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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 세를 내신 예수님 (마 17: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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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세를 내신 예수님 (마 17:22-27)
  

폭우로 많은 피해가 있다는 보도를 들을 때는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50년 만에 최악의 가뭄으로 수 만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간다는 아프리카의 소식에 비하면 흡족한 비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물이 부족한 나라 쪽에 속한다는데, 그 많은 물을 다 흘러 보내버리는 것을 보면 또 다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어느 곳이고 땅을 깊이 파면 물이 나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그런데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그렇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도 어느 부분이든 깊이 상고하고 묵상하면, 반드시 생수와 같은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마태복음을 강해설교 해오던 중, 오늘 본문의 말씀은 조금 설교하기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그만 건너뛸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다가, 그렇게 하면 또 성경 말씀의 어떤 부분은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냥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기로 결심을 하고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보고여서,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제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성전 세를 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22-23절을 보면 “갈릴리에 모일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될 것이나, 하나님의 역사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장차 다가올 시험에 대비하여, 제자들이 각오를 단단히 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마태복음 16:21절에 이어 두 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자, 매우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사실을 접할 때에, 나름대로의 생각과 이해를 가지고 그 관점에서만, 아니면 자신의 관심 분야만을 선별하여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과 마주쳤을 경우, 미용사는 그 사람의 헤어스타일을 주로 기억하고, 성형외과 의사는 그 사람의 성형 수술 흔적에 주목하며, 패션 디자이너는 그 사람이 입은 옷에 대해 정확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른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만 보게 만드는 것을 가리켜 선 이해, 혹은 선입견이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자신이 죽으실 것과 똑 같이, 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의 죽음에만 관심을 집중함으로,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깨닫지도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서만 생각하고 있던 편견과 오해로 말미암아, 주님의 말씀 중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 부활에 대한 말씀은 듣지 못하고 매우 근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종말에 대하여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에는 귀를 막은 채, 오늘날에도 그 때가 몇 년 몇 일이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은혜와 축복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믿음의 고난에 대한 말씀에는 소경이 되어, 값싼 은혜와 물질적 축복만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잘못된 편견이나 선입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마음으로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전 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몸은 균형 있는 식단에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스턴트식품만 골라 먹는 것처럼 음식을 섭취한다면, 결국 부작용으로 건강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성경의 편식증은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을 골라서 섭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종합 선물 세트에서 입에 달콤한 초콜릿만을 골라 먹으므로, 결국 이를 상하고 몸을 해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강단이 성경을 편식하도록 설교하고 가르쳐서, 성도들을 입에만 달콤한 것으로 편식시켜,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인 교회의 건강을 무너뜨리고 병들게 해버렸습니다. 특히 기복주의와 물질주의, 저급한 신비주의와 인권운동 등은 분명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을 가지게 함으로써, 건강한 성도와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병든 성도와 교회를 양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언제나 치우치지 않는 통전적인 성경 관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고난과 축복, 십자가와 부활과 같은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절름발이 신앙, 왜곡된 신앙이 아니라, 균형이 잡히고 온전하고 그래서 건강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4-27절은 성전 세에 대한 논쟁입니다. 먼저 24절을 보면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갈릴리 선교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정죄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자들에 의하여, 성전 세 납부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반 세겔’이란 두 드라크마를 뜻합니다. 

