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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과 예수 (창 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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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예수 (창 45:1-8)


야곱과 요셉은 아버지와 아들인데도 성품에 있어서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버지보다 아들이 훨씬 낫습니다. 보통 설교자들이 인물 설교를 할 때 야곱은 우리 인간 모습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우리 예수님으로 조명을 합니다. 그럴 정도로 야곱과 요셉은 차이가 납니다. 야곱에게 나타난 특성을 보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 하고 요셉을 보면 예수님 모습을 보는 듯 한 차이가 납니다. 우선 이 아버지 야곱을 보면 야곱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야곱이 있는 곳에 싸움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런가? 야곱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이기주의란 자기에게 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성격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이삭이요 어머니가 리브가이고 형이 한명 있는데 바로 쌍둥이 형제 에서입니다. 이렇게 네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 이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야곱 때문에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몇 가지 사건이 말해줍니다. 첫째 사건은 구약 시대는 아버지가 영적 지도자 역할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잠언 성경을 보시면 “네 아비의 법을 떠나지 말며 어미의 교훈을 들을지어다.” 가정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영적 축복권을 가지고 있음이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이러한 영적 고난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역자로 택하실 때 약속이 성경에 아주 분명합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역할의 영적 축복권을 주셨습니다. 이런 경우가 신약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아버지의 축복 기도가 곧 하나님의 축복 통로 역할이라는 영적 의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야곱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장자 문화입니다. 이 아버지의 최고의 축복은 언제나 장자들에게 주어지는 전통이 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이지만 동생입니다. 야곱이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아버지의 축복은 에서에게 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 아버지의 축복권은 그 집의 재산권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짜고 교묘한 방법을 써서 아버지를 속이는데 성공을 합니다.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창세기 27장에 나옵니다. 

아버지 이삭이 이제는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때 이삭이 맏아들 에서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이제 내가 늙어 언제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죽기 전에 너에게 복을 내리겠다. 빨리 가서 사냥을 해와라. 그리고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오라. 내가 맛있게 먹고 그 즐거운 마음으로 너에게 모든 축복을 남기고자 한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갔는데 엄마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합니다. 

그래서 둘이 사기극을 벌입니다. 염소 한 마리를 잡아다가 급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아버지를 잡수시게 하고 “아버지! 내가 아버지의 큰 아들 에서이오니 이제 축복해 주소서.” 분별력이 떨어져있고 시각장애인이 된 아버지가 속아서 잘 잡수신 그 기분 좋은 마음으로 축복해 달라는 자에게 축복 기도를 다 해주었는데 기도문이 얼마나 좋은지 원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 축복대로 모두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야곱은 길이길이 후손적으로 쓰임을 받았고 에서의 행적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야곱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형 에서는 그것을 나중에 안 다음에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머니 리브가가 이때 야곱을 도망가라고 시킨 것은 에서가 동생을 죽일 것 같아서 피신시킨 것입니다. 야곱은 도망을 가고 에서는 어머니를 증오하면서 이 집안은 관계성이 다 깨어진 불행한 집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뜨거운 맛을 본 야곱은 정신을 차렸는가? 아닙니다. 계속 끝없는 간교한 욕심꾸러기로 삽니다. 외삼촌네 댁에 가서 밥 얻어먹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될 텐데 부자란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외삼촌의 재산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를 합니다. 그런 방법이 정말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얼룩무늬 가축이 출생하면 자기의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외삼촌의 것이다 약속하자.” 약속을 해놓고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의 껍질 벗겨서 무늬를 만들어서 가축들이 교미를 할 때 그 앞에서 그것을 보면서 새끼를 갖게 했더니 아롱진 무늬가 전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외삼촌의 많은 재산이 야곱의 것이 되는 기록이 나옵니다. 외삼촌이 한참 살다보니까 이상해졌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자기 재산이 야곱에게 다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삼촌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외삼촌과도 또 살수가 없어서 한밤중에 또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을 나갑니다. 야곱이 얼마나 싸움과 다툼이 많았는가 성경말씀에는 그는 뱃속에서부터 싸운 사람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5장 22절에 “그의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이기주의자는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 좋은 대로 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 명이라고 했는데 지혜스러운 남편이라면 네 사람을 골고루 사랑해야 가정 평화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라헬만 좋아합니다. 그러면 다른 부인들이 가만있었겠습니까? 아들이 12명이면 골고루 사랑을 주어야 불평이 없습니다. 라헬이 출산한 요셉만 좋아합니다. 

