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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하나의 리모델링 (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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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리모델링 (엡 4:17-24)

오늘은 우리교회에 또 하나의 소중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리조이센터를 주셨고, 잘 리모델링된 예배당을 주셔서 깨끗하고 편리하게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이 예배당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믿고 배우는 중심지가 될 것이고, 홀리조이센터는 지역과 호흡하고, 부산 교계를 위해 기여할 것입니다. 그 동안 애쓰신 교우님들과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계속해서 기도하고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신앙을 <사람을 지고의 신이나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시키는 인간의 내적 태도나 신념 혹은 신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나 신념>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 옳은 표현입니다. 그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신앙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고 할 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떻게 닮아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고 배울 구체적 모델을 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닮아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으로는 삶을 제대로 세워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떻습니까? 17절을 먼저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이방인>이란 표현은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방인의 특징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18절부터는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했습니다. 총명이 어두워졌습니다. 마음이 굳어져 판단력이 마비되고,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 마음이 방탕으로,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게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잘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직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생겼을 뿐이지, 실제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정도로 훌륭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번에 모든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해병대의 총기 사건 한 복판에 정 이병이라는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시리아에 단기선교를 다녀오기도 한 선교사 지망생으로서 신학대학에 재학 중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라를 위해 해병대에 자원했습니다. 그는 가장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이 사랑이라고 했고,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고 했던 가슴이 따스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 죽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변했습니다. 군대에서 당한 가혹행위들이 그를 딴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군대 상관들은 그가 읽던 성경에 불을 붙이고, 그의 옷에 에프킬러를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너무 시달렸습니다. 혹독한 상황에서 그는 변했습니다. 사랑하다가 죽고 싶다던 젊은이가 다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정 이병에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인생이 가해오는 온갖 가혹행위에 시달리다보면 어떻게 변할는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스무 살 청년 시절에 그렇게 선량했던 사람이 인생의 중년기를 지나면서 마음의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불쌍한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젊을 때대로, 나이 들어서는 나이 든 대로 흔들리고, 고민하고, 스스로 올무에 빠지고, 그 올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 모습만으로 행복한 성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매력적인 분입니다. 

<루스 맥케이도> 목사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일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순결했다. 무리의 흠모를 받으셨지만 그 분은 검소한 삶으로 족하셨다. 여자들의 공궤를 받았으나, 불순한 생각으로 욕 들으신 일이 없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능욕당하셨지만, 그들이 자비를 빌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셨다. ......예수님의 마음은 평안했다. 제자들은 폭풍 중에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으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 분은 그 속에서도 주무셨다.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자 예수님이 시무룩해져서 집으로 가셨던가? 베드로가 부인하자 노발대발하셨던가? 병사들이 얼굴에 침을 뱉자 도로 그들의 얼굴에 불을 뿜어내셨던가? 천만부당한 일이다. 그 분은 침착하셨다. ......그 분은 또한 위로부터 주어진 소명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에도 이끌려 다니지 않으셨다. 그 분의 마음은 목표가 분명했다. 대부분의 인생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성취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게다가 그 분의 생각은 얼마나 즐거우셨던가! 아이들은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은 백합화에서 아름다움을, 예배에서 기쁨을, 문제에서 가능성을 찾을 줄 아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품 중 단연 압권은 그 분의 마음이 신령했다는 것이다. 그 분의 생각은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 분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라고 말씀하셨다....예수님의 마음은 신령했다.> 이게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와 너무도 다릅니다. 그 분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중심이 분명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닮기의 주요 영역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예수님 닮기는 외모가 아닌 마음에서 일어나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5절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채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변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마음이 변하는 것,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가장 위대한 기적이요, 변화입니다. 본문 23절도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성형 수술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집에 이사를 가고, 새 자동차를 산다고 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을 따라 살던 성품을 버릴 때, 하나님이 가지신 의, 진리, 거룩함을 품게 될 때, 새사람이 됩니다. 

