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삼상 2:1-10)

첨부 1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삼상 2:1-10)


제 아들 영은이가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이 아이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밥을 먹을 때마다 "감사합니다."라든지 "Thank you, mom."이라고 인사를 하면서 식사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났을 때에도 또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일어났는데, 아마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던 것 같았습니다.
  
하여튼 부모 입장에서는 매우 가슴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여름방학 때에 할아버지 집으로 와서 식사할 때에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제 어머니께서도 "영은이 걔는 밥 먹을 때마다 꼭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먹더라."고 아주 대견스러워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아주 어릴 때의 아이란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요구 사항이 이루어지면 자기 혼자 좋아하고 만약 거절당하면 화를 내고 불만에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마음이 좀 성숙하게 되면, 부모가 해 주는 일에 고마워할 줄 아는 수준으로 자라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식탁에서 하는 간단한 인사말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한 단계를 보여 주는 일이기 때문에 부모에게는 아주 기특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자세 역시 바로 그런 단계들이 있습니다.
아주 초보적인 신자는 하나님을 대할 때 오로지 무엇을 달라는 요구밖에 할 줄 모릅니다.
즉 그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저 하나님께 '떼쓰기만 하는' 수준인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성장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온갖 사랑과 은혜들에 대하여 감사드릴 줄 알게 되며, 그 감사의 양과 질이 점점 더 진보하게 됩니다.
그처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더욱 성숙하게 된 신자는 이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자체로도 마음이 기뻐지고 그럴 때마다 절로 찬송이 터져 나오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가 바로 그런 신자였습니다.
2장 1절에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는데, 그 기도의 내용과 분위기는 앞서 1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때는 아들을 주십사는 간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렸지만, 이제는 자신의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가운데 뜨거운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2011년 상반기를 보내고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은 우리 기독신자의 '감사드리는 마음'이 어떻게 성숙해 나가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은혜'를 필요할 때마다 베풀어 주심에 대하여 꼭 감사드려야 합니다.

1절로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아들을 얻었기' 때문에 기뻐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아들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할 줄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한나가 받은 무척 소중한, 아주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뿔"은 '힘' 혹은 '자랑거리(pride)'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뿔이 높아졌다는 말은 그녀가 아들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전의 수치에서 벗어나 이제 한 여자로서 '영예로운 위치'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입"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리게 되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서, 전에 자기를 멸시하던 여인 브닌나 같은 자들 앞에서 이제 당당히 나서서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바로 이와 같은 "주의 구원"을 체험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구원'이 아니라, 그녀가 무자(無子)한 가운데서 당하고 있던 온갖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한나가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간절히 기다려왔던 바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매우 특별한 구원이었고, 따라서 한나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제일의 감사 제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특별은총을 체험한 한나는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새삼 진심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하면서 "여호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습니다", "주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이 없습니다."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고백했던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그처럼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을 수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에게 변함없는 구원주가 되심을 찬양드린 것은 실로 뜨거운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어 주셨을 때, 한나의 원수들은 그 앞에서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브닌나가 한나에게 했던 "심히 교만한 말"이나 "오만한 말"들은 "행동을 달아 보시는" 하나님께서 대신 처리해 주셨습니다.
여기 "지식의 하나님"이란 사람의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서 필적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최고의 지식을 발휘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판사, 기자, 정치가들이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수준은 결국 '우물 안의 개구리'들의 소견에 불과한 것이며,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지식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한나는 바로 그런 지혜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와 자기 원수의 행위를 비교해서 '달아 보신' 후에 전적으로 자기편을 들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이 '특별한 은혜'를 가슴 속 깊이 감사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아이가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가장 기초적인 단계도 그러합니다.
매일 먹는 밥상을 대하면서 어머니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수준 높은 것이고, 그보다는 먼저 '특별한 선물'을 받았을 때에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할아버지가 용돈을 주면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면서 받고, 누가 생일선물을 사 주면 꼭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면서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경우에 부모가 곁에 있다가 그 아이가 감사인사를 하지 않으면 "'감사합니다.'라고 해야지."라고 반드시 주의를 주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명색이 교인이라 하면서도 가장 기초적인 감사조차 전혀 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진학, 제대, 취직, 개업, 결혼, 출산 등등 아주 '굵직굵직한 경사'들이 생겼을 때에도 감사헌금을 할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역자가 감사헌금을 드리라고 일깨워 주면 인상부터 씁니다.
자기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 제게 화이트 초콜릿 한 개를 받으면서 감사인사하는 것을 잊어 먹으면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야단을 치면서, 정작 본인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 이벤트'를 받게 될 때조차 아주 태연하게 감사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수준에 이르기 전에 먼저 자기가 받은 '특별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드리는 법부터 익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시고 꼭 필요한 것을 적시적지에서 베풀어 주실 때마다 즉시 감사드리는, 이 '가장 기초적인 감사생활'을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선하게 주장해 주심에 대하여 늘 감사드려야 합니다.

