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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능적 무신론자 (행 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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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적 무신론자 (행 10:9-23)

근래에 기능적 무신론자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기능적 무신론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는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아니고 믿는 사람인데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인생의 결정을 내리는 방식에 있어서는 안 믿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인생의 결정의 기준이 비그리스도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기복적인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산타클로스처럼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라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 그리고 네 번째로 자신의 도덕적인 기준이 성경말씀보다는 보편적 사회 기준에 기초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기능적인 무신론자라고 분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겉으로는 믿는 사람 같지만 실제 기능적으로는 안 믿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기능적 무신론자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할수록 무서워지는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지만 기능적 무신론자와 흡사하지 않은가 라고 묻게 만듭니다. 

특별히 요즈음에 한국개신교의 개혁을 논하는 사람이라면 교회가 개혁될수록 그리스도인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가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개혁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의 잘못된 것, 불필요한 것, 미신적인 것, 과장된 것, 오버하는 것, 거품 이런 것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입니다. 우리 신앙의 거품, 과장, 미신을 제거하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우리는 그러므로 점점 세속적인 사람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저는 지난 열흘 동안 가정일로 캐나다에 다녀왔습니다. 열흘 동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어요. 평신도. 예배 인도를 하지도 않고 설교 준비를 하지도 않고 심방을 가지도 않고 그리고 바쁘게 이런저런 사무를 보고 다녔습니다. 캐나다 사회는 겉으로 봐서는 신앙적인 요소가 별로 보이지 않는 사회입니다. 먼저 교회가 한국처럼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눈에 띄게 신앙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그건 그냥 느낌입니다. 

한국사회는 종교적인 면이 아직 느껴집니다. 길에 노방전도 하는 사람이라도 있고 또 부흥회 광고 사인이라도 붙어 있습니다. 또 신문에 교회 관련된 뉴스가 등장하고 식당에서 식기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는 그런 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신앙이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존재하더라도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헷갈리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사회가 평온하고 질서정연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고 질서를 잘 지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답답할 정도로. 그리고 남에 대한 배려가 습관이 된 사회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뒷사람을 위해서 문을 잡아주고 장애인을 배려하고 이런 것이 습관화된 사회입니다. 이게 왜 헷갈리게 한다는 것이냐. 신앙적인 요소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평온하고 법과 질서를 잘 지킨다면 우리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굳이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나이스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사회가 평온하고 질서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냐? 그렇다면 신앙이 사람을 위해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저의 이런 생각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 목사님은 원래 생각이 깊으셔. 철학적이셔.’ 하지만 저로서는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유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신앙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신앙의 유무에 대해서, 신앙적인 이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 여러분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성직자이지만 여러분은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직업상으로라도 하나님을 찾아야 되지만 평신도들은 평소에 그들의 삶에 묻혀서 살다보면 일주일에 한번 주일예배를 참석하는 것 외에는 삶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열흘 동안 평신도로 살아보니까 그걸 실감할 수가 있었어요. 세상은 우리의 신앙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감동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돌아가는 물정에서 성령의 감동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을 처음에 갖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것인데 우리가 애초에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내게 달린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에 달린 것임을 우리가 믿을진대 그렇다면 세상이 점점 세속화되고 차가워지고 신앙으로부터 멀어질지라도 내가 거기에 좌우되지 않고 내 안에 신앙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그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은 것도 내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내 믿음을 유지하는 것도 주님에 의한 것이 분명한데 다만 우리가 그냥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의 신앙을 붙잡아 주시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의 관건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남극에 가서 살든 사막 한가운데 살든, 교회가 없는 곳에 가서 살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에 가서 살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내 안에 있는 신앙을 유지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살고 아까 말씀드린 기능적 무신론자처럼 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선택한 이유는 베드로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입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훌륭한 목사이기 전에 훌륭한 제자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어요.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목사가 된 건 아니에요. 그가 사역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은사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가 되기 이전에 먼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요 신실한 제자였어요. 사람들 앞에 서고 남의 신앙을 도와주어야 되기 때문에 신앙에 열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혼자 있든 사람들 앞에 서든 설교를 준비하든 조용히 살든 신앙인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하신 일들은 베드로의 결정과 선택과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내가 아무개에게 전도해야 되겠다 해서 전도한 게 아니고 내가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겠다 해서 부흥시킨 게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본문에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 선택하라고 한다면 결코 고넬료를 찾아 갈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고넬료는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원래 이방인들과 섞이지 않습니다. 이방인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하지 않습니다. 이방인과 같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는 결코 고넬료의 집을 찾아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방인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이유는 주님이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신앙과 베드로 사역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셨다는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좌지우지한 게 아니고 주님이 결정을 내리시고 인도하시고 명령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고 능력을 베푸시고 이루게 하셨어요.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셨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거기까지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어요. 

