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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우미양가의 의미 (요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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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우미양가의 의미 (요 1:35-42)   


여러분은 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잘 하셨습니까? 지금은 학교 성적을 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하지만 옛날에는 ‘수우미양가’ 다섯 단계로 평가했습니다. 저는 방학이 되면 다 좋은데 한 가지 스트레스 받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적표입니다.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 드리고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항상 부담이 되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 ‘수’가 많으면 무조건 좋은 것이고 ‘가’가 있으면 나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평가에 쓰이는 다섯 단어는 모두 좋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수(秀)’는 '빼어날 수'자로 '매우 우수하다'는 뜻 입니다. 
‘우(優)’는 ‘넉넉할 우, 뛰어날 우’자로 넉넉하고,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미(美)’는 ‘아름다울 미’로 ‘좋다’는 뜻입니다. 역시 잘했다는 의미입니다. 
‘양(良)’은 ‘어질 양’으로 ‘어질다, 훌륭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괜찮다'는 뜻입니다. 
‘가(可)’는 ‘옳을 가’로 ‘옳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육의 기본 정신이 사실은 수우미양가라는 평가 기준에 담겨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도 그 학생 안에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학생들 마다 가지고 있는 우수성이 일찍 드러나는 학생이 있고 조금 늦게 드러나는 학생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왜곡되어 우리의 현실은 그 우수성이 지금 드러나지 않으면 낙오자인 것처럼 대하는 우리의 평가 문화와 경쟁 문화가 잘못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도님 한 분과 자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웃었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성적이 반에서 끝에서 네 번째랍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공부 좀 하라’고 꾸중을 했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나를 혼내려면 내 뒤에 있는 세 명을 혼내고 나를 혼내라’고 하더랍니다. ‘그 아이들은 그 부모가 혼낼 것이고 너는 내 아들이라 혼낸다’고 말을 했다고 하면서 그 아이의 낙천적인 모습에 그 분과 함께 웃었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그 놈이 공부는 못해도 태권도는 아주 잘합니다. 4단인데 도장에 가서 살며시 봤더니, 제 아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잘합니다. 강서구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나중에 국내든 해외든 도장을 하나 차리면 될 것 같습니다. 다 살아갈 재능은 하나씩 있나 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능력이 있습니다. 어른은,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 재능의 가능성을 키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교육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재능, 즉 하나님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은사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가 귀하게 세워지며 쓰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과 게으른 모습, 이기적이고, 시행착오를 많이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히 너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훌륭한 믿음의 일꾼이 될 것이다. 너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격려하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반면에 사단은 ‘너는 안 된다. 너는 못한다.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너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처음으로 만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인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감격을 가지고 그들의 형제들에게 가서 예수님은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의 소개를 받아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그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42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봅시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은 이름을 언급하시면서 베드로에게 가능성의 희망을 강하게 심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때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이름입니다. 야곱의 둘째 아들의 이름이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말의 뜻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듣는다는 의미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정적으로는 너무 여러 가지 소리를 듣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주 변덕이 심한 사람,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변덕이 심한 사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에게 흔히 시므온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시몬의 아버지인 요한이 아들의 이름을 시몬이라고 지어줄 때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지어 주었겠지만 예수님은 시몬에게서 긍정적인 이름의 의미보다 부정적인 이름의 의미에 가까운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행적을 보면 그는 매우 감정적인 사람으로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시며 시몬이라는 이름의 뜻과는 전혀 게바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헬라어의 이름으로 하면 베드로입니다.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작은 바위가 아닌 거대한 바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유부단하고 귀가 얇아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삶을 살아온 시몬을 커다란 바위와 같은 베드로의 존재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에서 ‘장차’입니다. 지금은 시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반석처럼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시몬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격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품위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물가에 내 놓은 아이처럼 불안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항상 자기를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실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초대교회의 수장으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 세우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버리고 갈릴리 바다로 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 가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세 번의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그의 무너진 영성과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시키십니다. 깨어지고 찢긴 상처를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시몬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며 품어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시몬이 베드로로 변화되는 과정이 성경에 한 폭편의 드라마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했었던 베드로에게 다시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주시는 말씀이 ‘너는 나를 따르라’입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베드로는 초대교회 수장이 되어 그 어려운 교회를 이끌어 갑니다. 예수님을 위해 순교를 당하며 초대교회를 큰 기둥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초대교회에서 반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가’ 평가를 받았던 베드로를 ‘수’의 평가를 받도록 바꿔 놓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생은 세 개의 동사로 표현된다고 합니다. ‘to want’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to have’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to run’입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에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세 개가 모두 이뤄져도 인생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행해 진 것은 ‘to want, to have, to run’을 위해 ‘to be’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이 두려워 무화과나무 밑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숨어 있는 장소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아담의 존재론적인 물음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너는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는 것입니다. ‘to be’에 대한 질문입니다. ‘to be’의 문제는 부부, 부모와 자녀, 직장, 교회 등 모든 생활에 있어서 복의 중심입니다. ‘to be’가 세워지지 않은 가운데 ‘to want, to have, to run’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to be’를 부정하면서 하나님을 위한 백성으로 사는 것을 부정합니다. ‘너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너는 그런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너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품으시고 상처를 어루만지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to be’을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 주시면서 ‘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다’고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 주십니다. 

아직은 ‘양’과 ‘가’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수’가 되고 ‘우’가 될 것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직 시몬의 상태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예수님 안에서 장차 게바, 베드로의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한 번 따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주 안에서 수중한 사람입니다.’ 옆 사람을 보면서 ‘당신은 예수님 안에서 보배와 같은 사람입니다. 사랑합니다.’

우리 함께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찬송을 부르며 나 자신을 축복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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