4절부터 8절 상반절의 말씀에 "4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자기 개인에게 베풀어 주신 특별한 한 가지 은혜를 두고 감사드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는 범위를 더 넓혀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기 한 사람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완전히 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광대하고도 선한 섭리를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한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힘의 강약'을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것을 찬송했습니다.
스스로 "용사"라고 교만해 하는 자는 그의 "활을 꺾어" 버리시며, 반면에 "넘어진 자"라도 겸손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힘으로 띠를 띠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즉 사람의 '소유의 많고 적음' 역시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한때 "유족하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품을 파는" 처지로 떨어지게 하실 수 있으시며, 반대로 늘상 "주리던 자"들이 다시는 한 끼도 거르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찬송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라 할지라도 "일곱" 명 즉 '완전수'의 자녀까지도 다산(多産)하게 하실 수 있으며, 반면에 "많은 자녀를 둔 자"라 할지라도 오히려 졸지에 건강이 "쇠약"하도록 만들기도 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21절에서 나타나듯이 한나 자신 역시 그처럼 '자녀 출산'을 당신의 뜻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사무엘뿐 아니라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즉 사람의 '지위 고하' 역시 자유자재로 바꾸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진토"나 "거름더미" 즉 사회 밑바닥에서 살던 자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귀족들과 함께 앉는" 존귀와 "영광의 위" 즉 높은 자리를 얻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능력, 소유, 지위'뿐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생명'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한나는 연이어 찬송했습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즉 각 인간의 생사 여부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음부에 내리게도 하실" 뿐 아니라 그 음부에서 "올리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은 그저 사람을 '언제 어떻게 죽게 하시는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찬송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한나의 기도는 구약 성경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제일 첫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처럼 각 사람의 모든 생사화복, 전 인생의 모든 흥망성쇠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뿐 아니라, 영벌과 영생의 결정권에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만 기억되는 하나님으로 제한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의 희로애락 전체를 구석구석 다 주장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제목이 '자신이 기도한 것에 대하여 응답해 주신 축복'만으로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생(生)'뿐 아니라 '사(死)'를 통하여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당장은 '화(禍)'처럼만 보이는 일을 가지고서도 끝내는 더 큰 '복(福)'이 되도록 오묘하게 섭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매 끼의 식사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었던 제 아들 영은이가 어느덧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해에 저는 경향교회로 청빙을 받아서 영은이만 미국에 남겨 두고 아내와 함께 우리나라로 오게 되었었는데, 그때 영은이가 했던 말 중에 하나가 "아빠, 저를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들은 부모가 자기에게 무슨 '특별한 선물'을 사 줄 때만 아니라 '매일의 식사'를 감사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었는데, 이제는 거기에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지금의 자기를 있게 만든 '성장과정' 전체를 두고 부모에게 감사드릴 줄 아는 아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이 감사하고 찬송드려야 할 하나님의 은혜란 특별한 순간에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자체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주의 크신 은혜'의 연속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전 인생을 통하여 항상 벌어지고 있는 온갖 '생사화복'의 사건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은 미처 생각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완벽한 섭리를 인하여 늘 '범사에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는 하나님께서 '존재 세계의 역사 전체'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심을 두고 또한 크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8절 하반절 이하 10절까지에서 "8b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9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고 한나는 찬송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그 영역과 대상이 이제 최고조에 도달하게 됩니다.
"땅의 기둥들"이란 우주의 구조를 물리적으로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 세계의 원인이 된 기초 작업, 즉 '창조 사역' 그 자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세계를 세우신" 원인자가 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나는 찬송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친히 창조해 놓으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 즉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신자들의 "발을 지키시는" 주권을 행사해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절대로 망할 수가 없으며, 그것이 곧 지금까지 이 세계와 우주가 존속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 똑같은 역사 위에서도 "악인" 즉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들을 "잠잠케 하시며" "산산이 깨어지게" 하시는 심판의 주권을 행사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땅끝까지 심판을 베푸시는" '최후의 심판'으로써 종결될 것이라고 한나는 기도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왕"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란 물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표현 역시 구약에 여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것들 중에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친히 세우신 '왕'이시요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한나는 그녀의 아들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것이며 바로 그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메시아께서 탄생하시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찬송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최대한으로 확대되고 최고도에까지 올라간' 실로 멋있는 찬송이었습니다.
앞서 그녀는 '자기라는 개인'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각 사람의 전 인생'을 두고 하나님께 찬송을 올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기로부터도 또 더 나아가서 '우주라는 시공 안에서 벌어지는 역사 전체'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높이 찬송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실로 그녀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은 이렇게 넓고 이처럼 깊고 이토록 높아졌던 것입니다.

