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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천후 교회 (살전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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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후 교회 (살전 1:1-10)

<바울 사도의 자랑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후 50년대 초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 디모데 일행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 빌립보에서 풀려난 직후 처음 마게도냐의 수도이며 항구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고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데살로니가 전서는 신약 성경 안에 들어가 있는 바울 서신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책입니다. 이 첫 번째 서신의 첫 머리에서부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극구 칭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바울의 편지들 중에는 처음부터 그 교회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 서신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들이 대표적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관심은 도대체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교회였기에 바울 사도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을까요?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비롯하여 많은 이방신들이 창궐하는 도시로써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이 많은 동시에 반대와 박해도 심한 곳이었습니다. 바울 선생은 본문에서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 복음을 힘써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5절에 보면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말로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했습니다. 

교회가 일어나는 것은 말이나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인간적인 잔재주만 가지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과 성령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큰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 인간적인 재주로 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며 전했습니다. 

그 결과 6절에 보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인 바울 일행을 본받다 보니 7절에 보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 역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8절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울 사도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말씀이지요. 

<믿음의 역사⟶사랑의 수고⟶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 선생의 칭찬들 중에서 오늘 우리는 특별히 3절 말씀을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 말씀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을 핵심적으로 요약해 줄뿐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믿음, 소망, 사랑은 기독교의 세 가지 주덕(主德)이지요. 초대 교회에서는 이 세 가지 덕이 이단 종파나 타종교, 혹은 로마 정부에 의해서 쉽게 훼손될 수 있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덕들을 잘 지켜 나간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을 설명할 때 그냥 추상적인 “믿음”만 쓰지 않고 “믿음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일어나고 생동감 있게 일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성도들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 사랑의 노동과 희생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말로만 사랑, 사랑한 것이 아니라 봉사와 희생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그냥 소망이 아닌 “소망의 인내”, 즉 예수 안에서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시련도 잘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소망, 소망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미래의 소망을 확실히 붙들고 있었으므로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심이 저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역사”를 말할 때 과거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므로 과거적인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그 예수님 때문에 오늘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것이므로 현재적인 것이지요. “소망의 인내”는 예수님 때문에 찾아올 미래의 영광을 바라며 오늘을 참을 수 있기 때문에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전천후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는 단지 믿음이 있다는 시늉만 가지는 교회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역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전자 제품이나 기계가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을 때 영어로 “It doesn't work.”라고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인들의 믿음도 고장이 나서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고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서 주인이 되시고 중심이 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찰스 스펄젼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목회했을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설교가들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매주일 예배에 장년만 6천여 명이 모이는 메가 처치에서 목회했는데 그 비결은 스펄젼 목사님의 영감 넘치는 설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 교회에 다니는 한 청년이 예수를 믿지 않는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고는 이 친구를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초대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 원했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이 청년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해서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청년은 너무 기뻐서 1주일 내내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우리 교회 스펄젼 목사님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제 친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친구보다는 목사님을 위해서 더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주일 아침 그 친구가 예배에 참석해서 스펄젼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목사님의 설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청년이 교회에 처음 온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우리 목사님 설교가 어땠니?” “솔직히 말해서 나는 스펄젼 목사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네. 나는 오로지 목사님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네.” 

오늘 우리 교회의 예배도 말씀도 장로님의 기도도 찬양대의 찬양도 오직 예수님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나 예전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우리 교회는 믿음이 역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말로만 “사랑, 사랑”할 것이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사랑에는 구체적인 봉사와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닙니다, 동사입니다. 사랑을 해보고 사랑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느 가정에 아빠와 엄마, 그리고 일곱 살 된 아들과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빠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들이심하게 다쳤습니다. 응급 수술을 받던 중 수혈이 필요했는데 아들과 똑같은 혈액형은 딸 뿐이었습니다. 다급한 아빠가 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얘야, 오빠가 네 피를 필요로 하는데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딸아이는 잠시 동안 무얼 생각하는 것 같더니만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 의사가 수술이 잘되어서 아들에게 아무 이상이 없을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까지 딸은 침대위에 쥐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네 덕분에 오빠가 살아나게 되었단다.” 아빠의 말을 들은 딸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와! 아빠, 정말 너무 기뻐요. 그런데 저는 이제 언제 죽게 되나요?” “아니,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아빠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제 피를 뽑으면 금방 죽게 되는 것 아닌가요?” 

다섯 살 먹은 딸은 자기의 피를 뽑아서 오빠에게 주면 자기는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단 말이냐?” “예, 그럼요. 전 오빠를 사랑하거든요.”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를 찾는 이들 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성도간의 사랑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확고히 붙들고 모든 것을 참고 기다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은 일이 생길 때나 나쁜 일이 생길 때나 항상 여러분들이 찾을 수 있는 전천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참 소망을 확고히 붙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는 질병이나 경제적 사정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중병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교인들, 가정불화로 고통당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저는 이런 분들이 교회에 나와서 소망을 굳게 붙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런 산 소망을 굳게 붙들었기 때문에 오래 참을 수 있었습니다. 순교를 당할 때에도 평온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 말 중에 어제와 오늘과 같은 말은 순 우리말인데 “내일”(來日)이란 말은 한문이지 우리말이 아니지요. 왜 “어제”와 “오늘”은 우리말이 있는데 “내일”에 해당되는 우리말은 없을까요?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많은 전쟁과 배고픔 속에 살다보니까 오직 어제와 오늘만 걱정할 뿐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미래의 소망을 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절망에 빠진 분들이라도 우리 교회에 찾아 나와 산 소망을 얻고, 바로 그 소망으로 인하여 모든 어려움을 잘 참아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유충이 나비가 되는 교회를 바라며>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한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뱃속 깊은 곳에는, 성스러운 고행자도 있고, 무섭고 더러운 유충도 잠들어 있습니다. 몸을 굽히고 이 유충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그 유충은 날개가 돋아나서 나비가 됩니다.” 

유충은 징그럽고 더럽지요. 하지만 그것이 나비로 바뀌면 아름다워집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그 마음속에 징그럽고 더러운 유충을 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다가가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유충이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유충을 품은 이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서 아름다운 나비가 되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본받아 유충이 나비가 되도록 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입을 통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어서 그래”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 사막, 하지만 그 어디엔가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숨겨진 우물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믿음이 없는 불신의 세계 어디엔가 믿음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사랑이 없는 살벌한 세상 어느 곳에 사랑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소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절망의 시대에 소망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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