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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8) (욘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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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8) (욘 4:1-5)

: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 둘이 있는 집안의 맏이였습니다. 맏이는 맏이다웠습니다. 아버지에게 성실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는 것이라면 한 번도 거역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즐기기 위하여 아버지를 속이거나 무엇을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참으로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늘 아버지의 속을 썩였습니다. 급기야는 아버지의 재산을 반절이나 축냈습니다. 소식에 의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며 써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때도 맏이는 아버지 머물러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관리하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맏이는 남들이 볼 때에 완벽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던 날, 맏이는 자신의 생각과 아버지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온 둘째를 위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먹고 즐겼습니다. 무슨 자랑거리라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습니다. 도무지 맏이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돌아오던 맏이는 드디어 폭발하였습니다. 분노하였습니다. 맏이는 아버지께 대들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서 맏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와 말씀 듣는 것을 그들은 못마땅하게 여겨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가까이하셨다고 시비 거는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맏이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요나가 바로 ‘요’, ‘나’라는 사실을 자주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께 분노하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위하여 잔치하는 아버지에게 분노하였던 맏이처럼 또 그렇게 분노하는 또 한 사람을 봅니다.
  

I. 분노 

오늘 말씀에서 누가 그렇게 분노하고 있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 여기에서 ‘싫어하다[[['r/라아]’는 말은 본래 ‘상하게 하다’, ‘박살내다’는 것입니다. 싫어했다는 말은 좋지 않게 여겼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요나의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한껏 기대했던 니느웨의 멸망이 하나님의 자비로 한 순간에 깨졌습니다. 요나의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성내다[hr;j;/하라]’는 몹시 뜨거워지는 현상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열 받았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기대가 깨어져 실망한 마음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는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습니다. 노하였다는 말은 ‘빨갛게 되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즉 얼굴이 붉그락 푸르락 하였다는 말입니다. 

요나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화가 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려던 것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것이 요나를 화나게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용서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몹시 화가 난 적은 없습니까? “아니 어떻게 저런 인간이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연중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무엇이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였습니까?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a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도’라는 단어는 ‘판단하다’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지금 요나는 자신의 뜻을 몰라주고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심한 충격을 받은 사람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아! 이것을 아닙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하며 부르짖는 모습이 다름 아닌 요나의 모습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는 비아냥거림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에 도망하였으나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두 번째 말씀에 순종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사명을 분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자주 후회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한 옳은 일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을 후회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선을 베푼 것을 후회합니다. 어떤 사람은 올곧게 바르게 산 것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후회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주신 사명을 감당한 것이 아닙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전도한 것을 후회하는 분이 계십니까? ‘왜 내가 저런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했나?’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무엇이 부족하여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허리를 구부려야 하는가?’하는 분이 계십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한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후회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한 일은 모두 그냥 두고 이 땅을 떠납니다. 단 가지, 다른 사람을 구원하여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 가는 것을 빼놓고 말입니다. 우리는 함께 천국에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을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명으로 감당한 것은 감당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여야 합니다. 후회 없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또 요나는 무엇에 그토록 화가 났습니까?

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2b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자신이 도망친 이유를 변명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3. 하나님의 성품에 분노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에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적인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저런 것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실 수 있는가?”라며 분노합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자들에게 자비를 내리실 수 있는가?”라며 분노합니다. 

이제는 잊힌 사건이 되었습니다만 1994년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위 지존파 사건입니다. 이들은 토막살인 뿐만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신체 일부를 조리해서 먹는 충격적인 행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죄의 대가로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국민일보에 ‘사랑의 편지에 지존파 회개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교회에 50이 넘은 집사들로 구성된 ‘전도 특공대’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영혼만이라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모임을 결성하고 밤을 새워가며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끈질긴 사랑과 수 십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래서 지존파 중에 한 사람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법정에서의 거만스런 제 행동을 지켜보셨을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절대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일 줄 몰랐습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 자기 한 몸 살아가기도 바쁜데 제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마의 대리인”(김OO드림)

이 신문 기사로 전혀 다른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끔직한 짓을 한 놈들도 회개하면 천국에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싸구려 종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회개는 그들의 범죄로 희생된 분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으로 용서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용서되어도 가슴으로는 용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에 사람이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심에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나님께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분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반항하였습니다.
  

II. 반항 

분노가 마음의 차원라면 반항은 행동의 차원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에서 지나쳤습니다.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무엇이라고 하나님께 반항하였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당장 거두어주시라고 요구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목숨까지 걸면서 니느웨의 구원에 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이것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인간으로써 할 수 있는 최대의 불평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1. 자신의 생명을 내걸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이 누구의 것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다고 모든 것이 내 것입니까? 하나님께 생명을 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막가는 인생입니다. “나를 죽여요! 내 말 안 들으려면 날 죽여요.”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너 살고 나 살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안 될 때 “너 살고 나 죽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여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너 죽고 나 살자”는 이기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런데 “너 죽고 나 죽자”는 파괴적인 태도도 있습니다. 요나가 취한 태도는 자신이 죽어 니느웨가 멸망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데 목숨을 걸어야지 멸망시키는데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대어드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여기서 성을 냈다는 말과 1절에서 ‘노’하였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오른 것을 보시면서 부드럽게 주의를 주십니다. 이것은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는 책망입니다. 이것은 “아니,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화를 내느냐?”는 타이름입니다. 이것은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모르겠느냐?”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의 분노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5a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요나는 하나님의 타이르심에 행동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가서 앉았습니다. 이런 행동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훈계가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훈계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훈계에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이미 수 년 전부터 초등학교 교실에서 조차 교사의 학습지도에 반항하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나무라는데 학생이 식식하면서 눈을 아래로 떴다 위로 떴다한답니다. 이것은 고등학교 교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초등학교 교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훈계에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부모가 이야기하는데 자식이 방문을 탁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이야기를 잔소리로 알아듣고 귀를 eke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주소에 대한 이런 저런 걱정 섞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하나는 교회에서 징계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징계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교회는 징계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몰매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훈계와 책망도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 아픈 마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반항하여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뛰쳐나간 요나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니느웨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습니다.

요나는 이 와중에 자기를 위해서는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어떻게 하시는지 한 번 보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렸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회개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지 않으셨으니 자신의 기도에 또 하나님이 마음을 돌려 저주를 내리시지 않을까 기다려 보겠다는 것입니다. 40일이 지나면 멸망하리라고 하였으니 40일을 기다려 볼 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기전으로 초막을 짓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끝장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니느웨 백성은 멸망에서 구원받아 기뻐하고 있는데 요나는 혹시나 하고 멸망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온 것을 기뻐하시는데 요나는 멸망을 기다립니다.


3. 도시의 멸망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요나의 완악함, 아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완악함의 극치를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함께 사는 길보다는 자신만 사는 길을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망하면 다른 사람도 함께 망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우리를 직시하여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희망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을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심으로 온 세상을 죄를 짊어 지셨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는 길은 어떤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어 들이고 예수님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함께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꿈에라도 함께 죽는 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담에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을 하고서 도리어 성을 내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는 짓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차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평과 원망에도 참으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시비를 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의 문제는 다름 아님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로 대하셨는가를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향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질투하며 자신의 의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무런 의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웃의 영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저 자신을 향한 외침입니다! 정말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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