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크냐 (막 9:33-37)

첨부 1


누가 크냐 (막 9:33-37)

   
4자 성어 가운데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 속으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일컬을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함께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대표적으로 부부는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고, 가족들도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고 있는가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부부가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면, 그 가정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사와 부하 직원이 함께 더불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 더불어 일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 납니다. 사장과 직원이 동상이몽을 한다면, 결코 생산성이 높아질 수 없습니다. 그 회사는 발전할 수 없고, 사장과 직원 모두도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자체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면, 결코 그 신앙생활에는 풍성한 열매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상이몽을 한다면, 아무런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 동상이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동상이몽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바로 잡아주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온전한 사역자로 세움을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끝내셔야 할 때가 오고 있음을 감지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정리하시는 수순을 밟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제자들을 데리시고 한적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처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여행 도중에 갈릴리 지역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에게 다시 두 번째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전도의 본거지였던 가버나움에 도착하게 되셨습니다. 아마도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잠시 머무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뜻밖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가 길거리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까지 오는 도중 제자들이 서로 토론했던 것을 다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내용을 다시금 확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자기들이 나누었던 대화 내용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이 서로 논공행상을 다툰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이제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등극하시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게 될 텐데, 그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생각을 하시면서, 깊은 번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자기들이 크게 출세하게 될 것이고, 이 때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가를 놓고 상념에 빠져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동상이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과 같이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이렇게도 주님과 생각이 다를 수 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십자가를 지실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신데 철없는 제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창 5:24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장의 아담의 족보 중,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였다고 하지 않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했다는 것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녹은 물론이고 창 5장에 나오는 모든 셋의 후손인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에녹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자기 뜻으로 삼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동상동몽”(同床同夢)을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동상이몽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동상동몽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내 뜻 삼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상이몽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들이 주님과 동상동몽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누가 크냐?”라는 질문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되셔서, 그것도 저 십자가 처형을 당할 죄인 중의 죄인이 되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더 작아질 수 없는 아주 작은 자가 되실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누가 작으냐?”라는 물음을 가슴에 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큰 자가 될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들보다 더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누가 크냐?”를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누가 크냐?”라는 질문을 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크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제자들의 마음속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생각이 가득하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온통 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머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린 꼬마들부터 세상 떠날 노인에 까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크고자 하는 마음이 성공과 출세를 위한 동기로 작용합니다. 크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학생들은 밤잠 자지 않고 공부합니다. 크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불철주야 뛰고 또 뜁니다. 그래서 이 크고자 하는 마음은 때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크고자 하는 마음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습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여기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들을 따돌려야 자기가 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협력하기 보다는 시기하고 깎아내리고 다투게 됩니다. 결국 공동체가 갈등에 휘말리게 됩니다.

다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착각하게 만듭니다. 자기의 장점을 부각시키려 하게 됩니다. 과도하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하기 보다는 교만하게 되기 쉽습니다. 결국 자신의 참 모습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은 크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크고자 하는 마음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성 프란시스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 중에 프란시스는 페루기아 호수에 있는 한 섬에 가서 사순절을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하고 작은 배로 자신을 그 섬에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빵 두덩어리를 준비해서 그 섬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40일 이후에 자기를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프란시스가 홀로 그 섬에 남아서 40일 간 기도와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사순절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고 철저하게 금식하며 오직 기도에 힘썼습니다.

약속대로 40일이 되어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이 때 친구는 빵 한 덩어리와 먹다 남은 반쪽 덩어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친구가 찾아오기 직전 빵 반쪽 덩어리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40일 동안 금식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게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시스와 같은 자세가 중요합니다. 아마도 40일 금식을 끝내고자 할 때, 사탄의 시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너는 대단하다. 이렇게 40일을 온전히 금식한 사람이 예수님 외에 또 누가 있겠느냐? 이제 네 친구가 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가 너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서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사탄이 프란시스의 마음을 흔들어 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부추겼을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자신에게 이런 유혹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빵을 준비했고, 40일 금식을 다 해놓고도 마지막 순간에 빵 반쪽을 먹음으로써 자신의 금식을 숨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크고 싶어 하는 마음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프란시스와 같은 사람들은 “누가 크냐?”라는 질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크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누가 크냐?”는 식의 다툼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주님과 동상이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작은 자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크냐?”라며 다투고 있던 제자들에게 뜻밖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를 품에 안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서 어린아이는 작은 자를 대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는 사람 수에 들지 못했습니다. 아직 사람 이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제대로 대접 받지도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따뜻하게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더더욱 저들을 예수님 대하듯 대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크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작은 자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커 가는 과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기들이 커 가는 과정에 수단으로 이용될 존재로 여겨지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들을 존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누가 크냐?”며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영접하듯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들을 예수님을 맞을 때와 같은 마음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듯이 섬기라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중국선교여행 도중 정안덕 박사가 운영하고 있는 “애심원”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정안덕 박사는 이력이 독특한 분이십니다.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카나다로 유학을 하여 신학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중국선교를 할 생각으로 카나다 시민권을 받은 뒤, 중국 북경대학에 유학을 했습니다.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북경대학에서 교수로 북경대 철학원 연구원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중국기독교역사를 연구하여 귀한 연구업적도 쌓았습니다. 앞으로 중국에서 교수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북경에 살면서, 버려진 중국 장애고아들을 돌보게 됐습니다. 그러다 그 아이들을 아예 입양하여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장애복지 수준이 아직 걸음마 단계여서 북경에서 중국장애고아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을 찾아주고자 발 벗고 나섰습니다. 그러다 아무리 생각해도 북경이라는 대도시에서는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중국의 오지인 계림지역에 땅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 지역사회의 양해와 당국자들의 도움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인근 학교에서 이 아이들을 학생으로 받아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사하면서 북경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온전히 이 아이들 양육에만 헌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심원이라는 집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며칠 함께 있으면서 이 아이들을 친 자식처럼 양육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정박사님은 전도유망한 학자이고, 얼마든지 크게 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이 아이들 양육에 남은 생애를 다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어찌 보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어 보이는 이 일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의 모습 속에서 어린아이를 주님처럼 영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이분의 마음속에는 정말 “누가 크냐?”라는 질문은 추호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주님과 동상동몽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작은 자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대하듯이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누가 크냐?”는 식의 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상이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눅 4:11의 주님의 말씀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낮아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주님께서 높여주시고, 자기를 높이려는 자를 주님께서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작은 자들을 주님 대하듯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들을 크게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면서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은 고난을 생각하시는데 자기는 영광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상이몽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누가 크냐?”라는 물음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크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작은 자들을 주님 대하듯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