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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지한 교제가 만들어 가는 역사 (히 10: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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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교제가 만들어 가는 역사 (히 10:23-25)


이스라엘의 사상가요 민족운동가였던 마틴 부버는 인간을 두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하나는 '나' 중심의 인간이고, 또 하나는 '나-너'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나' 중심의 인간은 경쟁과 성공 중심의 오늘 이 시대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인간형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모든 중심에 자기가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공과 성취만이 인생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도 수직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논리와 관점에 들어오도록 고집하기 때문에 타인의 이야기에 경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전반은 성공과 성취로 인해서 그럴듯한 삶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은 매우 황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지한 교제와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너'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관계 중심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결코 일방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습니다.  자신보다는 언제나 공동체와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상대방이 가진 개성이나 독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대화를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만남입니다.  너와 내가 만나서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삶은 만남에서 시작이 됩니다.  너와 나와의 만남이 바로 인생의 시작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만남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만남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축복된 만남이 소중한 것입니다.  나 중심의 인간관으로는 결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만남에서 인생의 성숙을 배워갑니다.  우리는 만남에서 기뻐합니다.  우리는 만남에서 사랑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만남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멸망합니까?  진실된 만남이 없기 때문에 망합니다.  우리는 왜 슬프게 삽니까?  만남의 상처 때문에 슬퍼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좋은 만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 좋은 사람, 좋은 작품, 좋은 시대, 좋은 지도자, 좋은 나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을 만들고 있습니까?  후회 없는 아름답고 좋은 만남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만남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같이 귀한 만남이 살인으로 끝난 때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예수님과 같이 소중한 만남에서 시작했다가 배신으로 끝난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만남입니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만남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좋은 만남도 있습니다.  청년 인생의 나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늘의 열쇠를 받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만남도 있습니다.  젊은 혈기에 사로잡혀 험악한 삶을 살던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한 평생 귀하게 쓰임을 받은 만남도 있습니다.  수직적인 만남도 있고 수평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축복된 만남도 있고, 불행한 만남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깊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피상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한 번의 만남으로 영원한 인연을 맺는 그런 복된 결과를 맞는 소중한 만남도 있지만, 수십 번 수백 번을 만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만남으로 끝나버리는 그런 만남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에게 복을 준다고 할 때에 제일 처음에 주는 복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만남의 기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남이라는 기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내 인생을 바꾼 그 한 번의 만남,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그 소중한 만남의 사건.  부모를 만나고 자식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부부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나라를 만나고, 국가를 만나고 우리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주의 전을 만나고, 언양영신교회를 만나고, 목회자를 만나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 모든 만남은 모두가 하나님의 깊은 은혜입니다.

살아가면서 이 만남의 관계가 원만할 때에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만남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에 인간은 불행해 지기 시작합니다.  만남이 단절될 때 우리는 고독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만남이 없는 고독처럼 삶의 시련과 십자가가 또 있겠습니까?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고독은 절망으로 이끄는 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를 가리켜서 소위 me-generation의 세대라고 말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아주 지극히 이기적인 세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만남이라는 것은 아주 피상적이고 형식적이고 감각적인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1세기를 살았던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하면 놀랍게도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타인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깊은 내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인생에 깊은 소통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를 향한 돌봄의 섬김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 교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운 교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바꾸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바른 만남은 삶에 위대한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본문은 1세기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극심한 핍박에 직면하기 시작하면서 아주 추웠던 역사의 환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당시의 극심한 박해를 알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소망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소망은 오직 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흔들리게 하는 어떤 사건이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잘 모이든 그들이 더 이상 모임을 기피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더 이상 교회에서의 모임과 성도들의 교제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성경의 기자를 통해서 바로 이 말씀이 주어집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예배와 교제를 위한 모임을 폐하지 말고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일 때마다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핍박 때문에 모임이 어려웠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적어도 신앙의 박해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리가 모임을 기피하는 이유는 지나친 세속화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는 진솔한 교제를 기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직도 믿음의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는 우리의 삶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기적의 마당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름답고 진지한 성도의 교제가 만들어 가는 역사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성도들과의 진지한 교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역사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도들과의 진지한 교제는 사랑의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지한 교제가 있는 곳에 사람들은 사랑의 눈을 뜹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제라고 하면 내 마음이 통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교제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내가 진지한 교제를 시작하면 그 대상을 사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랑보다 교제가 먼저 앞선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여기 본문에 사용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냥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라 희랍어의 아가페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깨뜨리고 이웃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사랑, 그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값싼 감상이 아닌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려는 교제의 노력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것과 상관없이 베푸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나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어떤 낯선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진지한 교제의 노력만이 이런 사랑의 기적을 가능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기적을 증언하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한 사람으로 헨리 나우웬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신학과 심리학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 있는 장애인 몇 사람이 살고 있는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가서 장애인들을 섬기는 삶을 시작합니다.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은 헨리 나우웬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세계적인 천재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포기하고 이런 소수의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자 하는 그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20대 후반의 아담 아넷트라는 한 정신지체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막대한 시간을 보내는 그를 보면서 심지어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꼭 그래야만 했습니까?  하버드에서 위대한 천재들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당신이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접고 여기에 와서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이 말 속에는 물론 장애인들을 섬기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것이 자기 인생을 투자할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일이냐고 그에게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한 정신지체장애인일지 모르지만 나는 내 앞에 있는 아담이라는 친구를 통해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는 권세와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신 그 예수님을 바로 이 아담이라는 친구를 통해서 저는 새롭게 만나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 아담을 보십시오.  이 친구에게는 여러분과 같은 마음의 산란함이 없습니다.  집착도 없습니다.  탐욕도 없고, 욕심도 없습니다.  나는 처음에 내가 이 친구를 돌보고 섬긴다고 생각을 했는데 어느 한 순간 나는 이 친구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가 나의 스승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가 나의 작은 예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헨리 나우웬이 돌보던 아담 아넷트는 서른 네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섬겼던 이 사람이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그 광경을 보면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아담 아넷트, 그는 저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특별한 메신저로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주신 사람이다."