드라크마는 은으로 만들어진 유대인의 기본적인 주화로, 100 드라크마는 1 므나였으며, 6000 드라크마는 1달란트에 해당되었습니다. B. C 360년경에 1 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 가격이었으며, 황소 한 마리는 5 드라크마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반 세겔’ 즉 ‘두 드라크마’는, 25세로부터 50세까지의 유대인 모든 남자들이 매년 내야만 하던 성전 세를 말합니다. 성전 세는 성전의 유지 및 보수비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출애굽기 30:11-16에 규정된 ‘속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속전’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함으로 드리는 일종의 의무세로, 후일에 정기적인 매년의 인두세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는 로마법의 규정에는 없었으므로 강제적인 세금은 아니었으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내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대부분의 유대인은 자발적으로 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좌하기에 혈안이 된 자들은 이 ‘반 세겔’ 곧 성전 세를 문제 삼아서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희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즉시 ‘내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당연히 성전 세를 내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 묻기도 전에, 먼저 성전 세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내신다’라고 대답하고, 예수께서 계신 집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세를 받는 자들과 베드로와의 대화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신적인 전지성으로 성전세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있었던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고 물으셨습니다. 관세란 국가가 일정한 지역의 경계선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하여 부과하는 통관세와 상품에 대한 간접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국세’란 모든 국민에게 부과하는 정규적인 조세를 말합니다. 고대 군주들은 처첩을 많이 두어 수십 명의 아들들을 두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나 임금에게 아들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의 아들에게는 세금이 면제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베드로는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뜻으로 “타인에게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예수님은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만왕의 왕이l시고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신 자신은,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전혀 없음을 명확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성전 세를 바칠 필요가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 모든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성전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세 수금원이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 예수는 왜 성전 세를 내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께서 누구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요한복음에 있는 말씀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자기 땅에 왔지만,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고 이러한 푸대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가 외국에서 오래간만에 돌아온 집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무시하고 여러분까지 소홀히 대접한다고 하여 결코 낙심하거나 상처를 받지 마십시오. 어차피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고, 그들 역시 우리가 속한 하늘에 속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주님과 복음을 모르듯이,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 역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처럼, 이 세상이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왜 성전 세를 내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곳임을 명심하면서, 사람에게 기대를 두지 말고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최고의 보좌에 앉히시고 만물을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진정한 자신의 자녀로 존귀하게 대접해 주실 때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성전 세가 면제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에, 속전인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은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전 세를 받으실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27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이렇듯 주님께서는 자신이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성전 세를 납부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메시아의 과업을 앞두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마찰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성전 세를 내도록 하신 이유는,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실족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넘어지게 한다’라는 뜻으로,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말이 여기서 온 것입니다. 오늘날 ‘스캔들’이라고 하면 주로 남녀 관계에 대한 추문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당시는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방면에서 사람들 앞에 말썽이 되고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면, 모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요 대제사장으로서 성전 세를 낼 필요가 없으셨지만, 성전 세를 납부하지 않음으로서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실족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전 세를 내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음이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주님의 신분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처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본을 받아 성전 세를 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고 실족할 가능성이 많음을 염려하신 주님은,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양보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로 귀중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세상 사람들이 딛고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세상의 디딤돌로 부르셨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져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거침돌과 장애물로 부르신 것이 아님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우리 주님처럼 자신의 기득권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가 어느 날 자기 논의 물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옆에 있는 논임자가 자기 논에서 물을 허락도 없이 자꾸 빼갔습니다. 그는 최근에 교회 나오기 시작한 초신자였습니다. 그는 시비를 하고 싶지 않아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가보니 다시 수로가 돌려져 있었습니다. 농부는 화가 났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러나 믿음으로 산다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옹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저 사람이 틀리고 제가 올바른 일을 하는데, 왜 내 마음 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농부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하며 계속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님의 음성이 그의 심령에 들어왔습니다. “너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사느냐? 그 이상으로 살 수는 없겠느냐?” 농부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올바른 일 그 이상이라니? 그래서 그는 성령님의 음성을 곰곰이 생각하며 묵상하였습니다. 농부는 그 뜻이 무엇인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 자기 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예 수로를 이웃 논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일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고 내면에서 무엇인가 감동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이웃 논의 주인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이시군요. 저도 이제는 당신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단순히 올바른 삶을 사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기득권과 권리마저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얌체야!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통계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면서 자기희생은 조금도 않으려 하고 잇속을 꼬박꼬박 챙기는 사람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너무나 뻔 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예수님을 믿으며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손해 볼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였던 한 분이 바위투성이의 험한 산에 사는 염소 두 마리가 좁은 오솔길에서 만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쪽은 300미터의 깊은 협곡이었고, 다른 한 쪽은 깎아지른 듯 한 가파른 절벽이었습니다. 돌아설 공간도 없었고 뒷걸음질을 하면 떨어지게 됩니다. 그 때 두 마리 염소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길을 비키라고 서로 싸우는 대신, 염소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가능한 한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다른 염소가 그 위를 넘어서 지나갔고, 결국 두 마리가 모두 안전하게 통과해 지나갔습니다. 서로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고집을 부렸더라면, 두 마리 염소가 싸우다 다 죽을 번했는데, 양보함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땅에는 어떤 면에서 염소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통일을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인, 가진 자들, 여야 정치인 모두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 사회가 얼마나 각박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만 그렇습니까? 오늘 교회 안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지는 않는가?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아닌가 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싸우고 다투고 갈등합니다. 조금도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이나 이익이나 권리를 지키기에만 몰두합니다. 자신의 어떤 권리도 결코 양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죄와 하나님의 공의 사이에서, 두 마리의 염소처럼 오도 가도 못한 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보시고, 종의 형체를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같이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죽어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밟고, 자신의 위로 걸어가게 하사,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의 길로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예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성전의 대제사장이시요, 아니 성전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그 자세를 본받아, 더 희생적이고, 더 겸손하고, 더 넓은 마음을 갖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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