야곱의 지혜롭지 못한 편애 때문에 어떤 결과가 왔느냐? 다른 형제 10명이 요셉을 죽이자고 하는데 한 사람도 반대를 안했습니다. 그러자고 해서 실제 행동에 옮겼습니다. 다만 형제 중에 유다가 “죽이는 것보다 팔아먹으면 우리가 돈이 생기지 않느냐?” 그래서 팔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혜롭지 못한 처세 때문에 공연히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산 사람이 됩니다. 꿈 많은 17살에 노예로 팔려가서 이웃 나라 나그네 생활을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 야곱과는 정 반대의 성품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 고난을 남에게 탓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보는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5절에 나타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이곳에 보내셨나이다.” 지금 상황을 설명하면 요셉은 애굽에 팔려간지 22년 만에 그 나라의 최고의 실세 총리대신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10명의 형들은 먹을 것이 없어 애굽에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운명적 자리에서 자기들이 팔아먹은 동생을 지금 만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대해서 잊을 수 없는 험악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러다가 장사꾼이 지나가니까 돈 생각이 나서 애굽 사람에게 인신매매를 해서 노예로 팔아먹어서 애굽에 온 것입니다. 애굽에 와서도 요셉은 죄 없이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고 꿈 많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을 외로움과 억울함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자기 운명을 험악하게 만든 원수들을 지금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요셉이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는 “이 놈들 다 죽여 버려라.” 그 한 마디면 끝납니다.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지금 만난 것입니다. 요셉은 이때 두 가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내게 원수 갚으라고 주신 기회이다.’ 이런 정리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22년 사무친 내 원한을 하나님이 아시고 내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다. 자! 내 원수들 내 손에 달려있으니 마음대로 해라.” 만약 그렇게 되면 형들은 인과응보의 결과로 죽은 것이 됩니다. 자업자득의 당연한 일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이런 해석이 요셉에게 지금 기회로 주어졌습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도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자기 편리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옛날 시골 마을에 새벽 기도 열심히 다니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별명이 도둑 할머니입니다. 새벽 기도 갔다 오는 길에 남의 집에 가서 오이, 호박을 다 따가는 겁니다. 그래서 도둑할머니로 소문이 났는데 교회 청년들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 소문이 났습니다. 새벽기도 갔다 오면서 남의 것을 도둑질해가면 어떡합니까? 교회 큰일 납니다. 하지 마십시오.” 할머니가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큰 소리를 치는 겁니다. “고얀 놈들! 하나님이 비와 햇빛을 주셔서 농사지어서 잘 먹고 살면서도 십일조를 안내니까 내가 갖다 먹는 것뿐인데…….” 요셉의 해석은 “이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이곳에 보내기 위해서 된 일입니다.” 

예정론이라는 신학이 있습니다. 예정론 신학을 잘못 해석하면 큰 일이 벌어집니다. 온갖 흉악한 죄를 짓고도 “이거 하나님의 예정이야.” 그러면 기독교는 모순 종교 밖에 안 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정의하는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죄의 결과를 예정이라고 하자.” 지금 이 요셉의 예정론은 확실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이 일 때문에 나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아주 올바른 예정신학을 발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사건을 예정으로 보는 영적 능력이 요셉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비로 삼으시고 이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여러분! 죄책감 갖지 마십시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의 발표는 요셉 쪽에서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만약 형들이 요셉을 보고 “야! 요셉아! 네가 이렇게 잘 된 것은 형들 덕분이야. 우리가 너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잘 된 것이지. 너를 우리가 팔아먹지 않았다면 네가 이렇게 잘 되었겠느냐?” 이렇게 말해보십시오. 마치 가룟 유다 덕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구원을 완성했다는 괴변 신학과 똑같은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상대방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 과정에 나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릴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예정 구원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때 요셉이 밝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세상의 평화의 기초 신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를 죽여 없애려고 행동한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신학이라야 주님의 진리이지 “이것은 하나님이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놈들 다 죽여라! 너희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가 죽이려는 나는 하나님이 살려주셨고 나를 죽이려 했던 너희는 하나님이 죽이려는 것이다. 그리 알아라.” 했다면 요셉은 성경의 인물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진리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기독교의 최초의 순교자는 집사님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스데반 집사의 최후 기도도 똑같습니다.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야곱은 이기주의자인데 비해서 아들 요셉은 이타주의자입니다.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때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꼈겠습니까? 17살 어린 동생을 시기심으로 고난스럽게 했던 자신들의 그 흉악한 모습의 노출이 아마도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아먹고 나는 팔려서 왔지만 그 파렴치한 우리 집안의 수치를 하나님은 축복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한스러웠던 과거 역사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오늘로서 총정리하고 끝냈습니다.” 이게 얼마나 훌륭한 신학입니까? 주워 담을 수 없이 없이 흘러가버린 과거의 물을 지금 원망해봤자 피차 괴로움만 남을 뿐이요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를 믿고 지혜로운 과거 청산, 하나님 역사의 새로운 출발! 이것이 요셉의 신학입니다. 

과거 정리가 어려운 민족 중에 우리 한국 민족이 단연 앞장입니다. 보십시오. 한국은 지금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나 아내의 총각, 처녀 시절 연애했던 부정만 발견되면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오늘의 행복은 다 내어버리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 사람은 결혼할 때가 되면 과거 정리를 잘 하고 가셔야 됩니다. 학창 시절에 캠핑을 가서 남학생, 여학생 어울려서 사진 찍은 것은 모두 불태워버려야 합니다. 

