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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의 완성자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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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완성자 (마 5:17-20)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학교를 갑니다. 가방을 메고 “엄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아이를 붙잡고, “애야, 길을 건널 때에 그냥 가지 말고, 파란 불인가를 확인하고, 차가 오는가 안 오는가 하는 것을 잘 보고 오른 손을 들고 건너야 한다. 가다가 동네 어른들 만나면 인사 잘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 잘 듣고,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고, 학교 끝나면 다른데 한 눈 팔지 말고 즉시 집에 와야 한다. 알았지? 어이구, 내 예쁜 자식!”, 엄마의 말을 잘 듣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며 집을 나서는 아이가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중학생으로 훌쩍 커버린 아이를 붙잡고 “애야, 길 건널 때에 좌우를 잘 살피고 건너고, 동네 어른들한테 인사 잘하고,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하고 싸우지 말고--- 알았지!”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고분고분하게 듣던 아이가 “알았다니깐!” 하고 신경질을 부리면서 집을 나섭니다. 엄마는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전에는 그렇게 말을 잘 듣고 착하던 아이가 왜 저렇게 엄마에 대하여 반항하는 아이가 되었을까?”, 그러나 당연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에 할 이야기를 훌쩍 커버린 중학생, 고등학생에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어른이 되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병들어 누워 계신 어머니께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고 “애야 차조심 해야 한다. 회사에 가서 윗사람들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부하 직원에게 잘 대해 주고.... 알았지!” 방금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학교에 보내고 어머니께 왔는데 어머니께서 다 큰 자식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자식들이 이렇게 항상 철없는 아이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과 함께 성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전13:11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는 말씀처럼 장성하여 자기 스스로, 혼자 알아서 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법에 의하여 세워집니다. 우리에게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법을 만드는 입법부가 있고,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가 있고, 법을 세워 나가는 행정부가 있습니다. 어떠한 사건이든지 ‘무슨 법, 몇 조, 몇 항’하는 법조문으로 심판을 받음. 법의 적용을 통하여 국가의 기강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나갑니다. 

이미 오랜 전에 민주주의가 발전한 영국에는 우리처럼 법조문이 없습니다. 법조문이 없는데도 국가의 기강과 사회의 질서가 우리보다 더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법이 있긴 하지만 우리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법은 성문법입니다. 글로 쓰여진 법만이 법입니다. 글로 쓰여진 법으로만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법은 불문법입니다. 법조문이 없습니다. 글로 쓰여진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법의 정신이 있습니다. 국가의 정의를 세우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법조문이 없어도 법의 정신과 전통을 가지고 정의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세워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하나부터 백까지 일일이 법조문으로 정의를 말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형법 제24장 제250조를 보면, ‘①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②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는 이러한 법조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국에서는 마음대로 살인을 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법조문이 없어도 질서가 세워진다면 그것이 더 성숙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1. 예수께서 말씀하신 율법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서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신 다음, 시내산에서 규범을 주시면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외우십니까? 십계명을 쉽게 외우는 법이 있습니다. 

(일) = ‘일;절 나 외에는 다른신을 두지 말라’,  
(이) = ‘이:상한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삼) = ‘삼: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사) = ‘사:업을 하더라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오) = ‘오:마니와 아부지를 공경하라’,  
(육) = ‘육:혈포로 살인하지 말라’,  
(칠) = ‘칠:보단장한 여인과 간음하지 말라’,  
(팔) = ‘팔:로 도적질하지 말라’,  
(구) = ‘구:차한 변명으로 거짓증거 하지 말라’,  
(십) = ‘십:원이라도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은 율법이고, 또 구약의 율법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러나 십계명이 율법의 전체는 아닙니다. - 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모세오경에 국한시켜 생각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물론 이 모세오경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보면 좀 더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많은 규범과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속에는 십계명도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말하는 제사법도 있고, 안식일에 대한 법, 몸을 정결케 하는 정결예법, 생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활법, 등,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2.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의 기준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날 우리는 바리새인하면 굉장히 나쁜 사람들인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시에 이 바리새인들은 도덕적으로 대단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교회를 출입하는 대부분의 신자들보다 이 바리새인들이 훨씬 더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는 것이 형식적 의요, 이기적인 의요, 종교적 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추구하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려고 의식적 의를 추구했고, 이기적으로 자기 자랑을 위한 의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마23:27) 외식적 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형식적인 의가 많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일 성수도 잘 하고, 헌금도 잘 드리고, 봉사도 잘 합니다. 적어도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괜찮은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원망과 불평이 있고, 정욕에 불타고, 미움이 자리하고 있고, 온갖 불의한 것들이 가득 차 있다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3. 우리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의 수준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7~18절) “...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의는 최소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서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곧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완전케 하려 함이라), 이를 넘어서서 완성시키는(다 이루리라)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도대체 이것이 가능합니까? 인간이 과연 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 이것은 두 가지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죄값을 지불하심)을 믿음으로 법률상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롬3:24)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그 순간부터 의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좇아,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살게 될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다시 정리하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좇아 삶으로 온전케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부터 구체적인 율법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모든 말씀을 다 지켜서 의로워지려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을 때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단 2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은 구약의 율법들을 무시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가지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식일 법,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안식일 법을 말씀하셨고, 음식 먹을 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아 정결예법을 어겼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더러운 것은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 즉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학생의 책상 위에 표어가 붙어 있습니다. “구구단을 외자, 부모님 심부름을 잘 하자.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언젠가 그 표어를 떼는 것입니다. 표어를 떼었다고 구구단을 모르는 것입니까? 부모님 말씀을 안 듣는 것입니까?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까? 아이가 자라면서 이런 표어가 없어도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사마다 여러 가지 규정들을 정해 놓았습니다. ‘지각하지 않기’, ‘좋은 말하기’, ‘종이컵 안 쓰기’, ‘복사할 때에 종이 아껴 쓰기’, ‘능동적으로 일하기’, 등등... 

그러나 어떤 회사에서는 이러한 복잡하고 많은 규정들이 없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합니다. “우리 모두 회사를 사랑합시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마다 “성수주일을 합시다. 예배 시간에 늦지 맙시다. 옷을 잘 입고 옵시다. 십일조 생활을 합시다.”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목사님께서 야단도 치고, 잔소리도 하십시오” 하고 말하는데 야단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잔소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딱 한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으면 이 모든 일들이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이 율법의 조문들을 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을 하시는데 이보다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방금 전 289장 찬송을 불렀는데 5절까지 부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누가 부르기 힘들게 이렇게 5절까지 만들었는가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찬송이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언제 끝나나’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다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달리 보십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모아 드린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형식적인 의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입니다.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위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앞에 순종하고 따를 때 그 성령님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놀라운 삶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형제들끼리 화목하고, 교우들끼리 서로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주중에는 웨슬리회심 기념성회를 우리 교회에서 가졌습니다. 시간시간 은혜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강사 목사님을 통한 성경 말씀에서 또 새롭게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기도도 뜨겁게 하게 되었고, 또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또다시 확인하고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과거에 부흥회에 은혜받는 것이 좋아서 쫓아다니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면 신앙생활에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형식적인 그리스도인,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는 쭉정이 같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이웃 사랑의 열정이 가득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러한 사랑과 열정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축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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