그런데 관건은 그렇다고 베드로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충실히 해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기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9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낮 열두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이 넷이라는 숫자는 땅의 숫자입니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동서남북, 모든 족속, 모든 방언, 모든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리고 그 보자기 안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있었다는 말은 이제 천국 가는 길은 원래 의인,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고 원래 부정한 사람 죄인 떠나갔던 사람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머뭇거리고 주저할 정도로 부정한 짐승까지 그 보자기 안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주저할만한 과오와 죄와 불의함의 과거가 있었던 사람들까지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아주 의미심장한 환상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환상을 낮잠 자는 중에 본 게 아니고 기도하는 중에 보았습니다. 이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마는 하나님의 주도하시는 신앙이라도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그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할렐루야. 아주 중요하고 상식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배가 고플지라도 여기서 그가 시장하여 라는 말이 나오고 시장하여 먹고자 할 새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는 것은 신앙인의 두 가지 아주 중요한 면모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그의 인간됨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라고 해서 배고플 때가 없는 게 아니에요. 베드로도 배가 고플 때가 있고 목마를 때가 있고 괴로울 때가 있고 속상할 때가 있고 외로울 때가 있고 베드로도 인간이에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시장했다는 말은 그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장한 중에 하나님이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평범한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신비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귀중한 은사를 담아주십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그처럼 배고파요. 우리도 그처럼 목마를 수 있어요. 인간적인 모든 면이 똑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고 기도하는 중에 그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기도. 

제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맞았을 때 토론토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어떤 이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토론토대학 캠퍼스를 거닐다가 어느 예배당 앞을 지나가는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는데, 밝은 점심시간에 대학교 채플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고 제 방언을 스스로 통역하다가 예언을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너를 쓰리라.’고 하셨어요. 

제가 기도하는 중에 제 입에서 나온 목소리입니다. ‘내가 곧 너를 쓰리라.’ 전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몇 주 후에 제가 다니던 토론토교회 중고등부가 여름수련회를 갔는데 대학생인 제가 그 수련회 인도를 맡게 되었어요. 저는 그 당시에 신학생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목사님이 여름수련회 인도를 저에게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 수련회 기간 중에 정말로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에 제가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됐지만 그래서 이제 목사가 된지 이십년이 됐지만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정말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일어났습니다. 점심시간에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할 때 주님이 주신 예언 그대로였습니다. ‘내가 곧 너를 쓰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역사를 행하게 하기 위하여 기도할 마음을 주신 것인지,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런 역사를 경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도가 없었더라면 그런 역사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 경험의 몇 가지 특징은 첫째는 그의 기도는 일상적인 기도생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기도한 게 아니에요. 질병이 있어서 기도한 게 아니에요. 가슴 아픈 일이 있어서 기도한 게 아니고 기도가 그에게는 아주 중요한 인생의 부분이었기 때문에 습관대로 평소 하던 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역사는 복음 지향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베드로로 하여금 돈을 많이 벌게 하는 쪽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베드로의 어떤 소원을 이루어주는 쪽으로 나타나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쪽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가 우리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다면 복음지향적인 목적을 좇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성령이 필요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고 예수님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을 전하지도 않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하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본인도 예수님을 믿고 남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돕게 하기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복음으로부터 떠나가기 때문에, 복음지향적인 목적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인생 카운슬러 정도로 생각합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하여 최대로 하신 일은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길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할 때에 더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와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본 환상은 베드로 자신의 인생의 인도를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건 평신도나 성직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도하고 복음지향적인 목적을 가지고 살기만 한다면 배가 고플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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