것이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가 아닙니까. 마주 볼 때에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누구 말대로 등을 돌리면 가장 먼 사이가 부부 관계이기도 하지요. 유전인자가 가장 잘 맞는다는 친정 식구들도 있는데 왜 하필 내가 해야 한단 말인가? 인간인데 왜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결국 김중령은 이런 고민을 다 떨쳐내고 특유의 군인 정신으로 아내에게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기로 마음먹습니다.

김중령의 아내는 세상 기준으로 보면 결코 용모가 예쁜 여성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신장 기능이 망가져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남편은 현역 장교라서 그런지 건강하고 용모도 말쑥해보였습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남편이라면 앞으로 진급도 해야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서 쉽게 이식을 결정할 처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봉춘 중령은 군인의 길을 포기하더라도 남편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편은 지난날을 돌아보니 아내가 자기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했던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박봉인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취직까지 해서 직장인으로, 엄마로, 아내로 1인 3역을 해준 아내의 수고를 기억하고 이제는 자신이 아내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이식 수술을 받기 전 김봉춘 중령은 할 수 있으면 좀 더 튼튼한 자신의 장기를 나누어주고자 예전보다 더 열심히 체력단련을 합니다. 드디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납니다. 이제 부인은 남편의 가장 소중한 장기를 자기 몸에 넣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장기를 나누어 가진 다음 부부는 더욱 더 애틋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40대 중반의 부부로서 닭살이 돋을 정도로 만날 때마다 끌어안고, 신혼 부부 이상의 정을 과시합니다. 그도 그럴 듯이 이제 두 사람은 생명처럼 귀한 신체의 일부를 함께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 하나하나가 감동이 되어서 시종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수술을 마치고 맞게 된 남편의 생일잔치 때였습니다.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장기를 거저 준 남편, 그 남편의 생일 선물로 자신의 목숨까지 주어도 아깝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아직 마스크를 쓰고 바깥출입을 자제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도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종이에다가 자기가 정성을 다해서 직접 선물 교환권을 씁니다. 물론 발행은 자기 이름으로 한 것이고 유효 기간은 평생입니다. 

<왜 좀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요즈음 부부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가 계산적이고 이기적이 되어 간다는 한탄을 합니다. 낯모르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가족 간의 관계도 점점 이해 타산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태에 아무 조건 없이 가장 귀한 것을 나누어 준, 참 아름다운 다큐 한 편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좀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좀 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까?” 충분히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을 제일 아쉬워합니다. 

지난번에 미국에 갔을 때 제가 시무했던 텍사스 성누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교인 한 분이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데 뜻밖의 분이었습니다. 오현주 집사님이라고 미장원을 했던 분인데 저희 내외와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 내외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에는 대개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대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도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집사님의 친정 남동생이 갑자기 죽었을 때 제가 화분을 사갖고 와서 위로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 잊어버린 이야기인데 그 분은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었고, 또 그것이 고마워서 식사 공궤까지 하게 된 것이지요.

그랬습니다. 그동안 시무했던 교회의 교인들을 다시 만날 때마다 깜짝 놀라는 것은 제가 베푼 작은 온정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어떤 설교를 했고 제가 있었을 때 어떤 행사가 있었고, 대개 이런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제가 베푼 목회적 사랑은 꽤 오래 기억했습니다. “목사님, 고마워요. 제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기도해주셔서 감사해요.” “목사님, 제가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찾아오셔서 기도해주신 것 고맙습니다.” “제가 갈피를 못 찾고 방황했을 때 따뜻하게 격려해주신 것 고맙습니다.”

그랬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쉽게 망각합니다. 이것저것 다 기억의 창고에서 지워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비단 목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왜 내가 그 때 좀 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로 가득 차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아무도 사랑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짐승도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압니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 세계도 그렇지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여럿 있는 가정에서 실험을 했답니다. 유리병 세 개에 밥을 넣고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한 병을 향해서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다른 병을 향해서는 “망할 놈, 썩을 놈” 하면서 욕을 했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병을 향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답니다. 한 달 뒤 결과를 봤더니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건넨 밥은 발효 상태로 누룩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겼는데, “망할 놈, 썩을 놈”이라는 말을 들은 밥은 부패해서 새까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대했던 밥은 욕을 얻어먹은 밥보다 더 빨리 썩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4절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옛 계명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똑같이 되갚아주라는 정의와 복수의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우리보다 더 흉측한 죄인이 되셨고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은 유명하지요.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그리고 부활하신 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위하여 장렬히 순교해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되갚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랑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서로 사랑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제자답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위해 목숨 버린 아버지>

패트릭 몰리(Patrick Morley)가 쓴 “Man in the Mirror”(거울 속의 아버지)라는 책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와 12살 된 아들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알래스카에 연어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수상 비행기(pontoon aircraft)를 타고 갔습니다. 그들은 상륙해서 하루 종일 낚시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으로 돌아왔을 때 썰물로 인해 조수가 다 빠져 나갔으므로 수상 비행기가 자갈 더미 위에 올라 앉아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어서 저녁을 먹은 뒤 비행기 안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밀물이 들어와 물위에서 비행기의 이륙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수상 비행기의 바퀴 하나가 펑크가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결국 비행기는 고장이 나서 이륙이 불가능해졌고 물위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비행기는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사람들은 간신히 비행기 밖으로 빠져 나와서 낚시용 장화에 바람을 넣어 물위에 둥둥 떠 있게 만든 상태에서 이것을 붙들고 버텼습니다. 하지만 조류끼리 맞부딪히는 파도가 너무나 심해서 수영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동행했던 두 남자는 간신히 해안에 도착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바다 위에서 서로 팔을 낀 채 휩쓸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해양 경찰은 아버지와 아들이 혹한의 바다 속에서 표류하다가 체온 저하로 숨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체구가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숨지기 전에 아버지의 팔 안에서 잠에 빠진 것으로 봤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홀로였다면 얼마든지 바닷가까지 헤엄쳐 갈 수 있었지만 아들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꼭 껴안은 채 차가운 바다에서 함께 죽어갔던 것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식이 소중하기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들어준다는 뜻이지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목숨처럼 사랑하십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이제 요한 1서 4장 7절로 12절 말씀을 읽어 드리며 제 설교를 마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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