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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품을 것인가? 세상에 빠질 것인가? (요 17: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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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품을 것인가? 세상에 빠질 것인가? (요 17:14-19)
 
지난 월요일(6.27) 경기대 총장실에서는 경기대와 지구촌 교회가 상부상조하기 위한 업무 협약 양해 각서 체결식(M.O.U)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 지역 교회와 지역 대학이 서로를 돕기 위한 이런 체결식은 이 땅에서 최초의 사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결식 이상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 문자 그대로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믿습니다. 

이 땅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이후 교회가 이 세상을 바라보며 가진 가장 중요한 질문은 과연 교회와 세상, 성도와 세상의 바림직한 관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선교학에서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세상을 품고 세상의 변혁을 위한 선교적 노력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가르쳐 ‘월드 크리스쳔’(World Christian)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영어의 ‘세상’을 뜻하는 ‘world’라는 단어에 ‘ly’라는 어미를 첨부하면 ‘월들리’(worldly)가 되어 ‘세속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월드 크리스쳔’하면 좋은 의미로 ‘세상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월들리 크리스쳔’(Worldly Christian)하면 안 좋은 의미에서 ‘세속적인 크리스쳔’이라는 뜻이 됩니다.

성경은 세상을 향한 소극적 태도로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고 그런 세상에 빠져 사는 그리스도인들, 세상과 구별이 안 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우리는 세속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삶의 길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세상의 변화, 이 세상이 더 밝고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 위한 세상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을 따라올 제자들이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살아주기를 기대하며 당시의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이 땅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요한 17장 전체를 가르쳐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세상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라이프스타일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라이프스타일-무엇입니까?

1.세상에 빠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본문 15절의 예수님의 기도를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님이 이런 기도를 하시게 되었을까요? 당신의 제자들 중에 제자라고 하면서 세상의 악에 빠져 살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룟 유다가 돈의 악에 빠져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본문 요17장 12절은 정확하게 유다를 마음에 두시고 한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멸망의 자식이 바로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는 은 삽십량이라는 돈의 유혹에 빠져 스승을 파는 악에 빠졌던 것입니다. 돈의 유혹에 빠져 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전6:10에서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경계하십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바울 사도도 자신을 따르던 한 제자의 배신을 말하며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딤후4:10입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러면 성경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계할 때의 이 세상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요일2:15-16의 말씀이 그것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 세 가지가 강조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성도를 파괴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세 가지 무기입니다. 에덴동산에 첫 사람을 찾아온 유혹자 마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여 주며 첫 사람 아담이 무엇을 느끼게 했습니까? 먹음직하고-육신의 정욕이지요. 보암직하고-안목의 정욕이지요. 그리고 지혜스럽게 할만큼(네가 하나님이 되리라) 탐직-이생의 자랑(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높이고 싶은 교만, pride of life)이 아닙니까?

공생애 사역의 준비를 위해 광야에서 금식하던 예수님을 찾아온 유혹자 마귀가 예수님에게 사용한 무기도 정확하게 이 세가지였습니다. 금식으로 굶주리고 계신 예수님에게 “이 돌들을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의 정욕을 자극한 것입니다. 다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절만 하면 다 주겠다고 합니다. 안목의 정욕을 자극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다음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려 보라고네 발이 땅에 닿기 전 천사가 네 발을 들어 올리는 기적을 연출하면 넌 내일 모든 조간신문에 네 이름이 날 것이라고이생의 자랑을 자극한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가치는 탐욕과 쾌락, 허영과 교만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적절한 소유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탐욕이 되지 않도록 과도한 소유를 경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정당한 즐거움, 오락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그것은 악한 쾌락으로 변신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은 정당한 자기 명예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명예의 가치는 재산의 가치보다 더 크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자기 이름을 선전하고 자기 주가 올리기에 급급하다면 이미 그 사람은 이생의 자랑에 빠져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린 세상에 빠져 사는 자는 아닌지요? 

이런 세상의 그릇된 가치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길은 말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4:4)고,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14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로 이 세상의 세속성을 극복하도록 주신 최고 최선의 선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삶이 없이 세상을 이기는 왕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박해와 종말의 시간을 살아갈 성도들에게 계1:3에서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을 붙들고 제발 세상에 빠지지 마십시오.


2.세상을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세상을 거부하는 것은 주님이 가르치신 제자의 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되 세상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과거 교회 역사를 보면 세상에서 죄와 악을 피하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가는 이들에게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됩니다.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많이 있지만 세상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본 수도원주의나 도피주의, 신비주의는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거부하고 피해 산다면 어떻게 주님이 가르치신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세상은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세상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래전 공장에 다니는 자매님과 상담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직장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욕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근무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이야기 끝에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그 곳이 어둡고 썩어 있기 때문에 그 곳에 자매님 같은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한줌의 소금이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보았나요?” 한참을 생각하던 자매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기도하고 적응해 보지요”하고 갔습니다. 

그 후 그 자매는 예수 믿는 친구들과 신우회를 만들어 그 직장에서 정말 빛과 소금의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지만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 한국 땅에 있는 주한 미 대사관 근무자들은 한국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한국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국 땅을 떠나려 하면 그들은 그 순간 사명을 잃은 자가 됩니다. 그들은 한국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국에 속한 자로 미국의 이익과 정신을 이 땅에서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대변하고 실현해야 할 자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르쳐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세상보다 좀 더 의롭고 세상보다 더 평화롭게 세상보다 더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세상과 다른 것이 없고 세상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면 세상에 기여할 것도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혹은 교회로 올 것을 기다리는 자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으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예수의 제자를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우리 교회가 경기대와 MOU를 체결한 것이 정말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왕국을 넓혀가기 보다 세상의 미래를 결정할 젊은이들이 연구하는 상아탑 한 복판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한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 그 상아탑 한 복판에서 진정 우리가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그들과 달라야 하고 더 나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품고 사는 성도답게 말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 교회를 방문하실 기독교 사상가 달라스 윌라드 박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첫 번 외친 메시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정말 이해하기 위해서 이렇게 바꾸어 읽어보자고 제안합니다. “회개하라 전기가 가까웠느니라” 전기가 없던 어둠의 시절, 이 말씀이 던질 충격을 생각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 전기가 우리의 모든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은 것을 생각해 보라고. 그것이 바로 세상을 품고 빛으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방식인 것입니다. 

최근 제 트윗에 이해인 수녀시인의 시 한편을 올렸습니다. 나는 이 시야말로 세상 한 복판에서 삶을 사는 세상과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맑게 더 맑게, 샘물처럼/웃음을 밝게 더 밝게, 햇님처럼/눈길을 순하게 더 순하게, 호수처럼/사랑을 넓게 더 넓게, 바다처럼/기도를 깊게 더 깊게, 산처럼/말씨를 곱게 더 곱게, 꽃처럼” 몇 가지만 더 첨부한다면 “

삶의 걸음을 바르게, 더 바르게, 대로처럼/관계를 평화롭게 더 평화롭게, 숲속가든처럼/생각을 상쾌하게 더 상쾌하게, 계곡처럼/태도를 따뜻하게 더 따뜻하게, 강물처럼/맡은 책임을 깨끗하게 더 깨끗하게, 유리알처럼/날마다의 삶을 기쁘게 더 기쁘게, 잔치 집처럼” 정녕 세상을 품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는 자,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빠질 것인가? 세상을 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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