사제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숨겨진 어두운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치유하고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 사람, 그는 이제 자기의 사명을 마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는 이 거룩한 죽음의 신비 앞에서 아담을 통해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고 감사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진지한 교제가 만들어 가는 역사입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교제가 아니라 깊은 인간의 내면을 통해서 사람을 만날 때 경험하게 되는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나우웬이 경험한 이 내용을 쓴 것이 "아담"이라는 책입니다.  부제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의 끝마무리 부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듣고 읽었지만 나는 그분에게 손을 대거나 그 분을 직접 얼굴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있는 아담이라는 이 친구에게 손을 댈 수가 있었고, 그를 볼 수가 있었고, 그에게 다가갈 수가 있었다.  그를 목욕시키고 면도시키고 그의 이를 닦아줄 때 나는 육체적으로 그를 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안마를 해 주고, 체조를 시켜주고, 수영장과 목욕탕에서 그의 곁에 앉아 있으면서 우리는 그를 만졌다.  그의 부모도 그를 만졌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식구들 머레이, 케시, 부르노도 그를 만졌다.  그것이 우리가 한 일이었다.  그를 만진 것!  그런데 그를 만지는 순간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리라.'  우리는 이 친구 아담에게 손을 댄 모든 사람마다 자기 인생에 어느 부분인가가 온전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아담이 우리 모두를 치료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제의 기적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제는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더 여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제하면서 서로가 온전해집니다.  서로가 진지하게 교제를 하면서 서로가 깊어집니다.  그리고 서로가 온전히 세워져 갑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교제가 만들어 가는 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기적인 것입니다.  이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주님이 가르쳐주신 아가페의 사랑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함께 이런 주님의 사랑 앞에 눈을 뜨는 교제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세워 가는 귀한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과의 진지한 교제는 선행의 기적을 만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힘들고 어려운 핍박의 때를 지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
여기에 보면, 사랑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인 선행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누누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강조하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선의 선행도 하나님 앞에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행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증거로 구체적인 선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선행이 따라와야 합니다.  구체적인 선행,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열매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빛이 되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받고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들에게 바로 이 선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자신을 희생하는 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신자들보다 더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더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안고 세상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정말 예수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요구합니다.  이제 선행의 자리에 서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절인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에베소서 2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과 구원받은 목적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것은 선한 일을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한 일 가운데 살아가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강조되고 있는 디도서 2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를 죽여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고백하십니까?  하나님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선한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선한 일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초대 교회가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 보다 크기나 규모는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가 1세기의 시대에 거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밀은 우리에게는 없는 교제가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교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의 교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구절만 보면 오늘 우리들의 교제와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제하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말씀과 성경의 가르침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밥을 먹고 음식을 나누면서 기도도 합니다.  여기까지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이는 식구들 가운데 그들의 필요를 보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재산과 그들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팔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섬기는 선행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내 놓고 이웃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채워주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전적인 희생을 통해서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함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초대교회가 그 당시 세상 속에 던져주었던 놀라운 충격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장 47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핍박만 받은 것이 아니라 칭송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초대교회가 당해야만 했던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의 교인들은 핍박은 없지만 비난은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진지한 섬김과 자기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인들은 너무 똑똑해서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따지기만을 좋아하는 교인들, 그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숨막혀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당시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들은 확실히 우리와 다르다."  그들도 부인할 수 없는 삶의 특징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제 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일으키고 있었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선행의 카테고리를 불쌍한 이웃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차원에만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미 헨리 나우웬이 섬겼던 아담이라는 한 청년의 경우를 통해서 본 것처럼 우리가 교제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세우고, 서로가 서로를 영적으로 격려하면서 마침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선한 삶의 궁극적인 그림인 것입니다.

이런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시편 기자는 133편 1절에서 이렇게 찬미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들의 교제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어찌 그리 선한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서 보시고 싶어하시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우리 피차가 피차를 서로 돌아보면서 함께 사랑을 나누는 모습, 그리고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서 기대하시는 선한 교제의 그림인 것입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는 인간의 사귐과 진지한 교제가 가져오는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를 음미하면서 진지한 교제가 주는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에는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만남의 아름다움을 절묘한 꽃의 언어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세대에는 히스코모리의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혼자 집에 기거하면서 밖에 안나오는 은둔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만남이 단절된 인생입니다.  교제가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코모리 신앙.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은 하는데 성도들과의 진지한 교제가 없습니다.  그가 교회에는 나오지만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교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와 교회에는 다수의 군중들 속에 파묻혀서 조용히 바람처럼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바른 사회생활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지한 교제가 없는 인생은 더 깊은 상처와 고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는 짧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달팽이처럼 혼자 꽈리를 틀고 앉아 있지 마시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험한 나그네 인생 길을 혼자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함께 가십시오.  혼자 가게 하지도 마십시오.  함께 가 주십시오.  인생은 함께 갈 때 아름답습니다.  인생은 함께 있어 줄 때 행복합니다.  건강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웃과의 진지한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의 소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만나고 성도를 만나십시오.  우리의 만남이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만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을 타인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깊은 내면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인생에서 깊은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사랑으로 서로를 향한 돌봄의 섬김을 시작하십시오.  만남의 교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십시오.  성도와의 아름다운 교제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의 이러한 진지하고 아름다운 교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기적을 가져올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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