22-2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의 심령, 마음이 새롭게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변화가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대 설화 중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행복을 잘 숨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찾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도록 행복을 꼭꼭 숨기게 했습니다. 천사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의논을 했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 두자는 주장, 높은 산에 두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교활한 인간들은 그 정도는 쉽게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한 천사가 기발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행복을 인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욕심 때문에 자기 마음을 잘 볼 수 없고, 자기 마음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를 것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이때부터 행복은 사람의 마음에 숨겨져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행복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마음을 개조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정이 급하고 쉽게 화를 내는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신학교 다닐 때부터 성정이 급하고 불쑥 불쑥 화를 잘 냈고, 동료들은 그 분을 늘 조심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이런 성품은 목사님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을 마구 몰아붙이고, 툭 하면 화를 냈습니다. 결국 목회는 벽에 부딪혔고, 그 분의 많은 재주와 열정은 그 변하지 못한 성정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라고 예외이겠습니까? 부끄럽게도 아직 변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교우님들이 저를 괜찮은 목사로 생각하신다면, 단지 제 부족한 모습을 모르실 뿐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더욱 간절합니다. <제발 내 심령이 새롭게 되었으면!>하는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름답게 변화되시길 축복합니다. 심령이 변화되어 옛 사람은 벗고, 새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예배당만 리모델링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리모델링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반드시 이루어야 할 또 하나의 리모델링입니다. 

이것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기까지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연단을 통해서든지 우리를 자극하셔서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몰아붙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8장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란 말씀처럼 우리가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기초는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들판의 목자들은 천사들을 보았고, 그 노래를 들었습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누가 천사를 보았습니까? 천사를 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야기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집에 달려가서 <우리가 천사를 보았고, 그 노래를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사를 본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구간에 달려가서 천사들이 말한 <구유에 누워계신 구주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구주 예수님을 뵙지 못한다면 천사를 아무리 많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위대한 별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천문학적인 대 발견이었습니다. 요즘이라면 그들은 달려가 논문을 써서 발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구주 탄생을 알리는 별을 발견했다는 것, 그 별을 관측한 방법, 또 그 별이 새벽 몇 시에 떠올라 몇 시까지 비추었는지, 서쪽으로 기울 때 그 각도가 몇 도였는지 등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자의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별을 본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별이 드러내주는 탄생하신 왕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별을 따라 길을 떠났고,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볼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안드레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은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따라 가라고 충고했습니다. 안드레는 그 때부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그 때 안드레가 무엇이라고 질문했습니까?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악수 한 번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저는 당신을 흘낏 한 번 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답니다. 저는 늘 당신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늘 당신으로 제 마음을 채우고 싶습니다. 당신의 숨결, 당신의 체취, 당신의 말씀, 당신의 눈빛, 당신의 모든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난 당신께로 가고자 합니다. 어디 계십니까? 계시는 곳을 알려주십시오. 

여기 길에서 이렇게 잠시 뵙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계신 곳에 함께 있고자 합니다. 이제부터 제 시선을 당신께만 고정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였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할렐루야! 안드레와 또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갔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비로소 제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가까이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우리 삶을 계속 예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스며들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면 누구나 승리자가 됩니다. 한 풍선 장사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풍선에 가스를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풍선들은 아름다운 색깔을 자랑하면서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 때 피부색이 검은 흑인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저씨, 검정 색 풍선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나요?> 

그 때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그럼, 풍선 색깔은 아무 것도 아니란다. 그 안에 어떤 가스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거든...자 봐라. 검정색 풍선도 수소 가스를 넣으면 얼마나 잘 날아오르는지 내가 보여주마.> 아이가 보는 앞에서 검은 색 풍선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기뻐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검든지 희든지, 약하든지 강하든지,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변화될 것이고, 우리 삶은 아름답게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땅끝교회 교우 여러분, 축복의 하늘로 날아오르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의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예수님을 닮길 원합니다. 오늘 성찬 예식을 통해 우리 안에 영적 리모델링이 이루어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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