우주는 정말 광대한 시공계지만 그 우주만물 중에 창조주를 찬양할 줄 아는 마음은 오직 사람만 가질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길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절대주권자께 감사드릴 줄 아는 인격은 오직 택함을 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원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지으신 모든 만물이 다 '보시기에 좋으셨지만',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격적인 반응'은 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은 사람만은 그 하나님과 '통하는 심령과 성품'을 발휘함으로써 창조주께서 지으신 것들의 아름다움을 같이 감상할 줄 알고 심판주께서 행사하시는 역사의 공의로움을 높이 칭송할 줄 아는 아주 '특별한 피조물'인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자세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그저 부모가 자기에게 '해 주는 것'에 대해서만 감사드리지만, 자식이 완전히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자기가 고아가 아니라 부모가 있는 아들딸이 되었다는 사실 즉 '자기에게 부모가 계신다는 그 자체'만 두고도 감사드릴 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신자는 그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만을 인하여서 최고의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특권적인 삶을 감사하면서 영위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되심을 인하여,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시간 세계의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전 역사의 심판주가 되심을 인하여, 실로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 세계의 절대주권자' 되심을 인하여 사람이 올릴 수 있는 최고 최대의 감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한나가 자식을 간구할 때의 서원기도는 진실하면서도 간단했지만, 그 기도의 응답을 두고 감사드리는 찬송은 이처럼 뜨거우면서도 풍성한 것이었습니다.
'간구는 길게' 하면서도 '감사는 짧게' 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기도 응답을 받고서도 아예 '감사 순서는 까맣게 잊는' 교인들도 수두룩한 것입니다.

또한 한나의 감사는 그저 아들 하나 주셨다고 좋아하는 정도의 수준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런 감사찬양을 올리는 중에 점점 더 넓어지고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로 시작되었던 것이 '전 인생의 생사화복을 선히 주장해 주시는 섭리'에 대한 감사로 나아갔으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주와 역사 전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자체에 대한 최고의 감사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이런 '감사의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다고 다고 하면서 요구만 하던 마음'에서 '감사를 잊지 않는 마음'으로 자라야 합니다.
부모에게 감사인사라는 것을 아예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사실 어디 '사람 취급'이라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꼭 마찬가지로, 특별감사헌금 봉투만 보아도 벌써 부담이나 반감부터 생기는 교인이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실로 철없는, 아주 못된, 정말 배은망덕한 자녀의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감사 수준도 그저 먹고 살기 위한 것 뭐 하나 받았다고 좋아서 날뛰는 식의 낮은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애가 '우리 아빠가 나한테 새 장난감 사 주셨다.'라고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과 비슷한 '유치한 행동'일 뿐인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 베풀어 주시는 '특별한 은혜'들에 대해서 잊지 말고 감사드리고,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알게 모르게 완벽하고도 자상하게 베풀어 주시는 '선한 섭리'에 대하여서도 늘 감사드리며,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와 역사 전체를 주관하시는 '절대적 주권'만 생각해도 절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감사찬송이 터져 나와야 마땅합니다.
실로 '감사'는 우리 기독신자의 신앙 인격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최고 수준'에까지 이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그야말로 '은혜의 바다', '특권적인 축복의 바다', '온갖 감사 제목들이 차고 넘치는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과 인류와 온 우주를 주장하시는 이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크게, 더 높이, 그리고 영원히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