그 동안 썼던 일기장, 편지 왔다 갔다 한 것은 싹 다 없애야지 사진 한 장 보고 의심하면서 캐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변합니다. 우리 민족은 다혈질이 특징이라서 뭐든지 감정싸움이 심합니다. 지금 요셉은 그 과거 정리를 지혜롭게 다 끝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현상이 우리 지도자들에게도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정치사를 보면 국가나 민족보다 내가 잘되기 바랍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게 할 수단으로 뭐든지 해나가려고 하는 이기주의 성격이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24절에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요셉의 판단으로는 형들이 가다가 틀림없이 또 싸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야! 네가 먼저 요셉 죽이자고 했잖아? 너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무슨 소리야? 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은 너인데?” 서로 싸울 거 같았습니다. “이제 싸우는 것 그만! 우리 집안은 어머니가 넷이요 배다른 형제가 모두 12명입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날마다 어머니끼리 눈 흘리며 싸웠고 우리는 핏줄 따라 패가 갈라졌소. 이제 그런 일 지긋지긋한 거 그만 합시다. 먹고 사는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소. 가서 늙으신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오시오.” 결국 팔려갔던 요셉 때문에 그 집안은 오랜만에 평화가 이루어졌고 야곱은 그의 말대로 험난한 세월을 보내다가 이때부터 가장 좋은 말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야 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 국가도 누군가는 희생적 역할 자가 있을 때 평화가 옵니다. 이기주의자만 있으면 싸움만 계속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가 당하는 험난한 고난 부분도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피해를 막아주면서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현장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노력은 아버지 야곱을 감화시켰습니다. 

“아! 내 아들 요셉이 어쩌면 저렇게 훌륭하게 되었는가? 난 20년 동안 요셉이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살아있었구나!” 아들에게 감화를 받아서 이때부터 야곱은 정말 믿음의 조상다운 성직자로 변합니다. 자손들에게 장래 예언 축복 기도를 합니다. 창세기 49장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서 내 말을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맏아들 르우벤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아들 베냐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일이 장래 그들이 가야할 예언성 축복 기도를 드려주었는데 모두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적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종의 축복의 예언성들입니다. 이 일을 마치고,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마지막은 요셉의 감화력에 의해서 성직자답게 아들들을 향해서 예언 기도를 마치고 마지막 자기 사명을 끝내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구약은 예언성이요 신약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성경을 보는데 요셉은 예수의 모형입니다. 요셉은 어린 목자였는데 예수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요셉이 지금 형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 팔려갔는데 예수는 자기 민족에게 미움을 받아 배척을 당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도단으로 보낸 것이 그의 고난의 시작이 되었는데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으로 보낸 것이 고난 사역의 시작입니다. 요셉의 형제 중에 유다가 팔자고 제안했고 예수님은 제자 중에 유다가 팔았습니다. 

요셉은 은 20, 예수는 은 30, 요셉이 구덩이에 3일 동안 갇혀 있었는데 예수님은 무덤에서 3일 동안 계셨습니다. 요셉이 죄 없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는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 두 관원과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두 죄수와 함께 있었습니다. 요셉의 두 관원 중 하나는 사형 당했고 하나는 구원되어 복직했습니다. 갈보리 산 위의 두 사형수 중 한 강도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고 다른 강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요셉은 애굽의 통치자가 되었고 예수는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요셉은 헤어졌던 11형제를 다시 만났는데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후 헤어졌던 11제자를 부활 후에 다시 만났습니다. 애굽 7년 대 흉년에 지혜롭게 백성을 구원하고 있는 요셉과 7년 대 환난에서 성도를 구원하는 예수는 같습니다. 온 국민이 요셉에게 머리 숙여 경배하고 있는데 예수는 만백성이 그의 이름 앞에 머리 숙여 경배를 합니다. 지금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고 자기 나라로 영접하고 있으며 예수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영접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 모든 성도들은 삶의 목표가 분명합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신학에서는 ‘푯대’라고 말했습니다. 저 푯대를 향해서 내가 ‘작은 예수’, ‘예수의 그림자’로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이익적 고난 추억마저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면서 요셉과 같은 신앙과 마음으로 작은 예수의 모습, 예수의 그림자로 우리가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비록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미완성 단계이지만 그러나 그 목표만은 변하지 아니하고 오늘도 내일도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끊임없이 달려가는 그것이 곧 나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 지금 살고 있다.” 야곱 같은 성품도 마지막에 거룩한 성직자로 변할 수 있게 영향을 준 요셉의 감화력이 나에게도 나타나서 내 주변의 숱한 이기주의자들로 우글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감화 받을 수 있도록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요셉의 모습! 예수의 그림자 역할을 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남은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야곱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요셉에게서는 예수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요셉의 모습의 감화력을 통해서 야곱이 변화된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말씀에 진리의 귀를 기울여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작은 예수’, ‘예수의 그림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통한 하나님의 영적 감화력이 주변에까지 나타나서 아버지마저도 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은혜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도 우리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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